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숫탉

해병대 이야기

머린코341(mc341) 2015. 1. 4. 15:13

해병대 이야기

 

사람들은 해병대에 관하여 단편적으로 밖에 접할 기회가 없어 그 지식 또한 단편적이고 편향적인 분들이 많아 조금만이나마 바로 잡아 볼까하고 이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내가 뭐 해병대 사령부와 어떤 연관이 있는 사람은 아니며 또한 사주를 받은 바도 없다는 걸 밝혀 둔다.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가장 쉬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원래 해병대란 존재는 옛날 함포가 실용화되기 전 배와 배가 싸우는 해전에서 마지막에 선원들이 창검을 들고 적선에 돌진해서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정할 때부터 그 필요성이 생겼다.

 

일이 그렇게 되다보니 전투에서 비록 승리를 했을 경우에도 배를 운영하든 기간 수병들이 많이 죽으면 그 당시의 함선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범선이기 때문에 배의 운영이 불가능해서 회항조차 어려울 때가 많이 생겼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선에 돌격하는 용감하고 백병전을 전문으로 하는 강한 병력을 별도로 태우고 다닐 필요가 생겨서 태어난 부대가 바로 해병대이다.

 

세계의 한다는 많은 국가들은 해병대를 거의 다 가지고 있지만 그 형태는 가지각색이다.

 

어떤 나라는 독립적인 군으로 있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나라는 해군 내에 육전대로서, 아님 육군의 상륙부대로서, 그것도 아니면 특전대의 한 파트로서, 하여간 다양한 형태이지만은 바다가 있고 국력이 어느 정도 강한 나라는 모두 상륙군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우리 해병대와도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어 살펴

보자.

 

미국은 독립 전쟁 때 지형상 함선으로 병력을 이동하거나 적전 상륙을 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따라서 연안해군(해병대)이 대양해군보다 먼저 생긴 아주 드문 예다.

 

우리나라는 해병대의 효시라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많이 격침시키니(당시의 해전은 거의 연안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왜군의 수병들이 상륙하여 섬이나 연안의 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상륙 추격하여 왜병을 섬멸하기 위해 별도의 육전대를 싣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지만은 안타깝게도 우리 해병대는 그 찬란하고 명예로운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나라가 망해 軍과 武의 맥이 끊어 졌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는 48년 여순, 순천 반란사건(지금은 표현을 달리 하지만)때 해안으로 상륙하는 지상군의 공격이 효과적이라는 필요성을 통감한 해군의 선각자들은 해병대(상륙군)의 필요성을 예감하고 상륙군의 창설 준비를 서두르다 결국 49년 4월에 해병대가 탄생하게 된다.

 

당시 해군의 간부들 중 신현준 김성은 같은 유능한 장교들(그들은 아마 만군출신이거나, 일본 해군의 육전대 출신들인 것 같았다)에 의해 조직 훈련되었다.

 

일본 해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매우 강한 군대였던 것 같았다.

 

지금도 해병대에 남아 있는 좋지 못한 관습인 빳다 라든지 기합은 일본 육전대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6.25전에 이미 해병대는 창설이 되었고 사병들은 강한 장교들 밑에 강한 훈련을 받았으며 6.25때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실전경험이 있는 유일한 부대였다.

 

실전 경험이라 함은 여순 순천 반란사건의 진압, 또 제주도의 4.3반란사건의 진압 등이었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대내의 파워나 예산은 국방부의 주력인 육군이 독점하고 있어서 장비면에서는 아주 열악하여 일본군들이 쓰다 버린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해병대는 창설만 되었지 본부나 지원부서가 따로 없고 사령부 인사부터 신병훈련소 장교 하사관의 양성기관까지 함께 다니고 주둔하는 아주 우스운 별동대였다.

 

제주도의 일들이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제주도 4.3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때 반란 세력들이 경찰과 군에 쫓기는 정황이 되니 양민으로 가장하여 경찰과 군에 총격을 가하여 군과 경찰에서는 과잉대응을 하여 다수의 양민이 희생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옥석구분이 안 되고 제주도 젊은이들은 걸리면 모두 죽게 생겼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살려면 군이나 경찰에 입대해야 하게 생겼는데,

 

군인이나 경찰이 되려면 그 모집절차에 따라야 하고 말단 군부대나 일선 경찰서는 모집권한도 없어 그것도 불가능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해병대에 대거 입대했다. 해병대는 사령부 인사까지 같이 다니니 그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현지 임용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어떤 고등학교는 담임선생의 인솔 하에 한 학급 전체가 입대한 예도 있었고. 또 다른 이야기로 한 집안이 몽땅(형 아우 아재비 조카 등) 들어온 예도 있고. 그때 그것을 인연으로 지금도 해병대엔 제주도 출신들이 다수 있다. 또 제주대학교의 ROTC 출신들은 해병대 장교가 되기도 한다.

 

6.25때도 북괴군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아버지가 인민재판에 걸려 죽창에 찔려 죽는 것을 목격한 원한에 치를 떨던 젊은이들이 이를 악물고 전투중인 해병대에 자진 입대한 일들이 많았었다. 다른 군과 달리 현지에서 정규군(견습 수병)으로 편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육군의 학도병 같이 군번 없이 죽어간 해병대는 거의 없다는게 자랑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섞여있는 해병대가 얼마나 강인했겠는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각설하고 해병대가 생길 때에는 그렇게 미약하게(1개 대대) 생겼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갑자기 성장팽창하게 되였는가? (6.25가 끝날 무렵 1개 사단 ― 육군의 두 배가 넘는 21,000명에 전차 비행기 장갑차 까지 가진 거대한 사단이 됐다―)에 대해서 알아보자

 

6.25가 터지고 적들이 대구 포항 군산 장항까지 남하 했을 때 해병대는 7월 제주도에서 첫 출동을 하여 장항지구 전투에서 적 사살 300명의 전과를 올렸다.

 

다른 국군들같이 밀려오는 적을 맞아 피동적으로 전투에 휘말린 게 아니라 작전계획을 가지고 작명에 의해 출전하여 매복하여 기습한 결과였다.

 

야간에 99식 소총(단발소총)을 가진 부대가 연발소총(따발총)을 가지고 전차까지 가진 부대를 지근거리(약 20m)까지 접근시켜 일시에 타격을 가하는 고도의 정예병이 아니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전투로, 당시 해병대의 훈련 정도를 알 수 있다. 아군의 첫 승리로 대통령이 감탄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때부터 해병대의 장래는 보장되였다.

 

그 후 수많은 전투에서 해병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부산을 지킨 통영전투(인민군 6사단 7사단을 일개 대대의 병력으로 격퇴하여 귀신잡는 해병의 칭호를 획득한 전투) 펀치볼 전투,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 전투 등, 한국 육군이 패한 전장, 미 육군이 밀린 전투, 심지어는 세계 최강의 미 해병이 감당하지 못한 전장을 인수받아 성공한 예도 많이 있었다.

 

통영 전투, 진동리 전투, 김일성고지 전투, 펀치볼. 인천상륙작전, 수도탈환작전, 도솔산 등 거의 6.25 중 유일하게 승리하는 부대가 됐다. 1.4후퇴 후 재점령한 수도 서울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부터 서부전선에서 끝까지 진지를 고수해 서울을 지킨 일은 무슨 말로 찬사를 보내도 넘치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 해병"이란 휘호를 받고(김일성 고지전투의 승리에 즈음하여) 통영전투에서 일개 대대로 2개 사단을 저지시키는 것을 보고는 보고 외국 신문기자들로부터 "Ghost Marine"-악귀와 같은 해병대-(후일에 귀신 잡는 해병대란 단어의 근거가 된 단어)이란 칭호를 받기도 했었다.

 

서부전선에서 휴전 직전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서울을 재점령 하려고 할 때 한국육군 미 해병대등이 감당 못한 지역을 최후까지 사수하여 휴전때 까지 악착같이 지켜내서 수도 서울의 재점령을 막아낸 일등은 아무리 과장해도 넘치지 않는 전과이다.

 

월남 파병 때는(그때까지만 해도 6.25를 거친 고급장교나 고급하사관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잘 훈련된 부대원과 장비면에서도 엔간히 갖춘 부대라 그 기민함과 전투력에 세계가 놀랐다. 한 불란서 신문기자는 늪지대에서 뛰어 돌격하는 부대는 처음 본다고 했다.

 

월남에서 해병대는 한국 역사상 전투부대로서는 처음으로 파병 되였고 진지를 점령, 구축하고 평정해서 맹호부대에 인계하고 또 다시 개척하여 백마에 인계하고 추라이를 미 육군에 인계하고 호이안에서 철수했다.

 

맹호나 백마는 인계받은 지역을 평정하다가 거기서 철수했고,...........

 

새로운 지역을 평정 개척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희생이 많은가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고 할 정도이다.

 

월남에서 크고 많은 전과 중 짜빈동 전투라는 게 있는데 그 개요는 우리 해병의 증강된 보병 1개 중대가 적 1개 사단(월맹정규군 제2사단의 2개 연대)의 공격을 무난히 방어하고 오히려 적 2개 연대를 섬멸시킨 보기 드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월맹군 2사단의 단대호는 2년간 사라졌었다.

 

이 전투에서 해병대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2개연대의 주공을 받은 2소대장은 2선으로 철수를 중대장에게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1선의 사수를 엄명했다.

 

그러나 2개 연대의 주공을 받은 제2소대는 2선으로 후퇴하여 싸웠고 전투는 승리로 끝이 났다.

 

이쯤 되면 대개는 2소대장의 행위는 덮어지고 훈장 정도 받는 게 통상이지만 해병대는 그렇지 않다.

 

전투중 중대 전술망은 여단 상황실에서도 청취 가능함으로 제2소대장은 전시 작전명령 불복죄(무시무시한 죄목, 군에서 가장 무서운 죄목)로 기소됐다. 또 중대가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전 중대원이 일계급 특진을 했는데 단 장교는 제외됐다. 이런게 해병대의 전통이다.

 

지난 이야기는 이쯤하고 현 해병대의 모습을 이야기 해 보자.

 

원래 해병대는 전략기동 타격대이다. 이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허나 우리나라에는 일개 사단이 김포반도와 이북 5개 도서에 배치되어 휴전선을 방어하는 방어군이다.

 

이는 해병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어느나라나 해병대는 공격군이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나 하면 휴전직전 영토와 거점을 서로 좀 더 확보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해병대에게 이상한 명령이 하달됐다. 전 병력을 철수하여 섬이란 섬은 가능한 한 많이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전쟁을 많이 해본 미군의 경험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즉 그들은 휴전이후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는 유엔 해군의 지원을 받아 북쪽에 있는 모든 섬을 확보했는데 그때 확보한 섬들이 이북 5개 도서와 원산 앞바다의 두 개의 섬과 또 압록강 하구의 몇 개의 섬들이였는데 원산 앞바다의 섬들은 뺏고 뺏기기를 여러 번 해서 많은 우리 해병대원이 전사 했었다.

 

휴전회담으로 이북5개 도서는 우리가 점령하게 되고 압록강 어구의 섬들과 원산 앞바다의 섬들은 이북에 양도하게 되어 그 섬을 점령한 부대는 진지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철수하란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그때 거기서 철수한 한 노해병이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내줄걸. 왜 그 많은 전우들의 생명을 바치게 했느냐"며 통곡하는 글을..........

 

그러나 군인은 정치적으로 결정된 일을 복종하는게 도리이다

 

그래서 당시 서해 5개 도서를 점령하고 김포반도에서 수도방어를 위해 김포반도를 점령한 해병대가 그냥 오늘날까지 눌러 앉아 있는 것이다.

 

월남전에 참전하기전의 우리 해병대는 전체 전투병력이 1개 사단이었다. 그 중 1개 연대를 여단으로 편성하여 김포와 5개 도서방어에 붙어있고 2개연대는 -사단으로 편성되어 포항에 주둔하여 전략 기동타격대로서 역할을 했었다.

 

월남에 참전하기 위해 청룡여단을 창설 증편하여 이는 국군의 실링에서 제외하여 월남에 진주하고, 일개 연대를 증편하여 포항의 사단도 원래 사단으로 재편성이 되였다.

 

월남전이 끝이 나고 청룡이 철수하여 김포여단이 사단으로 증편 되었다.

 

그러니까 해병대는 2개 Full T/O(풀 티오)의 사단이 된 셈이다. 외관상으로 해병대는 2개 사단의 전투병력과 사령부, 교육기지, 포항기지 등 지원부서가 있다. 이게 얼마 전 해군에 통합되기 전의 우리 해병의 전부였다.

그 임무는 무엇인가?

 

김포의 방어부대는 그 모양이나 임무가 육군과 거의 같다.

 

문제는 포항에 있는 사단이다. 이는 육군과 같은 지상군이지만, 그 임무나 훈련이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 지상군 중 책임방어지역을 가지지 않은 유일한, 또 상륙 정규전을 할 수 있는 부대가 포항에 있는 해병 제1상륙사단이다.

 

그리고 그 사단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시설도 그 사단의 소유가 아니다(전투장비나 무기를 제외하고). 이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 임무가 180도 다른 포항기지 사령부의 재산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근무할 당시는 그랬다). 가령 사단 장병의 숙소에 유리창이 하나 깨여졌다고 해도 사단공병대에서 보수하는 게 아니고 기지사령부 영선대에서 보수해 주는 식이다.

 

이는 유사시 빠른 출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누구에게 인계할 필요없이 그냥 출동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물건과 장비를 배에 실어보는 훈련을 한다(이를 탑재 훈련이라 한다).

 

따라서 부대의 모든 물건에는 휴대품이냐 잔치품(안 가져가는 물건)이냐 하는 딱지가 붙어있고 휴대품이면 몇 번째 휴대하느냐가 적혀 붙어 있다.

 

맡은 방어지역이 없고 모든 시설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없고 할 일이 없으므로 포항의 1개사단의 막사는 학교같이 모든 건물이 잘 정돈되어 있다. 뭐 막사를 고치거나(육군 전방부대 같이) 도랑을 파고 사계청소를 하고 심지어는 영농작업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직 교육과 훈련 그리고 이의 숙달만이 있을 다름이다.

 

학교같이 교육계획표가 붙어 있고 아침8시에 학과출장을 해서 12시에 점심먹이고 오후5시까지 하루 5시간을 토요일 일요일 수요일(수요일 오후는 대한민국이 모두 체육 시간이다)을 빼고 매일같이 교육이다.

 

한 달에 한번 중대전술시험, 3개월에 한번 대대시험, 6개월에 한번 연대훈련시험, 1년에 한번 사단 전술시험, 이런 식이니 병사들은 중대 훈련 때도 참가 연대 때도 참가.......... 하니 병사들의 훈련은 참으로 많고 각자의 임무에 숙달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실탄 사격도 많고 전차나 포병훈련도 많이 해야 하고 또 사단의 병력도 육군보다 많고 하니 해병대 1개사단, 전략 기동군을 유지 운영하는데는 육군 보병사단 몇 개의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해병대는 신병훈련기간은 육군과 같아졌지만 실무에서 계속 훈련 교육을 받으니 자연 강군이 된다.

 

포항사단에는 수색중대라는게 있다.

 

육군의 어느 사단이나 수색대는 모두 있게 마련인데 뭘 그리 대단하냐 라고 묻겠지만 상륙사단의 수색대는 그 임무가 엄청나다.

 

육군 보병의 수색대는 본대의 몇 키로 앞서 가면서 정찰하는 게 그 임무지만 상륙군의 수색대는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상륙지점이 정해지면 작전이 벌어지기 며칠 혹은 몇 달 전에 그 지점을 수색정찰해야 한다.

 

흔히들 해군의 UDT를 엄청난 부대라 칭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하게 편제된 부대라 그에 맞게 훈련도 훨씬 더 많이 한다.

 

즉 해군의 UDT는 만조시 수면아래를 정찰하여 함선이 접안하기 좋게 장애물을 폭파하는 게 임무지만 해병수색대는 해수면으로 부터 소화기 사정거리(500m) 이내의 장애물과 화기 등 적정을 파악 정찰하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들은 UDT의 훈련은 물론이고 공수훈련도 마친 사람들이다. 정말 해병중의 해병이라 할 수 있다.

 

해병대 내에서는 그 어려운 부서에 서로 갈려고 경쟁이 치열해 웬만한 체력이나 끈기로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해병대 내에서 그들은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포항에 해병 1개사단이 주둔하고 있고 이 또한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니 북에서는 자연 이를 경계하며(6.25때 해병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해안방어를 위해 북한군 1/3을 해안에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공은 덮어두고 경제논리를 앞세워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약점이 되어 해병대를 질시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주어 한때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한국 해군이 2개 사단의 한국 해병대를 상륙시킬 능력이 없으니 해병의 상륙훈련은 항상 한미 합동훈련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교들의 영어구사 능력은 탁월해야 했다.

 

최근 독도함의 취항으로 1개 대대는 자력으로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우리 해군과 해병의 자랑이다. 독도함을 기함으로 하고, 3~4척의 구축함, 순양함, 그리고 최근에 취항한 잠수함으로 함대를 편성하여 1개대대의 상륙단(BLT)를 탑재하면 중동, 아세아의 어디라도 우리 교민과 우리기업들의 보호 및 철수를 미국의 도움없이 당일내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건 우리기업과 국가의 위상을 매우 높이는 일로 참으로 자랑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치안이 불안한 중동에서 우리 기업들이 원자로 공사를 수주해도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는게 바로 이점이다.

 

현재 상륙 교리는 많이 발전되고 형태도 수직상륙, 기습상륙 등 많은 상륙형태도 생각할 수 있지만 힘과 예산을 가진 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그 장비라든가 훈련에서 답습을 면치 못한다.

 

상륙작전이란 적전상륙을 말하는 것인데 초기 해안에서 전전투 사망자의 1/3이 발생한다고 하니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따라서 강한 화력과 우수한 병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것은 5.16이전에는 상당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육군 장성들이 대거 정치 일선에 나섬으로 그 후 힘의 열세에 눌려 거의 육군화 되고 말았다.

 

그래도 옛날의 그 강하던 해병대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가령 1개 사단에 편성된 포병이 105mm가 1개 연대, 155mm가 1개 대대, 전차가 1개 대대, 장갑차가 1개대대, 항공대 라는건 육군 보병사단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력이다.

 

또 상륙전의 특성상 보충대나 예비대가 없는 전투를 해야 하니까 전 해병대 장사병은 모두 보병전투 기능을 가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모든 장교 즉, 경리 재무장교들이라도 보병 소총 소대장을 거친다.

 

전쟁이 끝난 지가 벌써 반백년이 넘으니 전투에서 효과적이었고 전장에서 세운 공로는 잊혀지고 힘과 배경이 강한 자들의 논리 데로만 움직이니 만약 앞으로 전쟁이 생긴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특수부대의 비정규전이 전쟁의 대세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공수부대의 경우는 미국의 경우도 사단급 이상의 이동은 곤란하다.

 

그만큼 많은 병력을 비행기로는 수송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공수부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공수 특전단 체제로 운영이 된다.

 

즉 소수의 특전대원이 하강하여 이북의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전투가능한 부대로 편제한다는 이야긴데 거기엔 불분명한 요소들이 너무 많고 시간 또한 많이 걸리게 된다.

 

그러나 해병대의 상륙 전투는 예외이다.

 

예기치 않은 곳에 강한 정규편제의 대규모 부대(상륙전은 기습이나 특수한 임무를 제외하곤 최하 사단급 이상이다)의 출현은 대세를 좌우 할 수 있다.

 

노르망디가 그렇고 인천 상륙전이 그렇다

 

끝으로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해병대 사병들에 의한 민간인들에 대해 무뢰한 행동이나 난동은 꼭 고쳐져야 할 고질적인 병폐이다.

 

이는 일본군의 잔재인데 이것 때문에 그 많은 신화와 같은 무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가 비하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국민에게 친절하고 적들에게 공포를 주는 해병대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나라 같은 적은 나라에서 이정도의 전략기동군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정말 자랑중의 자랑이다 !

 

해병대여 영원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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