★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역임한 제18대사령관 최갑진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30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역임한 제18대사령관 최갑진 장군

 

18대 사령관 중장 최갑진

  • 역임기간  1988.9.3 ∼ 1990.9.3
  • 생년월일  1935년 1월 3일
  • 출 생 지  경북 금릉
학 력
1959  해군사관학교 졸업(13기)
1961  미 육군 포병학교 기초반 수료
1971  미 육군 포병학교 고군반 수료
1977  국방대학원 수료
경 력
1959  해병소위 임관
1961  11연대 2대대 6중대 전포대장
1965  11연대 2대대 6중대장
1975  포11대대장
1980  2여단 포병단장
1983  해병대 제2사단 부사단장
1984  해병대 제6여단장
1986  해병대 제1사단장
1988  제18대 해병대 사령관
1990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75  대통령 표창
1980  보국훈장 삼일장
1984  보국훈장 천수장
1987  국방부장관 표창
1989  보국훈장 국선장

제17대사령관 박구일 장군의 뒤를 이어 제18대사령관으로 취임했던 최갑진(崔甲鎭) 장군. 해・공군 해병대 출신 예비역 장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최 장군은 87년 11월 1일 비록 축소된 규모의 모군사령부가 재창설되기는 했으나 해병대를 육군공수부대와 함께 전략군사령부에 흡수시키려는 특검단의 군 조직 개편안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또 지휘권에 대한 법적 권한을 뒷받침 할 직제령(職制令)이 미처(그때까지) 제정되지 않아 해병대사령관이 변함없이 해군본부로부터 제2참모차장 취급을 당하고 있던 그러한 시기에 사령관으로 취임하고 보니 사령부의 신청사 건립부지 매입 문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보다 급한 사령부의 직제령 제정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사령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TO의 부족으로 진급이 적체되어 있던 중・상사급 하사관의 정원을 늘여 그 숨통을 확트게 했고, 타군에 앞서가는 하사관 진급 선발모델을 개발하는 가운데 팀웤 강화를 위한 제대(梯隊)별 책임제를 철저히 실시했던 최 장군은 사단장 시절에 그러한 효과가 괄목할 만한 훈련의 성과로 나타나 육군과 가상적(假想敵) 관계에서 실시한 야외(강원도) 기동훈련에서 발휘된 해병들의 뛰어난 전투력에 감탄한 육군 사단장으로부터 “형님, 한 수 배웠습니다”라는 친밀감 넘치는 찬사를 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북 김천 출신(1934년생)으로 김천 성의고를 졸업하고 해사에 입교(13기) 59년 졸업과 동시에 해병소위로 임관했던 최갑진 장군은 해병학교 기초반과정을 거쳐 2년 간 보병과 장교로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뒤 포병과로 전과하여 미 육군포병학교 기초반(4주)과정을 이수했다.

 

그리하여 포병대대의 관측장교로부터 시작하여 연락장교, 중대장, 작전장교를 거쳐 70년 소령의 계급으로 입교했던 미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8주)을 수료한 뒤 85년 준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신병훈련소 작전장교, 2사관학교 생도대장, 포병연대장, 1사단 참모장 등 여러 직책을 거쳤던 최갑진 장군은 그 후 6여단장, 2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1사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사단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투력 강화의 지름길이 곧 각종 사고를 철저히 차단하는 부대의 안전 관리라는 것을 명심하고 제대(梯隊)별 책임 하에 사고 방지와 팀웤에 의한 훈련 성과 거양을 위해 매진케 함으로써 임기 중 강원도에서 실시된 각 2개 보병연대와 포병・전차부대까지 동원된 3일 간에 걸친 육군 가적사단과 벌인 실전을 방불케 한 그 야외 기동훈련에서 해병들이 발휘한 실력이 육군사단장을 감탄시켰던 나머지 육군사단장으로부터 “형님, 한 수 배웠습니다”라는 찬사를 들었던 것인데, 육군사단장으로부터 그러한 찬사를 들은 해병사단장은 최갑진 장군 외엔 달리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사단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박구일 장군의 뒤를 이어 제18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최갑진 장군은 신청사를 지어서 사령부를 옮기는 일 보다 급선무라고 판단된 다음과 같은 일들, 즉 사령부의 법적인 보장을 받기 위해 사령관과 부사령관, 참모장 및 일반・특별참모의 임무를 대통령 령으로 정하는 직제령의 제정을 그때까지도 해병대사령관을 해군제2참모차장시하는 해군본부의 분위기 속에서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만사를 제쳐놓고 그 일을 추진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또한 12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사령부의 TO를 늘이기 위해서도 국방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필요성을 납득시킨 끝에 그 4배에 가까운 인원으로 증원시킬 수가 있었던 사령부에서는 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후 14년이란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타군에 비해 열악해질 대로 열악해진 하사관들(특히 중・상사)의 적체(積滯)된 진급에 숨통을 트기 위해 하사관의 계급구조 개선과 상향 증원을 위한 노력을 국방부를 통해 이루어지게 한 끝에  타군에 앞서가는 하사관 진급 선발 모델을 개발하여 엄정한 진급심사 규정을 적용해서 진급을 시킴으로써 오래도록 적체된 체증을 속 시원하게 가라앉히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모델이 엄정한 심사 규정에 의해 시행되자 예하 각 부대에서는 학과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체력검정에 합격하기 위해 달밤에 구보도 하고 턱걸이도 하는 그런 모습이 흔하게 목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과 함께 최갑진 사령관은 부대의 안전관리와 전투역량의 극대화를 도모하기 위해 사단장 시절에 시행했던 ‘제대별책임제’를 예하부대에서 시행하도록 행정상의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자신의 현역시절을 돌이켜 보며 올바른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최갑진 장군은 특히 자신의 사령관 임기 중 어려운 가운데 고락을 같이 한 김기홍, 전도봉, 성운용 장군과 이현무 대령을 비롯한 여러 참모장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90년 9월 1일 제18대 사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던 최갑진 장군은 재향군인회의 해병부회장 재임 시인 95년 해・공군 해병대 출신 예비역 장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으로 발탁되어 2년 간 장태완 회장을 도와 지역향군묘지(전북 임실, 경북 영천) 조성과 향군본부의 구조조정(30%) 단행, 그리고 투명한 예산 운용의 기틀을 마련하여 재향군인회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기여했으며, 임기가 만료된 후엔 다시 해병부회장으로 복귀하게 됨으로써 장태완 회장 임기(6년) 중 5년 간을 재향군인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재향군인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