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제20대 사령관 임종린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34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제20대 사령관 임종린 장군  

 

20대 사령관 중장 임종린

  • 역임기간  1992.6.30 ∼ 1994.6.30
  • 생년월일  1937년 8월 2일
  • 출 생 지  경남 남해
학 력
1962  해군사관학교 졸업(16기)
1975  육군대학 수료
1990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경 력
1962  해병소위 임관
1965  3연대 2대대 81미리 소대장
1967  3연대 3대대 6중대장
1983  2사단 1연대장
1985  해병대 제2사단 부사단장
1988  해병대 제6여단장
1990  해병대 부사령관
1990  해병대 제2사단장
1992  제20대 해병대 사령관
1994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68  국방부장관 표창
1970  화랑 무공훈장
1971  충무 무공훈장
1972  대통령 표창
1984  보국훈장 삼일장
1987  보국훈장 천수장

월남전에서 다량의 로켓포 노획

 

경남 남해 출신(1937년생)으로 58년 4월 해사 16기로 입교하여 62년 월 해병소위로 임관, 해병학교의 기초반 과정을 거쳐 해병제1상륙사단에 배치되어 3연대 2대대 6중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쳤던 임종린 장군은 그 후 동 대대의 S-3 및 S-4에서 근무하다가 66년 중위의 계급으로 월남전선으로 출정 여단본부 작전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투이호아와 추라이 지구에서 수행한 청룡부대의 작전업무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청룡부대가 호이안으로 이동한 69년 또 한 차례 중대장 요원으로 파월이 되었던 임종린 장군은 2대대 6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중대를 지휘하던 중 특히 케손 산악지대에 대한 수색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월맹군이 은닉해 놓은 30문의 중공제 122밀리 로켓포를 노획하는 전과로 충무무공훈장을 타는 영예를 누렸는데 미 해병대의 다낭 공군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은닉해 놓은 그 다량의 로켓포가 노획되자 월남군 1군단장 람 장군과 미 해병대의 제3 상륙군 사령관이 즉시 그 로켓포가 운반된 곳으로 비래하여 그 전리품을 확인하고 돌아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길운과는 달리 임종린 장군은 그 케손 산악지대에서 동굴 속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제보한 첩자의 제보를 믿고 그 현장을 수색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그 길목(지뢰밭)에 설치해 놓은 105밀리 포탄 껍질을 이용한 부비트렉의 폭발로 여러 명의 대원이 중상을 입고 중대장 자신도 팔과 다리에 입고 중상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후송될 뻔했으나 여단장 이동용 장군이 여단본부 의무중대에서 치료를 받게 하고 또한 퇴원 후 6중대로 복귀한 임종린 대위를 여단본부 인사참모실 보좌관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6중대장으로 임명된 날로부터 주월 청룡부대의 마지막 철수대대가 월남에서 철수하는 그 시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3개월간을 월남전선에서 근무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하는데 여단장 이동용 장군이 6중대장을 남달리 신임하게 된 그 이면에는 6중가 약 6개월 간 주둔하고 있던 자규촌 성당에서 세계 성직자성체대회를 열게 되었을 때 독실한 가톨릭 신도인 6중대장 임종린 대위가 그 행사를 최선을 다해 지원하라고 한 여단장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 아니라(베트콩의 위협 때문에 티우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이었던 그 대회는 중지되고 말았다지만) 티우 대통령이 소령 때 군종 신부로서 영세를 준 그 성당의 주임신부와 신도들이 주일날 미사를 봉헌할 때 그들의 안전을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써 주는 등 청룡부대의 민사심리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가 있었던 것이며, 결과적으로 임종린 대위가 끝까지 인사참모실에 남아 있게 된 것은 그를 신임하고 있던 제4대 청룡부대장 이동용 장군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령관 시절의 3가지 경사

 

72년 2월 29일 주월 청룡부대의 마지막 철수 대대와 함께 귀국했던 임종린 장군은 81년에 대대장, 83년에 연대장, 88년에 6여단장, 90년에 부사령관 92년 6월 30일 마침내 대대장 근무를 시작한 11년 만에 제20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는 순탄한 승진 과정을 거쳤을 뿐 아니라 특히 그 2년간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 임종린 장군은 92년 12월 1일에 창설된 한미연합해병사령부의 창설식을 신길동에 소재하고 있던 구 해병대 사령부에서 거행하는 첫 번째 경사를 맞이했는데 이 날 정문 오른쪽에는 해병대 사령부의 입간판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 한미연합해병사령부의 입간판이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게 했다.

 

두 번째 경사는 93년에 미해병대에서 주관한 제1회 환태평양 해병대 사령관(미국․한국․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 회의에 참가했던 일이며(94년 두 번째 회의에도 참가) 세 번째 경사는 94년 4월 6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건립된 해병대 사령부의 신청사에 입주한 일이었으니 남들이 상서로운 길운을 타고난 사령관이라고 일컬을 만도 했을 것이다.

 

한편 재임기간 중 임종린 사령관은 보국훈장 3․1장과 천수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며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여섯 권의 시집과 다섯 권의 저서

 

문무를 겸비한 장성으로서 일찍이 해군사관학교 2학년 때 ‘가을에 생각나는 일’이란 제목의 수필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수필가로서 문단에 등단했던 임종린 장군은 군 복무를 마친 후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과 창작활동에 몰입한 끝에 예편한 연도인 94년에는 단편소설 ‘새옹지마’로 한맥문학의 추천을 받아 소설가로 등단하는 기쁨을 누렸고, 첫 시집을 내기 전인 98년에는 농림문학이 추천한 ‘새벽하늘에 조명탄을 올려라’라는 시로 시단에 등단함으로써 수필과 소설과 시 3개 부문에서 문명을 떨치는 문인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2000년부터 2007년 사이에는 첫 시집 ‘머물고 간 흔적’을 비롯해서 ‘원시의 현장’‘슬픈여정’‘분노의 횃불’‘세월이 삼켜버린 슬픈고독’‘허공의 메아리’ 등 주옥같은 시들이 수록된 6권의 시집을 펴내는 열정을 과시했는데 과문의 소치인진 몰라도 하는 특히 예비역 장성으로서 6권의 시집을 펴낸 문인은 달리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늘 사색을 벗하며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임종린 장군은 그간 6권의 시집 외에 ‘바람직한 장교상’‘전장의 촉감’‘한국인의 가치관과 우리의 자세’‘우리가 지녀야할 보편적인 가치관’ 등 네 권의 저서와 ‘발간명찰 속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수상록 한 권을 남겼으며, 현재 문인협회 윤리위원장 외에 성우회부회장, 명지대 교수 등의 직함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주월 청룡부대에서 근무한 33개월(1․2차 파월)이 군 연금법상 3배수로 기간이 됨으로써 임종린 장군은 중장급 연급 수혜자로서는 최고액수(78프로)인 380만원을 타고 있다고 하니 연금복도 타고 난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