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한전 KDN 사장으로 취임한 제22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8. 2. 17:50

한전 KDN 사장으로 취임한 제22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  


22대 사령관 중장 전도봉
  • 역임기간  1996.6.29 ∼ 1998.4.8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0일
  • 출 생 지  경남 거제

학 력
1966  연세대학교 졸업
1976  미 해병대 상륙전학교 수료
1979  해군대학 수료
1982  미 해군 상륙전학교 수료
1987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경 력
1966  해병소위 임관
1968  제1청룡부대 소대장
1974  해병대 연평부대 21중대장
1981  해병대 제2사단 51대대장
1987  해병대 제1사단 3연대장
1990  해병대 교육훈련단장
1994  해병대 제1사단장
1996  해병대 사령부 부사령관
1996  제22대 해병대 사령관
1998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68  화랑 무공훈장
1980  보국포장
1987  보국훈장 삼일장
1995  보국훈장 천수장
1998  미 정부 공로훈장

기사회생의 운을 타고난 인물

 

1942년 거제도에서 태어나 경남고등학교와 연세대를 거쳐 66년 3월 해간 35기로 입대, 임관(5. 28. 월남전으로 인한 단기교육) 하며 해병학교에서 기초반 과정을 이수중에 있던 전도봉 소위는 주말이었던 8월 6일 6명의 동기생들과 부산에서 외박하고 귀대하던 중 구포다리 버스 정류장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10명의 공군 장교들을 때려누인 것이 화근이 되어 그들이 타고 가던 진해행 시외버스가 구포다리를 건너 질주하던 중 반대편 쪽에서 군용트럭(닷지차)을 몰고 나타나 각목을 든 공군장교들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버스의 운전기사가 용케도 차를 몰아 그 현장을 빠져 나왔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창가에 앉아 있던 소위 한 명이 머리에 부상을 입는 사고로 끝나지 않고 보다 큰 사고가 날 뻔 했다고 한다.

 

한편 그날 저녁 외박과 외출로부터 귀대한 35기 기초반 중대에서는 은밀히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그 피습사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 끝에 그 이튿날 새벽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했던 것인데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8월 8일 02시에 기상한 3개 제대로 편성된 129명의 소위들이 04시 경화역에서 진주방면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진영역에서 하차하여 버스 편으로 김해 공군기지 정문 부근에 도착 2열종대로 정렬하여 06시경 공군기지 정문으로 진입하는 대목까지를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언급한 다음 그 결과에 대한 언급을 하기로 한다.

 

정문에서 공격목표로 삼고 있던 비행학교의 조종사 중대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약 2키로, 그 거리를 무장해제를 시킨 정문 위병소의 근무자를 앞세워 구보로 달려갔던 35기 소위들은 바로 그 때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난 3개 퀀셀의 피교육자들이 세면도구를 들다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교관들의 내무실로 난입하여 기상 중에 있는 교관들을 실내에 있는 운동기구와 야전침대의 각목 등을 뽑아 닥치는 대로 구타한 다음 비상을 걸고 있는 학교 본부의 방송 소리가 들리자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건물 앞에 정렬하여 당직사령에게 사태의 수습방안을 제시한 다음 해병대의 군가를 제창하며 대기하고 비상소식 방송을 듣고 연병장에 모이기 시작한 약 2천 명의 공군 병사들이 일제히 투석을 하며 접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비행장 격납고가 있는 곳으로 피신했다가 격납고까지 돌맹이가 날아오는 바람에 활주로 끝에 있는 철조망 담장을 추격을 받아가며 타넘느라 적지 않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또한 그 담장 밖의 늪을 헤엄쳐 건너다가 한 사람이 익사하는 등 그 피해도 적지가 않았다.

 

한편 사건 발생 후 기초반 중대장과 구대장, 학생회 간부 등 9명의 장교들과 함께 헌병대 영창에 구속 수감이 되어 재판(고등군법회의)을 받고 있던 핵심 주동인물 중의 핵심인물인 전도봉 소위는 결국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군복을 벗고(파면처분) 낙향했으나 결국 낙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입영통지서가 날아와 충격적인 비애를 느끼게 하였으나 그 통지서를 들고 군복을 벗기 전 병역을 필한자로 보장을 받게 해 주겠다고 했던 해병대사령부 법무감을 찾아가 대책을 의뢰하자 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에 제소토록 한 것이 주효하여 67년 7월 25일 부로 마치 지옥에서 지상으로 기사회생 하듯 복권이 되어 월남전선으로 출동하게 되었으니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해간 35기 소위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은 해병대의 명인기인전 제2권 사건스토리란에 자세한 내용으로 그 전말이 기술되어 있으며 당시의 해병대 사령관은 강기천 장군이었고, 국방부 장관은 김성은 장관이었다).

 

소대장에서 별을 달 때까지

 

그런데 67년 11월부터 약 1년간 주월 청룡부대 제2대대 5중대의 제1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전도봉 장군은 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어 몸통만 해군에 통폐합되는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며 비록 동기생들 중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애써 떨치고 복권된 소위의 계급에서 대대장 직무를 수행한 중령의 계급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으나 더 이상의 가망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83년 군복을 벗기 위한 수순으로 국방부 방산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던 전도봉 장군은 그로부터 2년 후 뜻밖에도 당시의 해군 제2참모차장(17대 사령관) 박희재 중장의 선처로 서울지구 해군 헌병대장으로 기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직에서 대령으로 승진하게 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최갑진 장군(18대 사령관)의 제2참모차장 재임기간 중인 90년 1월에는 준장의 계급으로 승진하는 그와 같은 인사 조치를 취하게 된 그 이면에는 박 장군이 김포 5여단으로 있을 때 전도봉 중령이 지휘했던 대대가 여단본부에서 실시한 전투준비태세, 월동준비, 공용화기, 소화기 사격대회 등… 모든 검열에서 타 대대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 지휘관의 능력을 박 장군이 인정하고 있었고, 또한 그 당시 5여단 포병단장으로 있었던 최갑진 장군 역시 그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참모차장 때 그에게 사심 없이 별을 달아 주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 전도봉 장군은 특히 이 두 분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사단장 시절의 업적

 

한편 준장으로 승진하게 된 전도봉 장군은 사령부 참모장, 교육훈련단장을 역임한 후 92년 합참 인사심리전참모부 차장으로 전보되었는데 뜻밖에도 김영삼 대통령(14대) 취임 직전 93년 1월 1일 부로 소장의 계급으로 승진하여 그 이듬해(94) 6월 제1사단장으로 취임하게 되자 군 내부 일각에서는 앞으로는 김영삼 대통령과 동향(거제도)이고 경남고등학교 후배인 전도봉 장군의 야심에 찬 시대가 개척될 것이라고 예찬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와 같은 예측대로 사단장으로 취임한 전도봉 장군은 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그 몸통만 해군에 통폐합된 그 시기 이후 14년 간(87. 11. 1 사령부가 현재의 작은 규모로나마 부활될 때까지) 급격히 그간 지속적으로 저하된 지원율과 관련된 공신력의 회복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한 끝에 사단 내에 회사원 또는 학생들과 연예인 등에게 해병대 특유의 훈련을 체험케 하는 캠프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이 캠프는 금년 2월 취임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고대 동문인 한승수씨를 총리로 영입하자 연세대 총장이 고대 동문들의 결집력이 부러워서 그런 말을 했겠지만 모 언론 매체를 통해 “연세대 학생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야 되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유명해 졌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동안 2박 3일 간의 일정으로 운영한 이 캠프의 운영 실적이 86회에 걸쳐 총 2만 8천명이 입소했다고 하니 대단한 실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취소된 공수훈련을 받을 수 있게 했다고 하니 이 또한 특별한 업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공수훈련은 73년 이동용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실시해 오다가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었다.

 

사령관으로서 남긴 업적

 

전도봉 장군이 2년간의 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제22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날짜는 96년 6월 29일이었으며 취임과 동시 전도봉 사령관은 94년 6월 이전한 사령부의 신청사 정문 오른쪽에 걸려있는 ‘9616부대’라는 입간판을 ‘해병대사령부’로 표기한 입간판과 교체하는 한편 경찰청에 요청하여 안내 표지판까지 세우게 함으로써 해병대사령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73년 해병대 사령부가 창설된 후부터 그 시기에 이르기까지 해군사관학교에서 실시 해 왔던 사관후보생 교육을 포항 제1사단기지 내에 소재하는 교육훈련단에서 실시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던 전도봉 사령관은 또한 각 군의 중장급 장성 중 해병대 사령관의 서열을 맨 앞자리에 올려놓게끔 제도화함으로써 해병대 사령관의 위상을 높이고 현역 장병들과 예비역 장병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와 같은 업적은 대운을 타고난 전도봉 장군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남길 수 없는 업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밖에도 96년 이후 현충원에 안장된 모군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묘비에 해병대 출신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그 이전까지는 묘비의 맨 위 두 글자가 해군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해병대로 변경시키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 또한 한 가지 업적이 될 것이다. 금년 11월 초 한전 KDN 사장으로 취임.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