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발 대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일이다.
내가 왜, 어째서 청룡부대 선발대장(?)이 되어 호이안에 미군 진지를 인수 하게 되었나를,
군대 생활 한지는 겨우 3년도 채 안 되었지만 하도 많은 일들을 많이 겪고, 또 후배 기수가 너무 많이 올라와서 마치 고참 아닌 고참중위가 되었다.
'67년 가을(일자가 생각 안 난다) 월남의 츄라이에서 보병7중대에서 전방 관측장교로 7개월이나 빡빡 기고 운이 좋아 살아서 빠져 나오긴 했으나 육군 포병학교 위탁 교육도 받지 않은 탓에 갈만한 보직이 없어 빌빌거리고 있던 내게 대대장으로부터 이상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인사관도 아니고 대대장이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보고하지 말고, 완전 무장을 하고 전출준비를 완전히 하고 여단 본부 인사로 가서 신고하라는 것이다.
가서 명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여단본부 인사에 가서 신고 하니 스트롱빽(당시 미군들이 지어준 막사를 그렇게 불렀다)을 하나 지정해주면서 거기서 기거 하라고 한다. 거기엔 이미 중위 2명이 대기하고 있다.
기수를 따져 보니 새카만 후배였다 .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대대에서 가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정은 나와 같았다 모두들 영문도 모르고 그냥 가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아마 상당이 비밀적인 임무가 부여되는 모양 같아 매우 불안했다. 모두들 각자 무기를 휴대하여 완전무장까지 하고들 있다.
하루 이틀을 본부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자고 먹고 하는데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이 한 명 두 명 모여서 50여명이 되었다. 부대가 편재되니 내가 제일 상급자였다 즉 내가 대장인 것이다.
무슨 큰일이라고 도대체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고 여단인사에서 대원들 명단을 주며 오늘부터 내가 그 대원들의 책임자라는 것이다. 장교고 사병이고 생판 처음 보는 약 50여명의 지휘자가 된 것이다 ,
장교가 나를 포함해서 3명이고, 그래도 그땐 이미 제법 군대 생활에 익숙할 때라 2개 소대로 편성해서 명단을 넣어 편성표를 만들고 이를 각 중위들에게 맞기고 나는 중대장 같은 직책을 맡았다 .
이상한 것은 하사관이 거의 반 정도이고 중상사도 6-7명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또 각 대대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선발되어 온 것 같았다.
무전기가 2대 지급되고 식량과 탄약이 보급되고 공용화기까지 보급되어 이젠 완전한 전투단이 되었다.
여단 작전으로부터 3개의 주파수를 받고 츄라이 항구에서 탑재하여 다낭이라는 곳에 가서 이 주파수로 호출해서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다.
난 영어를 잘 못한다고 했더니 해병대 장교 시험 볼 때 영어시험은 안보고 들어왔느냐고 묻기에 보고 들어왔다니까 그럼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그냥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참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보병 중대에서 7개월을 빡빡 기던 생각을 하면 무엇인들 못할까, 겁나는 것도 없고 두렵지도 않았다.
일주일친가 식량도 배급받고 츄라이에서 배를 탔다. 잠깐 사이에 다낭을 갔는데 이건 아주 막막하기가 한이 없었다. 아래 대원들은 나만 믿고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나 대원들이나 무사태평이었다.
몸 다는 건 나밖에 없었다. 지휘관은 외롭단 말이 실감이 났다.
다낭 항구에 도착하니 부산항만은 못하지만 꽤 큰 항구라 아름답고 평온하기가 그만이고, 마불마운틴이라는 대리석 산을 배경으로 정말 아름다운 항구였다.
부두는 분주하게 돌아간다.
마침 우리나라의 기업 한진에서 부두 하역작업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지게차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더니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파월되는 비무장 군인들만 보았지 우리같이 완전 무장을 한 청룡부대원은 처음 본다는 것이다.
나도 영문을 모르고 왔지만 어렴풋이 우리 부대가 이곳으로 옮겨오는데 우리가 그 선발대인 것은 감을 잡았던 터라, 좀 아는 체를 하려고 마음먹고, 우리가 이곳으로 진주 한다고 내 딴에 뭐 많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했더니 아주 반가워 죽겠다는 것이다. 정세가 불안한 곳에 돈 벌러 왔는데 위험하여 겁이나 죽겠는데 귀신잡는 해병대 1개 여단이 진주해 온다니 이건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것같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후일에 그들이 왜 그처럼 반가워하는지를 알았다. 아주 먼 후일('68년)에 다낭시가 구정 공세 때 무법천지가 됐을 때 여단에서 1개 대대를 보내 한국인 회사와 한국사람들을 철저히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이야기 하더니 지게차로 오렌지를 한 빠레트 가지고 와서 대여섯 명이 한 상자씩 우리배 위로 던지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많이 던졌든지 애들이 오렌지를 곤봉에 가득씩 담고 넣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전령들은 또 내걸 챙겨놓기가 바쁘고, 오렌지라는 걸 처음 먹는 사람도 있고, 전방에서 빡빡 기던 쫄따구들이 어디 맛이나 봤겠나. 생과일은 A래이션을 먹는 부대에게만 공급이 되었다.
얼마나 잘 먹는지 한꺼번에 40-50개를 먹은 사람도 있었다. 대원들이 많지 않아선지 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지경까지 오고 또 애들이 잘 먹으니 일꾼들도 신이 나서 계속 많이 던져 주었다. 기술자들에게 물어 봤다. “이렇게 해도 되냐고”
했더니 대답 왈 위병소 즉 정문에서 밀반출 되는 것만 통제하지 이 부두 안에서 없어지는 건 아무 말 한한다고 했다. 오렌지를 계속해서 너무 많이 먹으면 손바닥이 노랗게 변하는 것도 그때 거기서 처음 알았다.
라디오를 켜고 적어준 주파수로 접촉을 하려고 시도했다.
짧은 영어에 사람을 안보고 통화를 하려니 무척 힘들었다. 마주 보고 이야기해야 바디랭귀지도 하고 손짓발짓할 텐데 그게 안 되니 아주 힘들고 또 몇 마디하면
“누구냐, 이 주파수를 어떻게 알았냐.” 하며 쑥 들어가 버리고 해서 다음 주파수로 하고 하기를 세 번째 반복하니 그제야 친절히 안내를 한다.
결과는 상대방은 미 해병대이고 진지와 물품들을 인계하고 자기들은 적정이 많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단다. 지금은 바쁘니 기다리고 있으면 차를 보낼 테니 그때 그 안내장교의 지시에 따라 호이안으로 이동하란다.
우리야 바쁠 게 뭐 있어, 배에서 잠을 자니 안전도 좋고 잠자리 침대도 좋고 식사도 먹을 만하고 아주 팔자가 늘어졌다. 그들이 늦게 올수록 좋은 것이다.
2-3일 놀고 있으니 좀이 쑤셨다 .
대원들은 놀리면 꼭 사고가 나기 마련이라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인원 점검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원 두 명이 빈다. 없어진 것이다.
정신이 아찔했다. 책임감 깊은 해병대장교가 자기부하 대원 두 명을 전쟁터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리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소대장들에게 개지랄을 떨고 따지고 따지니 없어진 건 오늘이고 한두 시간 전만해도 있었다는 거였다.
찾으로 가야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병대에서 장교가 자기 부하 두 명을 영문도 모르고 잃어버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애들 부모들에게나, 상급지휘관들에게나. 무엇으로 어떻게 해명할 수가 있나, 또 나 자신이 이건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해병대 장교에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 있었냐?” 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하늘이 깜깜하고 천지가 아득하였다. 당장 현 시점에서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상급부서도 없는 마당에, 그것도 난생 처음 와 보는 생소한 곳에서, 대책이 무대책이지만, 그래도 무슨 수를 쓰서라도 찾아야 한다.
나 혼자서, 내가 스스로 찾아다가 원상복귀 시켜야 한다.
생명을 걸고라도 찾아야 한다. 대원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한 후 전우들을 찾으로 가는 지원자를 모집했더니 내 연설이 훌륭해서인지 해병대의 의리가 강해서인진 몰라도 하여간 꼴통같이 생기고 또 믿음직하게 생긴 7명이 선뜩 지원을 했다. 그들 중 고르고 골라 하사 한 명을 포함해서 4명으로 탐색조를 편성했다.
후배장교들이 자기들이 간다고 나서는 걸 미덥지도 않고 또 이 사건은 내 책임이고 해서 내가 가기로 작심하고 남은 장교들 중 선임 장교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나 스스로 탐색조장이 되여 선택된 대원들을 무장시켰다.
방탄조끼에 M16, 유탄발사기, 일회용 RKT, 수류탄까지 철저히 무장시켜 길을 나섰다. 차도 없고, 걸어서 나섰다. 참,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미친 짓이다 ,
뭐 용감한 것도 정도 문제지........
위병소에서 미 해병에게 손짓을 포함한 유창(?)한 영어로 물어보니 나간 지 2시간쯤 된다는 것이다.
참 녀석들은 대단한 녀석들이다.
다른 병들은 미군 헌병위병이 지키고 있으니 감히 그곳을 통과 하지 못하는데 녀석들은 위병들과 우리들은 관계가 없다는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처음 한국 해병이 다낭에 어슬렁 거리고 다니니, 누가 터치 할 사람이 없다. 미 육군 헌병이 터치하겠나 미 해병 헌병이 터치하겠나, 한국해병의 헌병은 아예 없고……. 월남 경찰이나 헌병은 감히 말도 못 부치고.......
가다가 월남 경찰을 만나서 물어보니 저기로 갔다는 것이다. 계속 추적하니 바리게이트가 쳐 있고 철조망이 쳐 있는 곳까지 왔는데 한국해병 “띠꾼륙진 따이한(水軍陸戰隊 大韓)”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이 이상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가지 마라는 것이다. 감히 한국해병대 장교에게……. 월남 경찰주제에, 주제넘게........, 혼을 내주며 바리게이트를 열라고 명령하여 아리켜 주는 대로 갔다.
창녀촌으로......, 4명의 부하들을 조설형으로 세우고 난 가운데 들어가서 전진 전진하여 목적지에 가니 우리가 목숨 걸고 찾아 나선 두 놈들이 남대문 단추를 채우며 히히거리며 기어 나온다. 지옥에서 할아버지, 아니 부처님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운 만남이지만, 한편으론 꼭지가 돌 정도로 화가 치민다.
불문곡직 아구창이 날아가고, 꼬라박아를 시키고, 개지랄을 쳤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는 못했다. 모두들 총에다 실탄까지 모두 가지고 있으니,
이제는 대원이 6명, 나까지 7명이다. 사실 똑똑한(?) 장교가 지휘하는 한국해병 7명이면 이곳 월남에서 사실 겁날게 별로 없다. 적어도 한낮에는.
일단 대원을 찾고 나니 안심이 됐다.
헌데 데리고 간 4명중 한 놈이 하는 말이 “중대장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갑니까? 몸좀 풀고 갑시다.” 하는 것이다.
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하기야 한편 생각하니 쫄따구들이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나, 하고 생각하니 측은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잘못 하다간 녀석들과 구멍동서가 되게 생겼다. ”중대장 형님“하고 불리운다면 부대가 개판이 되겠지...., 허지만, 나를 믿고 목숨을 맡기고 따라온 대원들의 청을 무조건 거부 할 수도 없는 일, 해서 절충안을 생각했다. 난 빠지고 너희들만 하는 선에서 허락했다.
나도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생각은 꿀떡 같았지만, 부대기율도 그렇고, 또 영남의 선비의 후예인 내가 차마 졸병들 앞에서 아무리 마음이 꿀떡 같아도 그 짓은 못하겠고......... 해서 먼저 하고 나온 두 놈과 내가, 나중 데리고 온 네놈의 그 짓거리를 호위하는 일을 하게 생겼다.
참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네 명이 창녀방에 들어가기 전 단단히 주의를 준다. 총은 절대 누구에게도 아끼지 말고, 실탄을 장진하여 꼭 옆에 두고 섹스를 하고, 꼭 콘돔을 사용하고, 만약에 여차하면 소리를 질러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으로 유능한 지휘관이였다.
볼일 볼 동안 3명이 경계를 철저이 하고 기다렸다가 마치고 나오는 순서대로 한 명씩 배치를 붙이고 다 나온 다음 모두를 모아놓고,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은 절대로 발설치 마라고 주의를 단단히 줬다. 만약 발설 자는 빳다 20대 라고 엄포를 잊지 않았다.
만약 소문나서 전 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 그걸 누가 통제할 수 있겠는가.
단단히 주의를 받은 탓에 배에 돌아와서 시치미들을 뚝 떼었고, 아무 말썽이 없었다. 아마 내가 하지 않은게 꽤 감동적이였던것 같다.
몇 일후 미 해병대에서 트럭이 와서 우리는 호이안으로 이동했다.
스트롱빽이라는 베니다로 만든 건물 6동이 우리에게 할당되고 며칠 휴식후 경계지역이 배당되고 해서 차차 자리가 잡혔다. 우리가 머물던곳은 후에 포병대대가 된 곳이다.
헌데 이상한 것은 근 30일 동안 청룡에서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내가 아주 미더웠던 모양이었든가? 아님 이동준비에 바빠서 인가? 아님 아예 잊어 먹었던지, .., 설마, 하루하루 지나니 그런 대로 재미도 생기고 또 미 해병은 한국해병을 매우 좋아해서 밤이 되면 아주 야시장이 서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청룡뺏지, 해병대 위장복, 빡클 뭐 그런 거고......
추수감사절인 모양이었다.
같은 울타리 안의 미해병 중대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나만 받은 게 아니라 전 대원이 초청을 받은 것이다.
C-Ration만 먹다가 미군들에게 식사에 초대를 받으니 그것도 대원들 전체 와,
난감했다. 한식도 제대로 먹을 줄 모르는 깡통들을 데리고 외국군 장교가 초대하는 식사에 갈려니 지휘자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복장도 그렇고, 잘못하면 국제 망신이고.
급기야 미국식사 예절에 통달(?)한 내가 식사 예절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옆 부대에 갔다.
과연 세계에서 제일 부자나라의 군대라 우리들과는 벌써 분위기와 차원이 달랐다. 민간인 요리사들이 위생복을 입고 테이블보를 친 테이블에 진수성찬이 준비 되어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중대장과 싸전의 안내에 점잖게 식사를 하는데 영 대원들의 행동에 전 신경이 쓰였다. 우리 대원들 사이사이에 미 해병대원들이 앉았는데 서로 우리 대원들 옆에 앉을려고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원들도 나름대로 선발된 대원들이라 약간의 영어도 하고 해서 별 탈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됐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
추수감사절마다 칠면조가 나오는데 아무도 그것을 좋아라고 먹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옛날 개척시대에 굶주렸을 때 유럽에는 없는 칠면조(체중이 10Kg이상)를 보니 환장을 하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 했을 것 같았다고, 중대장의 말,
Nut라고 호두 땅콩 등 우리가 정월 보름에 먹는 견과류 같은 것도 나오고,
자기들은 머지않아 적정이 더 많은 “케손” “후에” 등지로 나간다고 냉장고나 선풍기 같은 것을 가져갈 형편이 못되니 필요하면 싸게 줄 테니 사라는 것이다. 젠장 줄려면 그냥주지 150불 받는 놈(그나마 장교가 그렇고 대원들은 약 50불정도)이 무슨 돈이 있나 그것도 의무송금하고 나면 맥주 값도 모자란데…….
슬금슬금 미군은 이동하고 부대에 남은 물건들을 인수하는데 대형 냉장고(부대 식당용) 대형TV(역시 공용)등 쎈드백, 뭐 장벽자재 수백 가지의 물품을 하나하나 헤아려서 보급선하와 나에게 서명을 받고 인수인계 했는데........ 아마 군원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헌데 다음에 확인해보니 한 빠렛트의 물건이 장부에 없는 물건이 있고 자질구레한 남는 물건이 많이 있었다, 대원들을 시켜서 일단 내 숙소로 옮겼다.
학인해보니 한 빠렛트의 물건은 개인용 모기장이였다. 그 수량이 엄청나 감히 개인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양이였다. 차곡차곡 접어서 꽉 눌러놓은게 수백 장이었다. 그 철저한 미군이 아마 실수로 누락한 모양이었다. 장부에 있고 내가 서명해준 물품은 후에 청룡보급관에게 인계해 줘야 하는 거고 장부에 없는 물품은 내 것이였다.
사실 후에 안 이야기지만 그때 전부 싹 팔아먹어도 말썽도 안날 뻔했다.
장부에 없는 모든 물품을 파악하니 지금 기억나는 건 예의 모기장과 미제 양말이 수백 켤래였다.
양말은 대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예의 모기장은 우선 병들에게는 일인당 한 장씩, 하사에게 두 장씩 그리고 중상사와 장교에게 석장씩 주고 나머지는 내방에 짱박았다. 당시 나는 30평쯤 되는 스트롱빽 하나를 혼자 쓰고 있었다. 아주 호강을 했다.
내 군 생활 중 그때가 가장 호강한때 인 것 같았다. 선임하사와 상의해서 팔아먹어야겠는데 당시 월남에서는 미제 모기장이 대인기였다. 선하왈 모기장 하나에 3~5불을 받는다니 그 돈이 도대체 얼마냐!
처음 온 곳이지만 수단 좋은 보급병과 상사 왈, 월남 군인들에게 몇 푼주고 군용차를 하나 빌리고 다낭 암시장에 가서 팔아 온단다. 장교가 체면상 같이 갈 수도 없고 500장이나 되는 모기장을 싣고 갔다.
해병대 헌병도 없고 보안대도 없고 아주 사업하기엔 고만인데 나는 길을 모르고 선하에게 맡겼더니 500불을 가져왔다. 당시 내 입장에서 500불은 참으로 큰 돈이었다.
말로는 차 빌리고 월남 군인에게 안내비 주고 어쩌고 하고 저는 한 푼도 안 먹었단다. 속이 환이 들려다 보이는 소리지……. 한 푼도 안 먹었다면 내가 나누어 줘야겠지만 한 푼도 안줬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 걸로 봐서 나보다 더 챙긴 것 같았다.
그러나 쿠폰도 없고 PX카드도 없는 돈이라 별 쓸모도 없고 한국으로 송금도 할 수 없고, 해서 후일에 다낭과 사이공가서 참 재미있게 잘 썼다.
이제 미군이 다 이동하고 그 넓은 곳(후일 포병대대 자리)을 세계 최강의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경비하고 있던 곳을, 아무리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원이라 해도 달랑 50명이 방어(?)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다행이 장벽시설이나 지뢰, 크래모아 등은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철저히 인계했다. 다행인 것은 미 해병대가 이동하며 우리가 측은해 보였던지 지금까지 자기들이 지원받던 미 육군포병의 화력지원 체계를 인계해 주고 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우리 해병대포병 사거리밖, 그러니까 우리 포병의 엄호외의 지역에 나 혼자 지원부대가 전혀 없이 상급부대와는 수백리 떨어진 곳에 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두려움을 표시하면 밑의 대원들은 누굴 믿고 살겠는가를 생각하니 또 다른 용기가 생긴다.
그래도 그땐 그저 그런가 하고 겁이 나지도 않고 내가 태연하게 방어 계획을 수립하고 공용화기를 배치하고 초소의 위치를 정하고 화집점을 점검하며 돌아다니니 대원들도 나를 뭣같이 믿고 별 동요하지도 않고 잘 따르며 그런가보다 했다. 당시 내 소신은 우린 모두 연발 자동무기를 휴대하고 있으니 정신만 잘 차린다면 방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공방의 원칙에 따라 3배의 적은 방어할 수 있겠고, 무기와 화력의 우세에 있으니 적어도 10배의 적은 방어격퇴 할 자신이 있었다. 참 철없는 행동이였고 하기야 걱정하고 불안해 봐야 또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넓은 지역을 난 밤에 야간 순찰을 돌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해서 저녁 야간 근무 나가기 전에 항상 전 대원을 집합시켜 훈시한다' “근무자는 일단 근무에 나가면 졸던지, 자던지, 마음대로 해라 순찰은 없다. 지금 우리 입장은 일단 상황이 붙으면 누구도 지원 올 수도 없고 알다시피 병력도 없다. 철저히 근무를 서서 먼 거리에서 적을 먼저 발견하는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당장은 LMG와 RKT 그리고 크래모아 뿐이다. 이는 먼 거리에서 우리가 먼저 적을 발견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라고 비장한 훈시를 한다.
“밤 4시까지만 버티면 미군 헬기가 지원 나온다.” 라는 훈시는 잊지 않았다.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철없는 대원들도 마음이 숙연해지고 각오를 단단히 하는게 전해져 온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하고 미친 짓이였다.
하루는 저녁에 어떤 미 해병대 중위가 우리 초병의 안내를 받아 내방에 왔다. 자기는 Tank중대 소대장이라는데 도무지 Tank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로 쓰고서야 겨우 통했다.
Hearing 의 중요성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사연인즉 자기들은 7th Cavalry(제7기병대대)인데 독립작전을 수행하고 귀대하는 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같이 지내자는 요지였다(근데 탱크만 있고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즉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유하고 싶으니 아량을 바란다"는 거였다. 불감청이언 고소원이라고 허허 벌판 적지에 탱크가 네 대나 같이 자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탱크 한 대면 화력이 얼마냐, 그것도 세계최강의 미 해병대인데 전투지구에서, 좋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며 뭘 좀 놓고 갔다. 콜라인가 뭐 그런거 였다. 그들도 들판에서 달랑 탱크 네 대 가지고 적지에서 숙영하기가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한참 있다가 밤늦게 그 미 해병장교가 무슨 종이를 들고 왔다.
자기들 전차들의 위치와 화력 배치도라는 것이다.
우리의 방어계획과 맞추어 보자는 것이다.
나야 포병장교이고 전투경험이 많고 또 미국식의 교육을 받은 터라 그런 건 철저히 잘 알아서 우리 화력망과 합쳐서 보완했다.
미군들은 참으로 놀라운 군대 같았다.
아무도 감독하는 사람도 없는데 같은 계급의 후진국 장교에게 지휘권을 맞기고 스스로 지휘를 받겠다는데 정말 놀랐다. 불과 하룻밤이지만. 하기야 월남에서 SOP는 연합군이 합동으로 작전을 할 땐 상급자가 지휘를 한다고 돼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상급자도 아니고, 말하자면 기성부대에 파견 나온 형식이었다.
청룡이 오기전의 호이안 일대는 참으로 평화스러웠다.
낮에는 월남인들과 놀고 밤에는 경계하고 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본부 대대가 오면 본부대대 애들이 인수품과 인수서를 갖고 빠져 나가고......,
근무대대가 오면 근무대대 애들이 빠져나가고 이런 식으로 대원들이 흩어지고 나는 포병대대에 그냥 앉은 채로 포병대대와 합류 했다.
포병이 들어오니 쌘드백으로 벙커를 짓고 나같이 스트롱빽에 자는 놈은 정신이상자 정도로 보게 됐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근데 미군은 전부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포탄이나 떨어지고 비상이나 걸려야 벙커로 들어가고 했다. 뭐 게네들이 옳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었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그 후 보병대대, 중대가 와서 작전을 하고 따라서 월남사람들이 많이 죽고 하니 그 순하던 월남사람들의 눈에 독기가 서리는걸 보았다.
그 후 보병 동기생들이 자기네 중대가 먼저 왔다 아니 우리중대가 먼저 왔다 하며 언쟁하는걸 보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할 말도 없고, 내가 이런 말 하면 누가 믿어 주겠나, 심지어 내 복무기록에도 흔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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