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9. 首都奪還 作戰 (3) 환도식

머린코341(mc341) 2014. 8. 2. 14:36

국방의 멍에 - 9. 首都奪還 作戰

 

(3) 환도식

 

  한편 부산에 위치하고 있던 우리 정부에서는 9월 28일을 서울 수복의 날로 정하는 한편 29일에는 전화(戰禍)의 흔적이 역력한 중앙청 건물에서 역사적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했다.

 

  그 환도식에는 동경(東京)으로부터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과 정계 인사 및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했던 약간 ○○명의 한·미 고위장성과 시민대표가 참석했다. 환도식이 거행되던 그날 부교(浮橋)가 가설되어 있는 한강변(여의도)으로부터 국회의사당(조선일보사 옆)에 이르는 연도 경비는 한국 해병 제1대대와 육군 17연대가 맡았다. 그 당시 폭파가 되어 있던 한강 인도교(人道橋)와 철교 등은 사용할 수가 없었고, 미군 공병단에서 고무 보우트를 가지고 가설해 놓았던 그 부교는 지금의 원효대교(元曉大橋)가 있는 곳에 가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고 있던 육군 17연대는 국방부 전사(戰史)에 기록되어 있듯이 9월 24일(D+9일) 아침 8시 상륙군 후속부대로서 인천에 행정상륙을 하여 25일 오후 2시경까지 한강 남안에 집결한 다음 신사리(新沙里)에서 그 대안의 서빙고(西氷庫)로 도강하여 그날 오전 미 육군 7사단 32연대가 공격 점령한 남산(南山) 동북방으로 진격하여 보광동(普光洞)과 174고지(매봉)를 확보한 후 경춘가도(京春街道)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 이튿날(26일) 연대 CP를 구의동(九宜洞)에 설치하고 면목동과 망우리 일대까지 진출했다가 환도식 하루 전날 명령에 따라 서울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28일) 정오경 중앙우체국 앞에서 백인엽 연대장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이 감격적인 악수를 나누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 거행된 환도식 때 한·미 해병대와 함께 일부 지역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육군참모학교 동기생인 내가 백인엽 연대장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시기와 장소는 27일 오후 뚝섬에 있는 경마장 입구 도로변이었다. 그때 반갑게 악수를 나누면서 어떻게 해서 육군 17연대가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백 대령은 앞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은 경위를 나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한편 그날 정오경을 기해 초연에 그을린 중앙청 메인홀에서 거행된 그 역사적인 환도식(수복식)은 의장대나 군악대도 없었고, 또 사회자도 없이 진행된 말하자면 지극히 간소한 형태로 진행이 된 의식이었다. 즉 그날오전 11시경 동경으로부터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원수가 조금 늦게 공항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승용차에 동승하여 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런 격식도 있이 진행이 된 그 환도식은, 맥아더 원수가 탁상에 설치된 마이크 앞에서 "우리는 신의 은총으로 인류의 희망의 상징인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고 있으며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나는 각하가 헌법상의 책임을 충분히 다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라는 내용의 짤막한 연설을 했고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 자신이나 한국 국민의 한없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한 다음 "은혜를 베풀어 준 모든 분들, 특히 맥아더 장군과 유엔군 장병들에게 온 국민의 이름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요지의 간략한 인사말을 함으로써 식이 끝났을 뿐아니라 식이 끝나자마자 맥아더 원수는 김포공항으로 가서 대기중인 전용기를 타고 동경으로 출발했다.

 

  환도식이 거행되던 그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즉 불과 1년 수개월 전 400명의 적은 인원과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장비를 가지고 고성(呱聲)을 터트렸던 우리 해병대가 그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때 영예롭게도 미 해병대와 함께 상륙선봉군으로서 참가를 했고, 또 수도 탈환작전을 함에 있어서도 앞장을 서서 그 감격적인 임무를 홀륭하게 완수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인지구(京仁地區)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수세(守勢)에서 공세로 전환하게 된 유엔군과 국군이 마침내 38선을 향하여 진격을 하게되자 나는 성급하게도 I~2개월 후면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문득 머리속에 떠오르는 씩씩하고 진취적인 기상에 넘쳐흐르는 '나가자 ·. 해병대가(海兵隊歌)'의 가사를 음미해 보았다. 그리고선 특히,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로 시작되어 1절에선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해병대" 2절에선 "국방의 최강부대 대한해병대" 3절에선 "전장을 선구하는 대한해병대"로 이어져 있는 그 후렴이 썩 잘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환도식이 거행되기 하루 전날 나는 잠시 틈을 내어 잠시 광희동(光熙洞·서울시 중구)에 있는 8·15직후 하얼빈에서 귀국한 삼촌택을 찾아가 보았었다.

 

  귀국 후 삼촌께선 한동안 청량리에 있는 처가택에서 기거하고 있다가 광희동에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내가 육군보병학교와 참모학교에 다닐 때 그 집에서 유숙을 했었는데, 6·25동란이 발발한 후로는 소식이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날 그 집을 찾아갔던 나는 그간 인근 마을로 피신해 있다가 갓 돌아온 삼촌과 삼촌댁 가족들을 만나볼 수가 있어 몹시 기뻤다. 내가 불시에 들어서자 나의 삼촌께선 얼마나 반갑게 여기셨던지 나를 붙잡고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독실한 크리스찬(장로)이었던 삼촌께선 자신과 가족들이 겪었던 고생담을 늘어 놓으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서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날 나는 양식이 다 떨어져 굶주림에 직면해 있는 삼촌댁에 차에 싣고 갔던 C레이숀 한 박스를 내려놓고 왔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