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사령부의 재창설을 맞이했던 제17대사령관 박구일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28

사령부의 재창설을 맞이했던 제17대사령관 박구일 장군 

 

17대 사령관 중장 박구일

  • 역임기간  1986.9.3 ∼ 1988.9.3
  • 생년월일  1934년 11월 8일
  • 출 생 지  경북 안동
학 력
1958  해군사관학교 졸업(12기)
1978  국방대학원 수료
1987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 력
1958  해병소위 임관
1965  1사단 11대대 1중대장
1975  교육대대장
1976  헌병대장
1979  1사단 7연대장
1984  해병대 제6여단장
1984  해병대 제1사단장
1986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
1987  제17대 해병대 사령관
1988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65  국방부장관 표창(′74)
1966  인헌 무공훈장
1980  보국훈장 삼일장
1984  보국훈장 천수장
1987  보국훈장 국선장
1988  대통령 표창

 

제8대(代 )해군제2참모차장 임기 중 모군 사령부의 재창설이 이루어져 제2참모차장의 직위에서 재창설된 사령부의 초대사령관이 됨과 동시에 9대에서 맥이 끊어지고 말았던 역대 사령관의 맥을 통산(通算) 17대(代)로 이어 나가게 된 박구일(朴九溢) 중장. 그런 이유에서 역대 해군제2참모차장 중에서 유일하게 홍복 같은 행운을 누린 제2참모차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박 장군은 예편 후 해병전우회중앙회 부총재 겸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전우회의 발전을 위해 정성껏 이바지 했고, 타고난 관운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여 2선 의원(14,15대)의 기록을 세우는 가운데 정치인으로서의 명성도 떨쳤다.

 

경북 안동 출신(1934년생)으로 54년 3월 해군사관학교 12기로 입교하여 졸업할 때 30명의 동료 생도들과 해병대로 전과하여 소위로 임관, 해병학교의 기초반 과정을 거쳐 소총소대의 소대장, 중대장 근무를 마쳤던 박 장군은 59년에는 미 해군전자학교(1년 과정)를 수료하고 그 후 미 해병학교의 기초반과정도 이수했다.

 

박구일 장군이 월남전선으로 출동했던 것은 68년 4월이었으며, 월맹군의 구정공세 후 청룡부대가 호이안지구에서 고전을 겪고 있을 때 5대대 작전장교로 임명되었던 그는 각 중대의 작전을 승전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직책을 훌륭하게 완수함으로서 인헌무공훈장과 자유월남공화국의 금성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월남전선에서 돌아온 뒤 해병지휘참모대학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던 박 장군은 그 후 사령부의 종합기획담당관으로 근무한 데 이어 대대장, 사단 군수참모, 해군본부 인사근무처장 등을 거쳐 1사단 7연대장으로 임명(78년)되었는데, 특히 그 7연대장 재임기간 중 그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극심했던 부산지역 시위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부산지구 계엄군 해병부대장으로 임명되어 슬기롭게도 그 사태를 조기 수습하는 데 큰 기여를 했었다.

 

78년 국방대학원 안보과정을 수료하고 8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최고경영자과정을 이수했던 박 장군이 해병제1사단장으로 임명된 것은 84년이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8대 제2참모차장으로 임명(86.9.1)되었던 그는 그 제2참모차장 임기 중 모군 사령부의 재창설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됨으로써(그 전단계에 속하는 부분은 7대 제2참모차장 편에 언급되어 있음) 취임 2개월 후 다음과 같은 가슴이 설레고 속이 타는 일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각군의 작전 책임부서장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재창설될 사령부의 명칭을 정하기 위해 소집된 합참전략회의에 참석했던 박구일 중장은 합참에서 낸 1개 안과 해군본부에서 낸 1개 안 및 해병참모부에서 낸 1개 안 등 3개의 안(1. 해군상륙군사령부 2. 해군해병사령부 3. 해군해병상륙군사령부) 가운데 1개 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주최측(합참)으로부터 박구일 중장의 의견을 물었을 때 “3가지 명칭이 다 좋지만 ‘해병이라고 하면 개개인을 뜻하지 조직체가 아니므로 해병대로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켜 결국 합참에서는 ‘해군해병대사령부’로 단일화하여 국방장관의 결재에 회부하게 되었고, 결재에 회부된 그 명칭(해군해병대사령부)을 대하게 된 정호용(鄭鎬容) 장관은 ‘해군’이라는 머리글자를 지워 버리고 옛 명칭 그대로 ‘해병대사령부’로 고쳐 대통령의 결재를 득했던 것이니 박 장군으로서는 가슴이 설레이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그 일을 평생을 두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당시의 국방장관 정호용 장군(예.대장, 육사11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증언을 청취할 수 있었다. 즉 장관으로서 그 사안을 처리할 때 자신은 해병대 편이었다고 말한 정 장군은 해병대의 전통과 사기를 고려한 효율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되어 옛 명칭을 그대로 되살려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 했고, 또한 거명(擧名)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장관실을 방문한 전직 국회의원 등 몇 분의 해병대 출신 인사들이 있었다는 말도 했었다.

 

한편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던 날 마지막 브리핑을 했던 박구일 장군은 “좋았어!”하며 흔쾌히 결재서류에 사인을 한 전(全)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3가지 특별지시를 받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격을 했다고 한다.

 

첫째-공부를 많이 하여 상륙작전의 전략을 개발하라.

 

둘째-김포에 주둔하는 2사단을 2년마다 교체하여 상륙훈련을 시켜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육군과 같은 지상군 부대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해병대 대원들이 싸움박질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하라. 적과 싸울 때 용감하게 싸워야 되지 않겠는가.

 

이상이 그 3가지 지시사항이었는데, 이 지시사항을 전 장병에게 교육을 통해 철저히 주지시키라고 했다고 하니 잔인하게 머리와 팔다리를 모두 잘라 없애 버리고 몸통만 해군에 통합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처사에 비한다면 참으로 감읍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구일 장군은 그로부터 1주일 후 국방부에서 개최된 전군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방부의 브리핑이 끝난 후의 건의사항 시간에 정호용 장관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얼마나 그 일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던지 “요새 170만의 현역과 예비역 해병가족들은 매일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올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을 위시한 전군의 지휘관이 참석해 있는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7년 11월 1일 부로 8대 해군제2참모차장의 직위에서 (통산)제17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하게 된 박구일 장군은 잠정적인 사령부 청사건물(신길동)에 지휘통신망을 가설하여 예하부대를 지휘하는 가운데 88년 9월 1일 잔여 임기가 끝날 때까지 사령부의 신청사 건립을 위한 부지의 물색과 매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면 관계로 그 부분은 제18대사령관(최갑진 장군)과 제19대사령관(조기엽 장군) 편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모두에서 언급했듯이 예편 후 해병대 전우회중앙회 부총재겸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박구일 장군은 14대(전국구)와 15대(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하여 14대 국회에서는 국방 외무위원회 소속의원으로써, 15대 국회에선 내무위원회 간사, 또는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많은 활약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