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3) - 서울탈환작전
인민군은 우리에게 인천을 쉽게 내준 대신 서울에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울을 빼앗기면 전쟁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것을 의식한 듯 끈질기게 버텼다. 인천에 상륙한 지 2주일 만인 1950년 9월 29일에야 환도식을 거행하게 된 사정이 거기에 있었다.
9월 20일 행주나루를 건널 때까지도 적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정찰대가 한밤중 수영으로 강을 건널 때 잠시 격렬한 저항이 있었을 뿐, 고무보트로 만든 주교를 건너 본대가 도하할 때는 조용했다. 미 해병대의 야포 공격으로 풍비박산이 된 것이었다. 9월 21일 수색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저항이 완강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해병 제1대대에는 연희동 104고지와 연희고지에 대한 공격임무가 주어졌다.
서울 탈환전의 최대 격전지는 연희고지였다. 이 고지를 점령해야만 서울 시내를 감제할 수 있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영등포 방면에서 마포를 경유해 서울로 들어오는 부대와 행주나루를 건너 수색을 경유해 서울로 들어오는 서북 루트의 후속부대 안전이 보장된다.
LVT 3C로 한강을 도하하는 한·미 해병대
104·연희고지 전투
적은 104고지(연희동·구성산회관 뒷산)에서 연희고지를 거쳐 안산에 이르는 능선과 그 남동쪽의 천연 방벽인 와우산∼노고산 능선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고 있었다. 적의 전초진지인 104고지 일대에 연대 병력이 배치됐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공격은 21일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됐다. 북가좌동에서 기동한 1대대는 처음부터 심한 저항에 부딪쳤다.
적은 개천(모래내) 둑과 부근 개활지를 방벽으로 삼았다. 그러나 포병대와 공군기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우리 해병대의 담력과 기백이 우위였다. 악착같이 비탈을 기어올라 꼭대기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면 적은 집중사격으로 응해 왔다. 맨투맨 작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육박전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싸웠다.
지칠 줄 모르는 해병용사들의 투지에 질린 적은 마침내 고지를 포기하고 능선을 타고 달아났다. 격전 끝에 고지에 올라섰을 때 뜻밖의 장면이 벌어졌다. 수많은 적병이 교통호 안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참호 기둥에 묶여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 적은 또 기습을 가해 왔다. 악전고투 끝에 고지를 지켜내고야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 첫 승전보를 접한 23일 손원일 참모총장과 신현준 사령관은 104고지로 달려가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연희고지 탈환작전에도 계속 분투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외신 기자 20여 명도 함께 와서 지휘관들과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연희고지는 104고지에서 이화여대 뒤편을 거쳐 한강변으로 뻗어 내린 능선 줄기에 있는 고지다. 첫날의 패전을 만회하려는 듯, 적은 이 일대 방어선에 78독립연대와 25여단 병력을 투입하고 응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25여단의 주력은 팔로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능선을 ‘서부방벽’이라 부른 인민군은 서울시민들을 동원해 동굴진지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때마침 그때 신촌역에서 기적소리가 울렸다. 그 열차편으로 김일성 근위사단이 도착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아마도 아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이었겠지만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에 임하는 해병대의 사기는 오히려 충천했다.안산을 공격한 우측 부대가 오전 중에 목표지점 일각을 점령했고, 좌측 와우고지에서도 오후에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연희고지를 향한 1대대는 지리멸렬이었다. 고지로 이어지는 계곡의 좁은 개활지에 적의 화력망이 집중돼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고길훈 대대장은 작전상 일시 퇴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열을 정비해 다시 공격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대원들에게 잠시 휴식시간을 줘 에너지를 재충전시킨 제1대대장 고길훈 소령은 23일 아침 3개 중대를 동시에 공격 라인에 내보냈다. 24시간 안에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래도 별다른 진전이 없어 보이자 미 해병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연희고지 탈환임무를 미 해병 예비대인 제2대대에 맡겼다. 전차대를 투입해 추월 공격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그 대신 우리 해병 제1대대에는 시내 공격의 일선을 담당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서울 지리를 잘 아는 부대를 앞장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 해병 제2대대는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밀고 나갔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연희고지 능선의 요지인 56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한 무리의 한국 해병대원들이 그들을 반겨 맞았다.
“원더풀, 원더풀, KMC가 먼저 와 있다니!”
미 해병용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수한 것으로 알았던 한국 해병대원 7∼8명이 고지 위에서 사방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중대 이통상 분대장과 그 휘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앞질러 최일선에 나가 있었던 관계로 철수 명령을 모르고 계속 공격 중이었다.
22일부터 밤낮없이 계속된 연희고지 전투는 25일에야 한미 해병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은 2500여 명의 병력을 잃고 북쪽으로 패주했다.
서울 시가전 돌입
신현준 사령관은 24일 밤 우리 해병 제2대대 본부가 설치된 아현국민학교(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시가전 준비에 여념이 없는 대대장 김종기 소령과 부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휘하 장병들을 찾아다니며 어깨를 다독여 주면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결코 외롭지 않다는 위안이 되는 법이다.
“그동안 수고들 많았지? 이제부터는 시가전이 시작될 테니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 주게.”
사령관의 이 한마디는 해병용사들 모두에게 큰 힘이 됐다.
25일에는 김성은 부대가 인천을 경유해 수색에 당도해 전력이 더욱 보강됐다. 귀신 잡는 해병이 온 것이다. 김 부대는 통영작전을 마무리하고 인천작전 지원을 위해 막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달려온 길이었다. 손원일 참모총장과 신사령관은 지프를 몰고 수색으로 달려가 김부대를 마중했다.
“김대령, 어서 와. 정말 수고가 많았어.”
“바쁘신데 이렇게 직접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귀신 잡는 해병대가 온다는데 어떻게 앉아서 기다리겠나.”
신 사령관은 김 부대를 제5대대로 명명하고 대대장에 사령부 인사국장 김대식 중령을 임명했다.
똑같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대대 병력이 가세하게 되자, 해병용사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떤 적과 맞부딪쳐도 싸워 물리칠 자신이 생겼다. 김 부대는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주인공이 아닌가. 손 제독은 그 자리에서 김성은 부대장을 해병대사령부 참모장으로 복귀시키는 인사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서울 탈환전 수행의 중요한 지침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포로와 부역자 처리 말인데, 절대 죽이지 말게. 통영에서는 아주 잘했어. 여기서도 꼭 그렇게 하도록! 포로는 함부로 죽이지 말고 부역자는 경찰에 넘겨야 하네.”
해병대에서는 전쟁 기간 중 이 원칙이 철저히 이행됐다. 지금까지 해병대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이 단 한 건도 없는 것은 이 엄한 군율 때문이었다.
서울 시가지 전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적은 전세가 기울어지자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벌기 위해 시가지를 요새화하고 끈덕지게 저항했다. 서울 거리의 중요한 네거리마다 모래주머니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구축돼 있었다. 그 전면에는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한미 해병대의 접근을 막았다. 좌우 건물 옥상과 2·3층에는 중화기를 배치했다.
전차가 멀리서 그곳을 공격해 적을 퇴치한 뒤, 공병대를 투입해 지뢰를 제거해야만 네거리 하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진격의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 해병대의 강력한 화력 덕분에 돌파구가 뚫리기 시작했다.
25일 밤부터 시작된 마포전투에서는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 이날 밤 미 해병1연대는 강력한 탄막사격을 가한 뒤 주력부대를 투입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마포를 내주지 않으려고, 적은 약 7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박격포로 응사하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공중지원이었다.
미 해병 항공기들의 공습을 받고 흩어지기 시작한 적진을 주력부대가 추격하며 공격한 것이다.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한 뒤 우리 해병용사들은 건물 내부를 수색해 잔적을 소탕했다. 26일 새벽 전투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을 때 260여 구의 적병 시체가 확인됐고, 83명이 포로로 잡혔다.
청파동과 만리동 고개를 넘어 서울역 쪽으로 진격한 26일 아침, 적은 서울역 청사 2·3층 창가에 기관총을 걸고 대항을 시도했다. 화염을 방사하는 미 해병 전차가 기선을 제압한 뒤를 이어, 건물 안으로 돌진한 우리 해병들에 의해 서울역은 금세 탈환됐다.
그때 건너편 세브란스 건물 뒤편 언덕에서 “국군 만세” “해병대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를 맞아들인 해병용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육군 초등군사반에 파견돼 교육을 받다가 6·25가 나기 전날 급성맹장염으로 후송됐던 김낙천 소위였다.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며칠 뒤 서울이 함락되는 바람에 큰 고생을 했다. 실밥도 뽑지 않은 수술 상처를 움켜잡고 탈출해 3개월을 숨어 살았다고 했다.
손 총장과 신 사령관의 구사일생
서울 시가지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여기저기 불타는 건물이 보였지만, 아무도 불을 끄는 사람은 없었다. 불이 꺼진 건물들은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 매캐한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멀쩡해 보이는 건물도 창 유리가 다 깨지고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미군의 포격과 공중폭격, 도망치는 인민군들의 방화로 인한 화재였다.
손원일 참모총장은 이런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미군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불필요한 폭격을 막아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현준 사령관과 함께 직접 정보 수집에 나섰다. 적정을 살펴 포격의 필요가 없으면 미군에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아찔한 위기를 맞았다. 두 사람은 총도 없이 적정을 살피러 후암동 방면으로 나갔다. 한 건물 앞에서 대전차 지뢰가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 순간 남대문 방면으로 가던 미군 전차가 포신을 돌려 그쪽으로 불을 뿜었다.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땅에 엎드려 위기를 피했다. 뒤에 알려진 얘기지만, 그때 그 건물 옥상에서 적군 몇몇이 두 사람에게 조준사격을 하려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이 미군 전차병 눈에 띈 것이다.
서울 중심가 큰 건물 벽면에는 소련 지도자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김일성 초상화에 ‘절세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라는 찬사가 곁들여 있는 곳도 많았다. 그걸 보고 흥분한 병사들은 건물 안으로 달려가 그 거대한 초상화를 거둬 들고 내려왔다. 그걸 군화발로 밟아 짓이기고 불을 지르면서 모두가 손뼉치고 환호했다.
李 대통령 한국군 중앙청 탈환 기대
제2대대장 김종기 소령
뭐니 뭐니 해도, 서울탈환 작전의 하이라이트는 중앙청 국기 게양이다.
적치 3개월 동안 나라의 심장인 중앙청 돔 꼭대기에 펄럭이던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국기를 게양한 일은 서울수복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아니, 사라져 가던 대한민국이 되살아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나라의 심장에 태극기를 올리는 일만은 꼭 내 손으로 하고 싶어서 작전지역을 벗어나 파울을 저질렀습니다.”
중앙청에 국기를 게양한 영웅 박정모(예비역 대령) 소위는 그것이 작전구역 위반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말썽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었다.
박 소위가 이끄는 6중대 1소대는 1950년 9월 26일 오후 3시 서울시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국기 게양 작전을 완수하고 정문 현관에 붙어 있던 김일성 초상화를 걷어내 불태웠다. 이때 종군기자 박성환 씨가 다가와 인터뷰를 청하면서 지금 미군이 중앙청을 공격 중인데, 이왕이면 우리 해병대가 탈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소원이라고 했다.
박 소위에게서 이 보고를 받은 제2대대장 김종기(金鍾淇) 소령은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26일 격렬한 시가전 끝에 탈환한 반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대대본부를 두고 있을 때였다. 대대 부관 겸 인사참모 정봉익 중위, 6중대장 신포학 중위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대대장 김 소령은 중앙청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대형 태극기에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라고 쓰고, 그 옆에 ‘대한민국 만세’라고 써서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에게 주었다. 반드시 중앙청을 탈환해 작전의 대미를 장식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앙청은 미 해병 제5연대 작전지역이었다. 뒤에 김 소령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제5연대에도 한국 해병대 제1대대가 배속돼 있으니 공격부대의 국적을 가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 소령은 미리 신현준 사령관에게 보고해 허락을 받아 뒀다.
중앙청 탈환작전은 27일 새벽 3시 한미 해병대 합동으로 시작됐다. 박 소위의 회고담에 따르면, 26일 오후 미 해병대가 네이팜탄을 때리고 포를 쏘아 공격한 중앙청은 연기에 휩싸여 접근이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연기를 피해 양병수 이등병조와 최국방 견습 해병을 이끌고 건물 가까이 접근한 박 소위는 무조건 수류탄부터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앞이 안 보이니 도리가 없었어요. 더듬더듬 꼭대기 층에 이르러 옥탑으로 올라가려는데, 사다리 가운데가 폭격으로 끊겨 버렸어요. 혁대를 풀어 연결해 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옥상에서 밖으로 나가는 구멍이 너무 작아서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긴 작대기를 올리게 해서 거기다 태극기를 동여매고 안에서 밖으로 내걸었습니다.”
박 소위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제대로 하는지 궁금했던 김 소령은 시가지 전투를 지휘하면서 중앙청 꼭대기에 자주 눈길을 주었다.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는 한국 해병대
“조인복 소위와 함께 중앙청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돔 꼭대기에 태극기가 올라가는 거야. 너무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모습이었어.”
생전에 김종기 소령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나와 해사 동기생인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다시 해군에 복귀해 대령으로 예편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력을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던 그는, 애석하게도 57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해 9월 14일 급환으로 타계했다. 일부러 인천을 찾아가 기념식이 열릴 식장 주변과 월미도까지 둘러보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울탈환을 알리는 포고문 발표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두 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올린 전과는 적 사상자 1만4천 명, 포로 7천 명이었다. 이에 비해 아군 측 피해는 부상자를 합쳐 미 해병대 2,450 명, 한국 해병대 400여 명, 미 육군 300여 명에 불과했다.
작전의 효과는 인천상륙 열흘 만에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산을 함락시킬 목적에서 줄기차게 낙동강 전선을 공략하던 적의 전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는 동안 교통이 끊겨 보급이 중단된 때문이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보급 단절이 장기화하자, 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공세에서 급격히 수세로 몰린 것이다.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된 다음날인 1950년 9월 28일, 손원일 참모총장과 신현준 사령관은 시민들에게 서울탈환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그간 공산당의 강압 하에서 받은 고통은 도저히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고 본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우리 대한민국에 불법 침입해 온 적은 정의를 사랑하는 유엔군 16개국 용사들이 우리 국군과 함께 그네들을 구축하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서 남한은 평화를 회복할 것입니다.
물론 남북전쟁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국민 여러분은 남북통일이라는 성스러운 과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공산 치하 82일간 체험하였을 줄 아는데, 이 자유의 대가로서 성스러운 우방국 용사들과 함께 우리 국군의 귀중한 생명과 막대한 물자가 소비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유엔군과 아군은 서울시내 건물은 되도록 파괴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잔악무도한 북한군의 초토전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네들의 거점이 된 건물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군의 고충을 양찰하시고 거족적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 조국 재건에 매진하여 주기를 본관은 거듭 바라 마지않습니다.
단기 4283년 9월 28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해군소장 손원일·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해군대령 신현준.”
포고령이 발표되고 치안 유지를 위해 서울거리를 순찰하던 해병용사들은 곳곳에서 참혹한 광경에 맞닥뜨렸다.
손제독 "부역자 처벌 신중해야"
종로2가에 있던 종로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날 때였다. 비통한 곡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가 보니 마당에 여자들의 시체 30여 구가 뒤엉켜 있었다. 모두가 총으로 찔려 죽어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손 제독은 부역자라도 이북으로 도망치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는 거리에 써 붙인 포고령에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살상 혹은 사형(私刑)을 금한다”는 제7항으로 추가됐다.
그길로 부산에 내려간 손 제독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 탈환작전 완료를 보고하면서, 인민공화국(북한) 부역자 처벌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대통령에게 손 제독은 또 한 번 강조했다. 총부리의 강압 앞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사람은 정상을 참작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 대통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조병옥 내무장관에게 지침을 내렸다.
“애드미럴 손의 얘기대로 해야 합네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얘기입네다. 부역자라고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네다.”
급조된 임시 행사장서 환도식 진행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29일 환도식을 끝으로 2주 동안의 대장정에 막을 내렸다.
서울을 되찾아 한국 대통령에게 돌려준 그 행사는 어려운 작전을 성공했다는 군사적인 의의만 강조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새로 태어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28일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서울로 태우고 갈 교통편으로 자신의 전용기 바탄 호와 C-54 수송기 한 대를 부산에 보냈다. 자신은 29일 아침 다른 비행기 편으로 미리 도쿄에서 김포로 날아와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29일 오전 10시 30분 대통령 비행기가 도착, 두 사람은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한참을 껴안고 서로 등을 두드리다 떨어졌다.
그리고 또 껴안았다. 그 다음에는 팔이 떨어져라 껴안고 오래도록 악수했다.
“오늘은 개선장군이 먼저 환영을 받아야 합네다.”
이 대통령은 사양하는 맥아더 장군을 한사코 앞장세워 시내로 향했다. 그것이 국민의 뜻이라 했다. 두 사람은 노량진에서 여의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원효로까지 부설된 가교를 건너 중앙청에 도착했다. 한강다리가 끊기고 없었던 것이다.
환도식이 열리는 순간까지도 중앙청 건물에서는 화약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을음 냄새도 배어 나왔고, 한쪽에서는 아직 연기가 나고 있었다. 총탄에 패이고 탄연에 그은 겉모습도 흉하고 불안해 보였다. 식은 중앙 홀에 급조된 임시 행사장에서 사회자도 없이 진행됐다. 단상에는 이 대통령 내외,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이 자리 잡았다.
급히 소집된 정부요인과 각국 외교사절단, 그리고 숨어살던 시민들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서울수복 행사 연설에 앞서 기돟고 있는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각하, 우리 유엔군은 하느님의 가호 아래 한국의 수도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드립니다.”
수도 서울의 인계를 선언한 뒤 맥아더 장군은 조용히 주기도문을 낭독했다.
그 순간 천정에서 깨진 유리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짤랑’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한 표정으로 소리 나는 곳을 보았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앞만 보고 있었다.
“3개월 동안이나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은 데 대한 나 자신 영원한 감사의 마음과, 우리 국민 모두의 감사한 심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이크 앞에 선 이 대통령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겨우 인사말을 시작했다. 감격에 겨운 듯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그러면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를 꼈다 풀었다 했다. 일제 때 손톱이 빠지는 고문을 당한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인사말을 마친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서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행사가 끝난 뒤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서 축전이 왔다. 인천상륙작전을 못 미더워했던 그는 ‘대전(大戰史)에 유례가 드문 작전’이라는 말로 그 작전을 평가했다.
지금 그 행사의 현장이었던 중앙청은 헐려 없어졌다. 그 건물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경복궁의 권위를 말살하기 위해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과 그 뒤편 전각을 헐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우리는 그곳을 정부 중앙청사로 썼다. 그 뒤로도 40여 년 동안 중앙청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된 그 건물은 문민정부 시절에 헐렸다.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앞 잔디밭에 그 건물 돔 첨탑 석조물이 전시돼 있다. 말 없는 역사의 편린에서 중앙청의 비극과 영광을 찾아볼 일이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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