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연대장 때 미 육군훈장 탄 제21대사령관 이상무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8. 2. 17:49

연대장 때 미 육군훈장 탄 제21대사령관 이상무 장군 

21대 사령관 중장 이상무
  • 역임기간  1994.6.30 ∼ 1996.6.29
  • 생년월일  1942년 8월 7일
  • 출 생 지  경남 울산
학 력
1965  해군사관학교 졸업(19기)
1976  해군대학교 수료
1984  국방대학원수료
경 력
1965  해병소위 임관
1966  12대대 6중대 1소대장
1968  2여단 5대대 26중대 부중대장
1980  1사단 33대대장
1982  2사단 김포지구 헌병대장
1985  1사단 3연대장
1985  1사단 3연대장
1991  해병대 제6여단장
1992  해병대 제2사단장
1994  제21대 해병대 사령관
1996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81  국방부장관 표창
1985  보국훈장 삼일장
1987  미 육군 공로훈장
1991  보국훈장 천수장
1992  대통령 표창(′94)
1996  보국훈장 국선장

경남 울산출신(1942년생)으로 61년 동래고등학교를 거쳐 해사 19기로 입교, 65년 2월 해병소위로 임관하여 해병학교 기초반 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해병제1사단으로 발령받아 3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소대장 근무를 마쳤던 이 장군은 67년 7월 추라이지구에서 작전 중인 주월 청룡부대로 발령받아 5대대 26중대 부중대장 겸 지상감시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특히 바탄강지구 작전 때 5대대 CP를 방어하는 특별소대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장군은 베트콩이 숨은 동굴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무용담을 남기기도 했고, 또 하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런 소대장이란 말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굴 수색전에 얽힌 얘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한 소대원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동굴에서 나온 2명의 베트콩이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고 동굴 속으로 달아났다는 보고에 접하게 된 소대장은 즉시 그 동굴을 수색하기 위해 소대원들을 동굴 바깥에 경계배치 시켜 놓고 방독면을 쓰고 후레쉬를 비추며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전령이 따랐는데, 계단식으로 파여져 있는 그 ㄱ자형 동굴 속 약 5~6미터 전방에서 왼쪽으로 가지 친 또 다른 동굴 밖으로 빠져 나간 그 2명의 베트콩이 동굴 밖에서 경계를 펴고 있는 대원들에게 방망이 수류탄을 집어 던져 그 파편에 통신병이 목을 다쳐 쓰러지는 상황이 돌발하자 소대장은 급히 동굴 밖으로 나가 2명의 베트콩 중대원들에 의해 사살을 당한 베트콩은 그대로 두고 부상을 당해 있는 베트콩이 눈에 띄자 화가 치밀었던 나머지 권총으로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 친 동굴을 수색하기 위해 재차 동굴로 들어갔던 소대장은 바로 머리 앞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방망이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 반사적인 행동으로 비좁은 공간속에서 획 몸을 회전시켜 뒤따르고 있는 전령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하늘이 도왔던지 소대장은 왼쪽 다리(장단지), 전령은 오른쪽 손에 가벼운 파편상을 입었을 따름이라고 했다.

 

임무형 교육훈련제도

 

65년 LFTW에서 탑재교육을 받을 때(대위) 우등을 하여 사령관 표창을 받았고 해군대학에서는 우등상을 수상했던 이상무 장군은 대대장 근무를 마친 후에 보직 받은 해군본부 해병참모부 작전훈련처 교리담당관으로 근무하는 기간 중(81년) 명칭 자체가 낯이 선 임무형 교육훈련이란 제도의 개발과 정책을 위해 진지하고 열정적인 노력을 경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이 임무형 교육훈련이란 임무를 부여받은 대소 단위부대의 지휘관 또는 참모부서의 요원들이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일사불란한 협조체제를 갖추어 그 임무를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완벽하고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고, 또 이 제도를 연구하여 개발한 교리담당관 이상무 중령은 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차트 등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각 단위 부대를 순회하며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고개작전 때 미육군 공로훈장

 

1사단 3연대장 임기 중인 87년 4월 이상무 대령은 다음과 같은 뛰어난 훈련 실적으로 5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미 2사단장으로부터 미 육군의 공로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당고개작전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청군(공격)인 미2사단에 배속된 3연대는 여주-남한강선에서 방어선을 펴고 있다가 황군(대항군. 하와이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한 미 25사단의 예하 연대)의 반격으로 원주-횡성선으로 철수하여 지연전 태세를 취하다가 반격 당일 저녁 무렵에 명령에 따라 헬기를 타고 저공비행으로 여주지구의 당고개의 야산지대로 진입했는데, 여주-남한강선에 배치된 그 시기부터 위장 등 기도비익을 철저히 함으로써 2사단장으로 하여금 예하 연대장에게 견학지시를 내리게까지 했던 3연대는 작전지역에 진입하여 산개하는 즉시 위장한 개인천막을 쳐서 그 속에서 연기가 나지 않도록 고체연료를 사용하여 취사를 했고, 또 건부식을 준비해 감으로써 3연대의 행방 추적에 나선 황군의 수색대가 헬기와 헌비(지프보다 바퀴가 큰 통신장비 차량)를 동원해서 공중파 지상 양면으로 수색을 했으나 추적을 하지 못해 23시경 철수를 하자 그러한 정황을 감지하고 있던 3연대는 그 이튿날 03시를 기해 기습전을 감행, 철수를 기도하는 황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심판단의 판정으로 3연대는 완승을 거두게 되었고, 배속된 3연대가 그와 같은 실적을 거두자 미 2사단장(JACK B. FARRIS 소장)은 3연대의 연대장을 비롯, 부연대장 정운용 대령, 1대대장 김상순 중령, 2대대장 김선진 중령, 3대대장 장준영 중령, 11연대 3대대장 강유남 중령 등 6명의 지휘관에게 훈장을 내신토록 지시하여 미 육군공로훈장을 수여했다고 하는데 한미연합사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연대급 지휘관들에게 이와 같은 훈장이 수여된 것은 전무후무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팀스피리트 훈련기간 중 헬기편으로 훈련단 본부를 방문했던 당시의 해병제1사단장 최갑진 소장은 소문이 자자했던 3연대의 뛰어난 훈련실적 덕분으로 육군사단장들로부터 “형님, 한 수 배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해병대 출신 사단장 들 중 육군사단장으로부터 그런 인사말을 들은 사단장은 최갑진 장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국충성해병대

 

89년 1월 준장의 계급으로 승진했던 이상무 장군은 1사단 부사단장, 6여단장, 2사단장(소장 승진) 등의 요직을 거쳐 94년 6월 29일 부로 마침내 21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취임과 동시 ‘호국충성해병대’란 복무방침을 내걸었던 이상무 사령관은 특히 공정한 부대 관리를 통한 전투역량의 강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군 복무기간 중 이상무 장군은 해병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함참의장, 국방장관의 표창과 보국훈장 삼일장과 천수장, 대통령 표창,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 등 많은 훈 표창을 받는 영예를 누렸고, 96년에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