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9. 首都奪還 作戰 (1) 市街地 作戰

머린코341(mc341) 2014. 8. 2. 14:33

국방의 멍에 - 9. 首都奪還 作戰

 

(1) 市街地 作戰

 

  아군의 서울 시가지 돌입작전은 그날 어둠이 깔린 직후부터 전개되었다. 느닷없이 일어난 요란한 총성과 포성과 함께 작전지역의 밤하늘에는 박격포와 야포에서 발사한 조명탄들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 명멸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지구의 방어사령관으로 임명이 돼 있던 북괴군의 지휘관은 북괴군의 국방상 최용건(崔鏞建)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휘하에는 영등포지구에 투입이 돼 있던 18사단이 주축이 되어 약 18,000명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영등포와 서울 서측방의 외곽방어선이 무너지자 서울 시가지의 요소 요소에 설치해 둔 바리케이드에 의지하여 결사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가운데 은밀히 주력부대를 북방으로 빠져 나가게 하고 있었다. 당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던 곳은 서대문 로터리를 비롯해서 서울역전광장과 남대문, 중앙우체국 앞, 시청 앞, 중앙청 앞, 광화문, 삼각지, 한강강변 등 아군의 돌입이 예상되고 있던 교통요지들이었다.

 

  모래가마니와 사낭을 이중 삼중으로 방아 올려서 만든 그 원형으로 된 바리케이드에는 소총의 총안(銃限)과 기관총의 총좌 외에 대공포(對空砲)의 포대와 대(對)전차포도 배치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 바리케이드 근처의 건물에는 바리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해 둔 소수의 병력이 배치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바리케이드와 주변 건물에 배치되어 있는 적을 일일히 제거하고 소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은 후 미 해병대의 전차와 콜세아 함재기가 동원되자 차츰 전세는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진동리전투 때 처음으로 목격했던 콜세아 전폭기는 양쪽 날개 밑에 적재한 두 개의 폭탄과 로켓포탄 및 기관포의 실탄을 다 소비할 때까지 두 번 세 번 저공으로 급강하하여 끝까지 그 바리케이드를 박살내고야 말았고, 자욱한 흙먼지와 초연 등으로 공격 결과를 판명하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시계(視界)를 차장하는 그 장애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공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재공격을 감행하는 악착같은 감투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실로 미 해병대의 용맹성과 책임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지 전투가 절정을 이루고 있던 26일 아침 나는, 미 해병대 연락장교 헤그너 중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즉 전쟁포로에 대한 처우와 처리방법 등을 규정한 '제네바협정'을 상기시키면서 포로들을 학대하거나 함부로 죽여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두 차례 지휘소를 찾아왔던 손원일 참모총장으로부터로는 특히 해병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라는 엄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26일 아침부터 한창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1·2대대 본부와 중대본부 등을 정신없이 찾아다니며 그러한 지시를 했다.

 

  그 당시 2대대의 작전지역인 만리동 일대(서울역 뒷편)에는 화물을 보관하는 큰 창고가 많았는데 그 창고 속에는 달아나지 못한 북괴군의 부상자들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나 공산당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이른바 악질 부역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제보(提報)는 대개의 경우 숨어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개심에 찬 시민들에 의해 제공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