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 2중대 지휘記
3년을 기약하고 해병대에 들어 왔으나 이미 5년이 넘게 되었다.
계급은 빨리 올라 대위 4호봉이다. 허나 언제 제대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군대라는게 당시만 해도 전역원을 제출하라고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애초의 약정이란 존재도 없다. 심지어 약속을 지키라고 탄원서를 냈다가 구속된 기수(해간 33기)도 있었다.
'71년 봄, 2차 파월후 귀국하여 김포여단 포병대대로 배속 받았다.
빽없이 군에간 관계로 툭하면 중대장이다.
중대장만 벌써 네 번째다.
부임하고 보니 미군에서 보급받던 월남에 비하니 이건 아주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먹는 거부터 잠자는 것 까지......,
그래도 포항은 숙소는 괜찮은 편이였는데 여긴, 이건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작전개념이 전쟁이 붙으면 (이북과) 빠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선 당장 생활 할 수 있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중대장실만 하나 덩그러니 있고 학교 건물 같은거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장교 하사관 병들이 함께 자도록 되어 있었다.
결혼한 고급하사관도 원칙적으로 영내거주였다.
젊은 나이에 가만 가만히 집에 다녀오고(부대 근방에 방을 얻어서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허나 밤에는 대대장님이 직접 전화해서 고급 하사관들을 확인하니 중대장이 봐 줄래야 봐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고급하사들은 신경질만 부리고 그게 고스란히 하사에게 그리고 병들에게 전달되었다.
식사는 독립 주계가 있어 식품 재료를 받아다가 취사를 하는데 이건 식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중앙 조달품, 현지 조달품을 송장데로 수령해도 형편없는 식사였다.
아마 동대문 시장에 갖다 놓고 그냥 먹고 가래도 아무도 안 먹을 그런 품질이였다.
아무도 안 떼먹어도(미군들은 자국의 중류가정의 식사를 준다고 하는데........ ) 거저 가져 가라면 가져는 가는 사람은 있을 거다. 개 가져다주려고......,
펄펄 뛰는 젊은 놈들을 잡아다 놓고 이게 도데체 뭣들하는 짓들인가 싶기도 하다.
해서 부대에 휘발유가 2드럼 있길래 중대 선하에게 시켰다.
팔아다가 돼지고기를 사서 국에다 넣어 주라고 했더니 환장을 하고들 먹었다, ,
매일 시동유가 20가롱씩 나와 휘발유는 흔했는데 하사관들이 가만 가만 팔아먹은 모양이였다. 중대장이 겁이나 못팔아 먹으니 ......
그럴 바엔 싹 팔아다가 애들이나 먹여야지,
징역 가면 내가 가면 되는 것이고..........,
아침마다 세면기에 10여개 더운물을 담아서 줄지어 있고 그 옆에 병들이 수건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 꼴을 보니 나는 눈이 확 까디 집어졌다.
귀한 아들 군대 보냈더니 하사관 세수 수발이나 하고 이거 당장 때려 치워야겠다.
하고 마음먹고 세숫대야를 전부 발로 엎어버리고 앞으로 세숫물은 찬물로 본인이 직접 떠서 하라고 엄명했다(물론 중대장은 제외하고...).
통신 반장을 불러 살림하는 하사관 중 2km 안쪽에 살림하는 사람에게는 중대 교환에(독립 포병 중대는 자체 교환대가 있다) EE_8전화기를 하나씩 설치하라하고 그 전화기는 꼭 본인만 받고 다른 식구들은 손도 대지 말라고 엄명하고 중사 이상은 당직자만 남고 퇴근하라고 했다.
아주 고마워 죽을려고들 했다.
자연 고급하사들이 빠져 나가니 부대 분위기가 약간 좋아졌다.
그래도 하사들과 병들이 한 숙소를 쓰니 이게 또 문제였다.
그 당시 우리 부대 근방에 우리 포들을 지하에 방열하는 작업이 시행중이었다.
땅속에 호리가다(거푸집)를 파서 거기에 시멘트를 부어넣는 작업인데 포상 하나에 8개인가를 파야 하는데 일개중대에 48개를 파야했다.
오다가다 작업의 진척 도를 보니 지지 부진했다.
업자에게 물어 봤다. 왜 이리 작업의 진도가 나가지 않느냐고,
했더니 사람을 못 구해서 라고 했다.
하나 파는데 얼마를 주느냐 했더니 당시 돈으로 13000원을 준다고 했다.
그럼 우리가 파면 어떻겠느냐 했더니 아주 반색을 하며 노임은 똑 같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원을 동원해서 파기 시작했다.
힘들 좋은 애들이라 하루에 3-4개를 팠다. 당시 내 봉급(대위 4호봉)이 35,000원이니 하루에 내 한 달 봉급을 번 것이었다.
해서 10일 정도 파니 꽤 많은 돈이 모였다.
자고로 선비는 돈을 만지면 잡생각이 나서 안 된다.
해서 중대 선하에게 그날그날 입금을 확인하고 맡겼다.
나는 다만 보고를 받고 결재만 할 따름이었다.
거의 중대장의 일 년치 봉급이 모이고 일거리도 떨어져서 작업은 중단 되고 돈을 써야할 일만 남았다.
우선 하사관 숙소를 지었다.
남는 건 병력이니 벽돌 틀을 사서 시멘트를 사고 모래는 개울에서 파오고 문틀은 사오고, 나는 절대 돈을 만지지 않고 선하가 구입 지불하고 난 영수증만 확인 했다.
대원들도 작업 내용을 아니 병장들이 독려해서 작업 진도가 아주 빨랐다.
돼지를 잡고 축구공을 사오고 아주 우리 중대는 신이 났다.
각개의 중대가 분산 되어 있으니 대대나 타 중대에서는 아무도 우리 중대의 동정을 알수 없었다. 나도 대원들에게 보안을 당부했고, 중대 선하가 약간의 삥땅은 쳣겠지만 중대장이 안먹으니 별로 장난은 안한 것 같았다.
하사관 숙소가 완성되니 병들의 내무반이 아주 분위기가 좋아졌다. 특히 선임 수병들이......
아직 돈은 거의 반이 남았다. 작업을 계속해서 이발소를 지었다.
당시 이발병은 있었는데 이발소가 없어서 내무반 밖의 담장에 거울 하나 걸어놓고 거기서 이발을 했다.
장교들은 나가서 하고. 이건 군대 이발소가 아니였다. 말이 아니었다.
무슨 빈민촌도 그런 빈민촌이 없었다. 이발병들은 우수한데 .........
이발병이 이발소 건물을 설계하고 중대 선하가 이발병과 서울로 가서 이발 도구를 몽땅 사왔다.
이제 제법 사회 중간급 이발소 같았다. 이발병도 신나 하고......
헌데 호사다마라고 보안대서 누가 나왔다. 아마 내 생각에 하사관 같았다.
“중대장님은 병들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면서요?" 하고
"아차 이걸 생각 못했군!" 하고
그래도 정신 차리고( 그 당시만 해도 군대가 좀 멋이 있고 낭만이 좀 남아서) 개인 비리 착복이 아니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문제는 우리 선하가 잘 아니 거기 가서 물어 보시오." 했다.
하긴 걸려봐야 징역은 안 갈거고 전역이나 되겠지, 그 또한 바라던 바이고,
단기복무 해병학교 장교들이 두려워 할건 없었다.
어차피 군대 의무를 때우고 잠시 생활 하러 들어 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억울하게 김신조와 월남에 발목잡혀 있는 건데..........
몇 시간 후, 예의 그 보안대가 다시 와서
"이번일은 문제 삼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주의 하세요 아무리 개인 비리가 없다고 해도 전투력 감소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해서 고맙다고 했다.
중대 선하가 와서 사실대로 말하고 차비 몇 푼 줬다고 해서 잘 처리했다고 했다.
내가 돈 안만진게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도 생각하면 등이 써늘해 지는 대목이다.
사실 보안대가 왜 대대장에게 통보를 않했겠냐만 대대장이 나를 좀 좋아해서 문제 삼지 않은 모양이였다.
전역하면 양계장을 한다고 대대장실에 병아리를 갖다 놓고 먹이면서 나에게 묻기도 하고(나의 전공은 축산이니까)...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위병소에서 중대장님을 찾는다고 했다(독립 중대니 별도의 위병소가 있다, 근무자도 있다).
만나 봤더니 인천 자동차 학원에서 왔다고 했다.
중대장님은 부하들을 사랑한다고 소문이 났다며 사랑하는 부하들에게 사회에 나가 먹고 살게 해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싫다고 할 것인가.
말인즉 운전병들에게 사회 면허를 따게 해 주자는 이야기였다.
당시는 군대 면허증은 제대하면 휴지조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니까 운전병들은 운전들은 다 잘하니까 교육은 받을 것도 없고(당시는 몇 달간 교육을 받아야 시험을 볼수가 있었다.) 그리고 장기 교육을 받아야 구조학이 면제되었는데 교육 받은 걸로 해 줄 테니까 등록하고 시험을 보게 하고 시험을 보면 몽땅 책임지고 합격시켜 준다는 것이다.
물론 등록비는 전액 지불하고,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거니까,
그래서 중대장이 할 일은 무어냐고 물으니 해당인을 고향에 외박 또는 휴가를 보내서 필요한 서류(주민등록 등본 등)를 떼 오게 해 주시고 시험 보는 날 인천으로 외출을 시켜 주시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대장 협조 없이는 안 되는 일이였다.
알겠다고 하고 애들과 상의해서 지원자를 모아 보겠다고 하고 그 사람을 보내고 운전병(25명쯤)들을 모아놓고 물으니 전적으로 찬동하며 아주 적극적이었다.
운전병 아닌 애들도 하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날부터 연병장에 코스를 그려놓고 연습을 하고(매일 시동유가 차 한 대당 0.5가론이 나와 연료는 여유가 있었다.) 휴가 외박을 보내 준비를 하고 시험 당일에 아무래도 못 미더워 내가 직접 애들을 데리고 인천 자동차 학원을 갔다. 사고 칠가봐.
예의 그 모집인(아마 그 학원의 부원장이던가?)이 내게 오더니
“중대장님도 이참에 하나 하시지요? 무료로 해 드리고요 서류는 후에 구비하기로 하고요” 하는 것이다.
"에이 난 실기도 자신 없는데.........“ 하니
그 점 염려 마세요! 알아서 할게요! 하기에
그럼 알아서 해보슈 하고
필기 시험장에 들어 갔더니 감독은 경찰관이고 예의 모집인이 시험지를 들고 와서 혹 시험지가 잘못 프린트가 있으면 아리켜 주겠다고(당시는 프린트가 엉망이였다) 왔는데 경찰관과는 아주 친밀해 보였다. 내 앞에 오더니 뭘 하나 톡 던져 주는데 그게 문제의 해답이였다.
당연이 100점을 맞고 실기가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은 화물차로 코스를 통과 하는데 내 차례가 오니 예의 그 모집인이 쓰리쿼터 한 대를 끌고 왔다.
중대장님은 이걸로 합시다.
해서 올라 탔는데 별 희한한 차도 다 있더군.
난 평생 그런 차는 지금까지도 본적이 없다.
뭐냐하면 조수석과 운전석에 똑 같이 운전 장치가 있었다.
핸들, 클러치, 부래이크, 엑셀 등.
나직한 말로 중대장님 핸들에 손만 올려놓고 전방을 바라보고 가만히 있으세요, 내가 다 할게요. 하는 것이다.
나야 뭐 고개만 끄덕끄덕 할 수 밖에.
코스를 다 돌고 나니 합격 했다고 경광등이 번쩍번쩍 하드만 합격이란것이다.
그래서 내 면허증에 아직도 “72년 경기” 라고 생생하게 쓰여 있다. 그건 세월이 가고 주소가 변해도 변동이 없더군.
덕분에 아직도 나는 빠꾸(후진)로 하는 주차는 어둔하다.
한번 책상 앞에서 못 배우면 평생을 모르고 지나 간다드니......
그럭저럭 김포의 군대 생활에 재미도 들었는데 전역 희망자들은 전역원을 내라고 하고 또 심경의 변화로 '72년 2월에 전역원을 내고 허가가 되어 중대장직을 인계하고 대대본부에 대기하게 되였는데,
2중대 대원들이 목욕차(중대에는 목욕탕이 없었다) 포차 3대에 분승해서 대대본부에 왔다가 나를 보더니 목이 터져라고
“중대장님~~~!” 하고 소리소리 부르는데
“오 너희들이냐!” 하며 답하다 보니 눈물이 핑~돌아 아무도 없는 변소에 가서 실컨 울었다.
“아~! 내 쌔끼들아, 의리 없는 중대장은 혼자만 잘 살겠다고 빠져 나와 나는 간다.
잘들 있거라 ”
새로운 중대장은 더 잘 해줄 테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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