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2) - 인천상륙작전

머린코341(mc341) 2015. 1. 4. 12:20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2) - 인천상륙작전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낸 이 작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군인이 된 것을 보람 있게 여긴다. 특히 내가 해군·해병대 요원으로 이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6·25 때까지 나는 월미도 해군 인천기지 관사에서 살았다. 하지만 미국 출장이다, 통영작전이다 하면서 밖으로만 나돌아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혼자 살고 있었다.


상륙에 앞서 그곳을 과녁으로 삼아 유엔 각국 전함의 함포들이 불을 뿜어대고, 함재기들이 융단폭격을 가했다. PC 704함을 지휘해 나도 3인치 포를 퍼부었다.

 

아내가 피란을 가기는 했지만 가재 도구가 남아 있는 내 보금자리가 잿더미로 변할 것을 생각하면 참담하기만 했다. 인천은 내가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기는 곳이다. 서울을 먹여 살리는 곳간 같은 곳이기도 한 그 도시는 해군의 중요한 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훨훨 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색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인이 사사로운 일로 잡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곳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서울의 관문을 막아버린 곳이 아닌가. 혼자 부산으로 쫓겨 내려간 아내가 피난살이를 하면서 첫 아이(딸 공옥희)를 낳아 잘 기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통영작전이 끝난 뒤 나는 서해를 지키기 위해 전북 군산, 황해도 해주와 몽금포, 백령도 앞바다에서 초계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훗날 안 일이지만 전북 군산 앞바다에서 육지에 함포를 쏘아댄 것은 양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군산에 상륙할 것처럼 행동한 기만전술이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6·25 직후 한강을 시찰할 때 결심한 것이었다.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 호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장군은 지프 편으로 서울 한강 남안(南岸)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서울을 관찰했다.

 

"그때 한국 정부가 대전으로 천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군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인민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음을 실감하게 됐고, 사태가 매우 절망적임을 알게 됐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건너편 한강 둑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보이는 광경은 정말 비참했다.

 

나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처할 방법은 미군의 투입뿐이며, 패세를 승리로 일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전략기동인 인천상륙작전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시찰의 결론은 인천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적의 허리를 끊으려는 과감한 구상이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 해군과 공군력을 동원해 제해권과 제공권부터 확보하고,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면서 위 아래 협공을 가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초기 필리핀에서 일본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겨 고전을 면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것을 역전시킨 것이 적의 배후에 군사력을 기동시키는 이른바 개구리 뛰기 전법(Leap frogging 혹은 Hopping Island, 토끼뜀)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 중반기부터 이 전법을 구사했다. 라바울(Rabaul) 섬, 팔라우 섬 같은 일본군 거점을 우회해 그 배후지역의 섬에 병력을 상륙시킴으로써 전방의 일본군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그렇게 차례차례 탈환한 그 작전은 모두 성공해 일본을 패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마지막으로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까지 잃었을 때 일본이 상륙작전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본토 차례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원폭 공격을 당해 패망이 앞당겨졌을 뿐이다.


이런 경험은 그에게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미8군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 제해권과 제공권을 이용해 적 배후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일거에 격멸시킬 구상이었다.


지리적 악조건 불구 상륙작전 감행

 

인천상륙작전에 '야크기 사냥꾼' 이라는 별명의 함재기 F4U 콜세어(Corsair)가 맹활약 했다.

나는 대대장, 부전투단장 시절 근접항공지원(CAS)을 수시로 활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맥아더의 구상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해군조차 반대했다. 셔먼((Forest P. Sherman) 미 해군참모총장은 인천의 지리적인 악조건을 들어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인천의 조수 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고,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는 낮에도 항해하기 쉽지 않은 것도 우려할 사항이었다.

 

만일 그 수로에 함정이 좌초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수로가 완전히 차단될 위험성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조 때를 기해 작전해야 하는 제약이 따르는 데다, 갯벌에 매설했을지도 모를 기뢰도 걱정이었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려면 수심이 최소한 29피트는 돼야 하는데,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날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거기다 높은 해안 안벽(岸壁)은 상륙 주정들의 상륙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 콘크리트 또는 석축 구조물을 제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옛날 성벽 전투처럼 사다리를 만들어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맥아더 장군도 그 모든 조건이 결정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스스로도 ‘5천분의 1의 도박’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인천은 상륙작전에 불리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역으로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고 그는 믿었다. 누가 보아도 적당하지 않은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허를 찌르자는 생각이었다.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생각은 너무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군 수뇌들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판


한강 시찰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맥아더는 즉시 작전에 착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전에 쓸 미 해병대가 낙동강 방어전선에 투입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군이 계속 쫓기고, 긴급 투입된 미군 병력도 인민군의 파죽지세 같은 기세를 꺾지 못해 낙동강 전선이 다급해졌다.

 

부산 교두보를 지키기 위한 아군의 총력전에 부딪쳐 인민군의 낙동강 격파공세가 교착상태에 빠진 7월 중순부터 맥아더 장군은 결심을 굳혔다. 잠시 미루어 뒀던 작전을 전개할 생각으로 작전부서에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군 수뇌부의 동의를 얻어 둘 생각으로 팬타곤에 작전의 개략을 보고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썽이 됐다.

 

군 수뇌들이 일제히 반대하며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심했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구체적인 계획을 알고부터는 생각을 바꿨다. 군 수뇌부의 이런 분위기가 일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군수뇌부의 반대 여론 영향은 워싱턴 정가에도 미쳤다. 의회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에 관련된 고위관료와 정치인들이 모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군 수뇌부의 반대 이유는 첫째 인천은 부산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병력과 장비를 450km나 떨어진 인천에 쏟아 부으면 유엔군 병력을 분산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논리였다.

 

두 번째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대 병력을 인천으로 빼돌리면 최후의 교두보 부산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주둔한 미7사단 병력을 한국전선에 투입하면 일본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도 반대 이유의 하나였고, 만일 작전이 실패하면 미군의 보급체계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만일의 사태까지 거론됐다.


정치인들까지도 반대하고 나선 계획을 맥아더 혼자 고집하자, 8월 23일 워싱턴에서 ‘설득사절’이 도쿄로 날아왔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에게 “맥아더를 직접 만나 설득하라”고 출장을 보냈다.유명한 ‘도쿄회의’에서 콜린스 장군은 군산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셔먼 제독도 이에 동조했다.

 

맥아더의 '10만 명을 구한 연설'

 


미 의회에서 연설중인 맥아더 장군


그 뒤 ‘10만 명을 구한 연설’로 유명한 맥아더의 반론이 이어졌다.


“인천이 상륙작전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의 주장을 끝까지 듣고 난 맥아더 장군은 ‘45분 연설’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부산점령에 혈안이 돼 있는 적이 낙동강 전선에 전력을 쏟아 넣고 있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허술하다, 그러므로 기습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적도 인천을 상륙작전 지점으로 예상치는 못할 것이므로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이 빠지면 길고 구불구불한 수로가 작전에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충분한 대안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조 시간을 이용해 공격하는 계획을 면밀히 세우고, 높은 안벽을 타고 넘어가는 장비를 미리 준비하면 어려울 게 없다는 생각을 밝히면서, “이 작전은 10만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은 인천에 비해 작전에 용이한 곳이기는 하지만 성공을 해도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효과가 없다는 말로 콜린스 장군의 대안을 물리쳤다.

 

1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작전이라는 것은 낙동강 전선에서 적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려면 적어도 10만 명의 목숨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작전이 끝났을 때 극소수였던 아군의 피해를 생각하면 너무도 정확한 예측이었다.

 

유명한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론도 이때 나왔다. 낙동강 전선에 있는 워커 장군의 미8군이 망치라면, 인천상륙 부대는 모루가 돼 북한군을 괴멸시킨다는 이치였다. 망치질은 튼튼한 받침대가 있어야만 힘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을까.

 

45분간이나 계속된 맥아더 장군의 발언이 끝나자, 셔먼 제독은 큰 감동을 받은 듯 “위대한 발언이었다”고 치하했다. 상륙작전을 관장하는 해군참모총장의 찬성은 회의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콜린스 장군도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인천상륙작전은 최종 결론이 났다.

 

한국 해군 , 적정 파악 작전 성공


워싱턴의 결재가 나기도 전인 8월 12일,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점령해 인천지역 적정을 파악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 한국 해군에도 날아들었다. 이 요청에 따라 해군본부 정보감 함명수 소령(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첩보대를 이끌고 영흥도에 잠입했다.

 

해사 동기생인 함 소령은 적의 동정뿐만 아니라, 인천항 지역 안벽의 높이에서 첫 상륙지점으로 잡힌 월미도 해안포대 위치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작전을 돕는 공을 세웠다. 미국 정부는 첩보대장 함 소령과 전 대원들에게 한국전쟁 최초로 은성무공훈장을 주어 전공을 치하했다.

 

만일 한국 해군과 해병대에 의해 덕적도·영흥도 같은 인천 앞바다의 큰 섬들이 장악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적진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갖지 못했다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미 해군·해병대가 유기적으로 착착 맞아 돌아간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한 첩보수집 작전을 한국 해군이 맡게 된 것은 손원일 참모총장과 그의 고문관이었던 워너 미 해군 대령 역할이었다. 1950년 7월 10일 한국 해군 기동전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워너 대령은 해군 작전을 일일이 손 제독과 상의해 결정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알고 있었던 워너 대령 건의로 한국 해군의 첩보작전 참여 결정이 난 사실을 미 해군 루시 중령이 손 제독에게 알려 주었다. 미 극동사령부에서 한국 해군 고문관으로 파견됐던 그는 8월 12일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 명칭) 계획이 수립되자, 도쿄에서 부산으로 날아와 제일 먼저 손 제독에게 보고했다.

 

李 대통령 인천상륙작전 중요성 강조

 

손 제독은 즉시 부산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 이대통령은 대구에 있던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했다.


“정 총장, 애드미럴 손이 놀랍고 반가운 뉴스를 가지고 왔군. 그래서 정 총장을 급히 오라고 한 것입네다.”


부산 경무대 집무실로 들어서는 정 총장에게 이 대통령은 특유의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손 제독에게 정보를 잘 수집해서 작전이 반드시 성공하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우리의 생사가 그 작전에 달려 있다고 했다.


해병대가 그 작전에 참가하게 된 것은 통영상륙작전에서 보여준 한국 해병대의 우수성을 미 해병대가 인정한 때문이었다. 진동리 전투 때 한국 해병대의 실력을 본 미 해병대 임시여단장 크레이그 준장 등의 건의를 받은 맥아더사령부는 일찌감치 한국 해병대와의 합동작전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현재 월미공원인 그린비치에 상륙한 해병대 모습, 당시에는 해안 안벽이 없었다. 1950. 9.15


한국 육군은 처음에는 제외돼 있었으나 정 총장이 워커 미8군사령관에게 강력히 건의해 뜻을 이뤘다. 8월 25일 대구 미8군사령부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한국 해병대의 참가가 공식 통보되자 정 총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17연대가 상주지구 전투에서 전 부대원 1계급 특진의 전공을 세운 것에 감명받은 정 총장은 이 부대를 꼭 참가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17연대는 미7사단과 함께 한미 해병 선봉부대가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한 뒤 후속 행정상륙부대로 참여하게 됐다.


해병대는 원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게 돼 있었다. 신현준 사령관 생전에 내가 직접 들은 얘기로는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영천∼안강 전선을 떠맡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신 장관은 부산 교두보가 위태로워지자 용감한 부대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해병대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 방침은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게 통보돼 당시 해병대 요원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모집돼 그곳에서 훈련받은 해병대 3·4기 신병들도 갑작스러운 출동명령에 따라 배를 타고 나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산 동래에서 열흘간 보충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막상 배를 타고 보니 엉뚱하게 인천으로 가고 있더라”고 그들은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다.

 

낙동강에서 인천으로


“잠깐 기다려. 거기는 안 가도 좋게 됐어. 해병대는 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해.”

 

국방장관에게서 낙동강 전선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신 사령관의 보고를 받은 손 제독은 느긋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더 중요한 임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일 해병대가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소모품이 됐더라면 ‘귀신 잡는 해병’의 전통은 맥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 해병들이 인천상륙으로 미 해병대와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할 한국 해병대가 부산항을 떠난 것은 1950년 9월 12일 오후 6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두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미 해병1사단 작전통제를 받게 된 한국 해병대 4개 대대 병력은 미 해군 수송선 피카웨이 호에 오르면서도 낙동강 전선으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처음 지급받은 M1 소총을 받아 보니 너무 무거웠어요. 이걸 가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싸우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엄청나게 많은 선단 속에 우리 배가 끼어 있는 겁니다. 그걸 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데요. 어떤 전투라도 자신 있다 싶었습니다.”

 

제1대대 제1중대 제1소대장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이서근 예비역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작전에 참가할 대소 함정의 무리가 제주도 섬 전체만 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미 군함에 오르는 한국 해병대


내 기억에도 그랬다. 서해 일원 초계임무를 마치고 13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당도했을 때 주위에 각국 함정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었다. 참전 유엔 각국 해군 함정이 무려 261척이나 됐다.

 

웬만한 야산 크기에 비유될 정도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전함들의 위용은 기껏해야 구축함 정도만 보았던 나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그런 거대한 함정들 틈에 낀 704함 등 한국 해군 함정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작지만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자부심으로 위축되려는 마음을 달랬다.

 

한국 해병대원들에게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공식 통보된 것은 9월 13일이었다. 예비 작전은 이날부터 시작됐다. 월미도와 인천 일대에 있을 적의 화력 진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격이었다.


항공모함 갑판을 발진한 함재기들이 인천 상공으로 날아가 소나기 같은 폭격을 퍼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함과 구축함들이 내륙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14일에도 적진의 무력화 작전은 계속됐다. 영국 순양함까지 가세했다. 함재기들은 더욱 신바람이 났다.

 

디데이, 항내 깊숙이 진입


드디어 D데이 15일 새벽이 밝았다. 05시를 기해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코르세어기 8대가 월미도 제방 위에 있던 장갑차를 때린 것을 신호로 섬 전체에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적의 반격 징후가 포착됐으나 함포사격에 제압돼 이내 조용해졌다.

 

05시 40분 미 해병대 제1제대 선봉부대원들이 17척의 상륙주정(LCVP)에 분승해 월미도 해안으로 진격했다. 전사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전투에 참여한 김종기 동기생의 증언에 따르면, 제1제대에는 한국 해병대 1개 중대 병력이 포함돼 있었다. 해안선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한국 해군 PC 701·702·703·704함의 함포공격을 신호로 외해에 정박한 유엔 함대의 일제공격이 시작됐다.

 

인천 지리에 밝았던 나는 항내 깊숙이 진입해 마치 소총으로 조준 사격을 하듯 함포를 쏘았다. 목표물은 백발백중이었다.


제2제대는 06시 35분에 월미도에 상륙했다. 10분 뒤에는 전차를 적재한 주정이 상륙해 적진에 포격을 가하며 인천 시내 쪽으로 진격했다. 제2제대 작전개시 30분 만에 월미도 105고지 정상에 성조기가 게양됐다.

 

기함 갑판에서 쌍안경으로 이 모습을 확인한 맥아더 장군은 1시간 뒤 월미도 완전 점령 보고를 받았다. 그는 부관에게 메모지를 청해 즉석에서 메시지를 작성, 도일 제독에게 건네 주었다. 전 함대에 보내라는 지시와 함께.


“The Navy and Marines have never shone more brightly then this morning.” (오늘 아침 해군과 해병대는 전례 없는 영광에 빛나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대기하던 각 함정의 장병들은 이 한 장의 메시지로 작전의 성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선발대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손쉽게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를 손에 넣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드디어 한국 해병대 차례가 왔다. 미 해병대 2개 제대의 월미도 상륙에 이어, 오후 만조시간을 이용해 본대가 상륙하게 된 것이다.

H-아워(공격 개시시간)를 2시간여 앞둔 15일 15시 30분 긴급 대기명령이 떨어졌다. 상륙함(LSD)에서 내려진 상륙주정(LCVP)이 수송함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손원일 제독의 함내 훈시

 


상륙명령을 기다리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사랑하는 해병대 장병 여러분, 오늘 우리는 드디어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됐습니다…. 이 작전은 우리 조국을 불법 침략한 공산 괴뢰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해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상륙을 앞둔 해병대원들에게 작전의 의미를 강조하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함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미군 수송선에서 한국 해군참모총장의 목소리가 나오는 데에 감격한 해병용사들은 또 한 번 분골쇄신할 각오를 다졌다.


손제독의 방송에 이어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의 훈시가 뒤를 이었다. ‘귀신 잡는 해병’의 용맹을 강조하면서, 이번 작전에서도 그 전통을 이어 가자는 당부였다. 전 대원은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다문 입술에 또 힘을 주었다.

 


한국 해병대 상륙부대를 지휘하는 신현준 사령관


드디어 공격개시 시간인 18시가 됐다. 상륙주정에 승선한 한국 해병대의 출진에 맞춰 우리 해군 함정들도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이 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군 함정은 15척이었다. PC 4척(701·702·703·704함), YMS 소해정 7척(501·502·510·512·513·515정), JMS 소해정 4척(302·303·306·307정) 등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함정이 총출동했다.

 

나는 이날 아침 제1제대의 상륙을 지원할 때보다 더 들뜬 마음으로 함포사격에 참여했다. 그때 나는 사실상 704함을 지휘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유엔 함정들이 연안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약점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인천 내항 깊숙이 들어가 눈에 익은 목표물들을 향해 귀청이 찢어지도록 함포를 쏘아댔다.

 

유엔군 함정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함재기들이 새카맣게 날아가 공중폭격을 퍼부었다. 이에 힘을 얻은 듯 우리 해병대가 용감하게 만석동 해안으로 돌격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준비된 사다리를 안벽에 걸쳐 놓고 줄지어 타고 올라가 해안 교두보를 넓혀 가는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해안 저쪽의 시가지는 시뻘건 불바다였다. 저녁놀이 들기 시작한 초가을 인천 시가지 하늘은 주황색 불꽃과 검은 연기, 푸른 하늘색이 잘 조화된 화려한 유화(油畵)처럼 보였다.


해안 교두보에서 밤을 보낸 해병대는 16일 미명 교두보를 시가지 쪽으로 넓혀 가는 작전을 개시했다.


인천 시가지 곳곳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널려 있었다. 13일부터 시작된 포격과 공습에 쫓겨 가면서 적은 억류 중이던 우익인사와 양민들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서 방공호 속에서, 동네 우물 속에서 시신이 겹친 채로 발견됐다. 아직 연기가 나는 민가에서도 시체가 나뒹굴었다.

 

작전 한 달만 늦었어도 '난공불락' 요새


이날 나는 작전경과를 묻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인터뷰는 「장관(壯觀) 인천상륙작전-아(我)해병대 영웅적 분전」이라는 제목으로 『부산일보』 9월 17일자에 크게 실렸다.

 

해안 교두보가 확보된 뒤 나는 704함을 부두에 정박시키고, 잠시 짬을 내 월미도로 달려갔다. 비어 있을 관사지만 내 신혼의 단꿈이 배어 있는 보금자리의 안부가 궁금했다.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파괴됐을 줄 알았던 관사는 인민군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돼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날 오후 늦게 월미도에 상륙해 격전지를 둘러보았다. 견고한 요새 구축 현장을 보고 그는 “작전을 서두르기 잘했다”고 말했다. D - 데이(작전개시일)를 1개월만 늦추었으면 월미도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했으리라는 말이었다.


한국 해병용사들은 폐허로 변한 인천 시가지를 샅샅이 뒤져 잔적(殘賊)을 소탕했다. 그리고 시가지 정비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항만시설과 가로가 정상화되고 시정(市政)이 재개돼야 병력과 장비의 소통이 원활해진다. 그래야 서울 진격이 빨라진다. 그 일은 불과 사흘 만에 끝났다. 상륙 나흘째인 9월 18일에는 인천시장 취임식 행사를 가질 수 있었다. 참으로 신속한 뒤처리였다.


감격 속 인천시장 취임, 도시 기능 회복

 

3개월 동안 적치 아래 있었던 인천의 행정기관은 제로 상태였다. 한국 정부로서도 실지 회복에 대한 준비가 아무 것도 없어 상륙군이 알아서 해야 했다.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의 부탁을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상륙군이 부산항을 출항할 때부터 줄곧 해병대 장병들 옆을 지키면서 지휘하고 격려했다. 그래서 장병들에게 든든한 마음의 버팀목이 돼 주었다.


당시 인천에는 인민군에게 억류돼 있다가 상륙군에 의해 풀려난 우익인사들이 많았다. 손 제독과 신 사령관은 그런 인사 가운데서 표양문(表良文) 씨를 시장 후보로 천거했다.

 

그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인천 갑구에서 입후보했던 정치인이었다. 18일 오전 인천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조촐한 행사장에서 시장 취임식 행사가 열렸다. 3개월 적치 아래 고생하던 인천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어디에 숨겨뒀던 것인지 똘똘 말린 태극기를 펴 들고 나왔다.

 

인천 시가지 경비를 담당했던 해병 제2대대에서 차출된 병력이 식장 주위를 경비하는 가운데 <애국가>가 연주됐다.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하고 따라 불렀다. 식장을 경비하던 해병용사들도 함께 불렀다. 눈물보다 진한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식장에 출렁거렸다. 우리말과 영문으로 된 임명장이 낭독됐다.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할 때까지 임시 시장으로 임명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임명장을 받아든 표시장의 인사말에 이어, 손 총장의 축사, 신사 령관이 선창한 만세 삼창으로 행사는 끝났다. 이제 비로소 도시 기능이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처음 만난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후 전선을 시찰 중인 맥아더 장군


시장 취임식이 열리기 전날인 17일 한미 해병대는 벌써 경인가도를 장악해 부평까지 진격해 있었다. 부평∼주안 중간지점에 지휘부를 설치한 신사령관은 한국 해병대의 진로를 협의하기 위해 인접 미 해병5연대 지휘부를 찾아갔다.


그때 부평 평야에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쌍안경으로 주변을 관측하던 신 사령관 시야에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적 탱크 9대가 잡혔다. 긴박한 사태를 부대에 알리기 위해 무전병을 부르는 동안, 서쪽 하늘에서 미 공군기 편대가 날아와 모조리 박살을 내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이날 맥아더 장군은 전선 시찰 중에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해병 제2대대를 방문했다.


동기생 김종기 대대장을 격려하려고 그곳에 갔던 나는 유난히 키가 큰 그를 첫눈에 알아보고 경례를 붙였다. 특유의 선글라스를 낀 그는 온화한 미소로 답했다.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들과 수많은 종군기자들이 그를 수행했다. 손 총장도 함께 왔다. 완장을 두른 수많은 기자가 플래시를 터트려 가며 사진을 찍는 것을 봤다.


연대장 풀러 대령에게서 간밤의 교전상황을 보고받은 맥아더 장군은 조금 전 박살난 적 탱크가 보이는 곳으로 해병 장병들을 불러냈다. 아직도 연기를 내뿜고 있는 인민군 T-34 전차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자는 것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에게는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그런 쇼맨십도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믿고 따랐던 것이다.

 

해밀턴 쇼 대위와 재회


“안녕하십니까? 손제독님!”


손원일 참모총장이 맥아더 장군을 수행한 미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악수하고 있을 때였다.


미 해군대위 한 사람이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하며 손 제독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아니, 쇼 대위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길….”


“네, 미 해병1사단에 소속돼 한국 해병대와의 연락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해밀턴 쇼 대위는 초창기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졸업 후 모교 훈육관으로 근무했던 나와 김영관·김광옥·김윤근·이기종과 같이 일한 동료였다.


해군사관학교 교관생활 1년을 마치고 쇼 대위는 중단한 대학공부를 계속하겠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대학에 복학해 공부하던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은 내 고향”이라면서 자원 입대했다. 다시 해군대위 계급장을 단 그는 능통한 한국어 실력 때문에 해병1사단에 배속됐다. 한국 해병대와의 통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녹번리(서울 은평구 녹번동)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불꽃 튀는 시가전이 벌어지던 가두에서 연락업무를 수행하다 적탄에 맞은 것이다. 한국과 미국 해군 해병대의 진정한 친구 한 사람이 그렇게 사라져 갔다.


지난 2008년 9월 22일 은평구정이 녹번동에 쇼 대위의 추모공원을 설립하고자 추진위원회 결성식을 가졌는데 나도 참석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 다시 자원 입대한 쇼 대위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고향처럼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인종과 국적이 다른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찾아든 것은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한국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 한국말과 문화에 익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분명한 미국사람이었다.

 

서울 선봉은 우리 해병대에게


맥아더 장군이 인천으로 되돌아간 뒤 손 제독과 신 사령관은 지휘부 막사로 들어갔다.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과 서울탈환작전 협의가 시작됐다. 맥아더 장군을 수행해 해병 1연대를 방문할 때, 손 제독은 벌써 한국 해병대를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세워 달라고 요청해 내락을 받아 두었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 해병대의 용맹성을 치하하면서 손 제독과 신 사령관에게 본국 정부에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했다는 말끝에 손 제독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한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려도 좋겠습니까?”


맥아더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 제독은 앞으로 전개될 서울탈환작전에 한국 해병대를 앞장서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 장군은 옆에 있던 알몬드 10군단장에게 서울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영광을 한국 해병대에 양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염려 마십시오. 한국 해병대는 아직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한 일이 없는 군대입니다.”


알몬드 장군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손 제독이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알몬드 장군은 마지못해 손 제독의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방침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협의는 쉽게 이뤄졌다.


그 결과 한국 해병대 제1·2대대와 미 해병 제5연대가 서울 서쪽,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 방면, 한국 해병 제3대대는 김포와 행주 방면을 맡게 됐다.


나도 인천상륙작전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금성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