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해병사의 창설을 구상한 제19대사령관 조기엽 장군
19대 사령관 중장 조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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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90.9.3 ∼ 1992.6.30
- 생년월일 1936년 10월 10일
- 출 생 지 황해 연백
- 학 력
- 1961 해군사관학교 졸업(15기)
- 1977 해군대학 수료
- 1985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 1985 연세대학교 고위정책자과정 수료
- 1992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1977 해군대학 수료
- 경 력
- 1961 해병소위 임관
- 1963 1사단 2연대 3대대 소대장
- 1970 청룡부대 5대대 6중대장
- 1975 1사단 비서실장
- 1979 2사단 15대대장
- 1980 해군 2사관학교 생도대장
- 1982 2사단 1연대장
- 1985 한,미 연합사령부 작전소요처장
- 1987 해병대 6여단장
- 1988 해병대 1사단장
- 1990 제19대 해병대 사령관
- 1992 해병중장 예편
- 1963 1사단 2연대 3대대 소대장
- 상 훈
- 1971 국방부장관 표창
- 1982 보국훈장 삼일장
- 1986 보국훈장 천수장
- 1990 대통령 표창
- 1990 미합중국 공로훈장
- 1991 스페인 대십자훈장
- 1982 보국훈장 삼일장
1990년 9월 1일 제19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조기엽(趙基燁) 중장은 취임 후 사령부를 발안(화성시) 이동계획에 제동이 걸려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문득 한반도의 방어 전략과 혈맹의 전우인 한미해병대의 전략적인 제휴와 상승(相乘)적인 발전을 위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구상된 적이 없었던 연합해병사령부(CMFC)의 창설을 구상하여 신분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추진한 끝에 마침내 결실을 보게 하였고, 또한 1사단장 재임기간 중에는 상부의 지원 없이 기지 내에 4만 5천 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종합전투훈련장을 건설하는 한편 송파면(포항시) 방석리의 해변가 야산 중턱에 팀스피릿 훈련 중 순직한 한․미 해병 52위(KMC 11, USMC 41)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을 건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1936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조 장군은 1946년 11월 9세의 나이로 부모 친족들과 함께 남으로 탈출하여 3학년에 전입학한 남대문초등학교와 경서중학 및 경기공업학교를 거쳐 1957년 3월 해군사관학교(15기)에 입교했다.
그리하여 1961년 졸업과 동시에 해병소위로 임관하여 해병학교의 특수기초반과정을 거쳐 소대장 근무를 마쳤던 그는 1965년 9월 파월 청룡부대 제1진(3대대)으로 편성되어 월남으로 출동, 캄란 및 투이호아지구에서 약 1년 간 대대본부 작전 및 인사장교로 복무한 뒤 일단 귀국했다가 1971년 1월 재차 파월되어 호이안지구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한편 청룡부대가 월남에서 철수한 뒤 1979년에 이르러 대대장 근무를 마쳤던 조 장군은 1988년 제1사단장으로 임명될 때가지 제2사관학교 생도대장, 연대장 특검검열관,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6여단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사단장 시절에 남긴 업적
88년 제1사단장으로 임명된 조기엽 장군은 그 동안 실시해 왔던 연대급 해안경계병력을 대대급 규모로 축소 운용하는 가운데 정규전 위주의 제대(梯隊)별 부대단위 교육훈련에 총력을 경주하는 한편 과거와는 달리 민간공항(空港)으로 전환된 포항비행장의 활주로 사용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기지 주변 야외에서의 교육훈련도 제약을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바람에 그러한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조 장군은 과거 각 단위부대별로 조성해 놓은 4만 5천 평에 달하는 단지 내의 영농지를 종합적인 전투훈련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거창한 공사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사단과 교육단에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동양 최대의 훈련장을 조성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일명 ‘대연병장’이라고도 일컫고 있는 이 거창한 훈련장의 지반(地盤)조성 공사는 부대 인근지역의 하천과 야산에 산재하고 있는 자갈과 돌을 대량으로 채취해 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은 그러한 문제로 민원이 제기되는 바람에 사단장으로서는 그러한 민원을 수습하기 위해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조 장군은 특히 그 거창한 공사를 추진할 때 선뜻 1억 원의 거금을 희사해 준 당시의 POSCO 회장 박태준 장군의 은공과 민원문제가 제기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남다른 조언과 격려의 뜻을 베풀어 준 당시의 청와대 비서실장 홍성철씨(고인. 황해도 출신)에 대한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종합전투훈련장 지반 조성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당시 사단 공병대대장으로서 그 공사를 총괄적으로 지휘 감독한 당시의 사단 공병대대장(사령부 공병참모 역임) 박주희씨(예.대령) 편에 언급이 된다.
CMFC의 구상과 추진
90년 9월 1일 부로 제19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조기엽 장군은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87. 11. 1)과 함께 추진되고 있던 사령부의 발안기지(경기 화성) 이전계획이 상부의 갑작스런 방침변경으로 취소되어 해군본부가 위치하는 계룡대로 이전하게 됨으로써 예하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그러한 시점(時点)에 문득 한반도의 방어전략을 위해 능동적인 기여를 할 동북아 최대의 해상세력으로 등장한 한․미해병대를 하나로 묶는 연합해병사령부(CMFC)의 창설을 구상하여 한미연합사령관 스카시 대장이 백령도를 시찰할 때 영어회화에 능한 이갑진 참모장을 수행케 하여 연합사 기획참모부장 모난 소장(USMC)이 합석한 자리에서 넌즈시 제안하여 중요 관심사가 되게 한 연후에 조기엽 장군 자신이 지휘계통을 무시한 채 직접 한․미연합사로 스카시 대장을 방문하여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끝에 92년 12월 1일(임종린사령관 재임시) 마침내 양국 군부의 동의와 통수기수의 승인과정을 거쳐 역사적인 CMFC의 창설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CMFC의 창설을 구상하여 추진한 조 장군의 공로는 CMFC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한미연합사령관을 방문하여 그처럼 중대한 일을 논의했던 조기엽 사령관은 자신이 각오하고 있었듯이 결국 국방부의 징계문턱에 서게 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운이 좋게도 당시의 국방부 이종구 장관과 포스코 박태준 회장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하며, 또한 그러한 운을 타고 났던 조 장군은 자신에게 그처럼 큰 고민을 안겨 준 사령부의 계룡대 이전계획이 취소됨으로써 발안 이전을 재추진한 끝에 비록 입주(入住)는 후임사령관 재임 시에 하게 되었지만 단지의 조성과 청사의 건립 등 핵심적인 공사를 자신의 임기 중에 완료하는 업적도 남겼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당시의 사령부 공병참모 박국희 대령 편에 언급이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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