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 김전식
나이가 먹으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노인은 과거를 먹고 산다드니 내가 그 짝인가 보다.
'72년 봄에 제대하고 가을이었다. 가게도 이제 자리가 잡혀 갈 지음 옛날('67년)에 통신병으로 데리고 있던 김영관이가 헐레벌떡 찾아 왔다. 녀석은 괴짜다. 세상에, LFTU 교육을 갔을 때 기갑 병과로 파견 나와서 알았던 앤데 기갑병과는 파월이 안 되니 병과를 통신으로 바꿔서 월남을 왔는데 (그때 사병병과가 변경됄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마침 내 중대(포병 7중대)로 배치가 된 아주 인연이 깊은 앤데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큰일이 났습니다. 이경일이가 여기 있습니다.
응, 이경일이?
“예, 왜 월남에서 총기난동 부리던 그 경일이가 경남이의 동생인데 그 집이 옛날 갑산집이라는 요정을 했었는데요. 그 형이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사람(깡패)이예요. 어떻게 조치를 취하셔야지요.”
가슴이 덜컹했다. 이제 전역하고 아무 힘도 없는 내가 어떻게 감당할건가, 생각하니 어찔하다.
하필이면 그놈이 여기 살게 뭐야
그래? 어떻게 해 봐야지,
이경일은 내가 월남에서 포병7중대장을 인수 할 때 좋지 않은 인연이 있는 애였다.
총기 난사 사건을 이르켰는데 당시 인계중대장은 장기순(해사)이였는데 나는 헌병대에 연락해서 합법적으로 간단히 끝내려고 했고 그는(인계 중대장) 자기 경력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자체 해결을 원했고 또 장 대위와 같이 말썽 없기 바라는 대대장의 이해가 맞아 그걸 결국 내가 떠안게 되였다.
결국 경일 이와 나의 관계만 좋지 않게 되었다.
중대 징계를 3번이나 내리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행정이 그 모양이였다.
일사부재리의 규정에 걸려 문제가 되라고 그렇게 했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기관이 없었다.
각설하고 그 애의 전화번호를 알아 전화를 먼저 걸었다.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 했다.
너와 나의 그 문제(영창문제)는 너와 내가 근무 하다가 생긴 일도 아니니 내가 네게 무슨 감정으로 그렇게 처리 했겠냐니까 저도 개인감정은 없다고 해서 술 한 잔 먹고 풀었다.
다음날 문제의 김전식이 내게 달려 왔다.
“중대장님 오셨단 말을 듣고 바로 찾아 왔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늦어서 죄송합니다. 헌데 경일이가 중대장님과 좋지 않은 인연이 있다면서요? 걱정이 돼서 왔습니다. 만약 처리가 잘 안되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세상에 우리 중대장님 같은 분에게 한을 품으면 그건 물어 볼 것도 없이 그놈이 나쁘겠지요.”
하며 소신에 찬 표정이였다.
“ 아냐 중대장이 잘 해결했어.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괜찮아. 그나저나 너 요즘 뭐하냐?" 하며
한담을 나누고 그 후로 자주 나에게 오고 영업에도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
김전식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70년 포항에서 포병 9중대장을 할 때였다. 육군 포병학교도 나오고 임시대위에서 임시자도 떨어지고 지리가 잡혀 갈 때인데 똑똑똑 중대장 실에 노크가 왔다 .
“누구냐 들어와!”
제법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폼을 잡으며, 지금 생각하면 보통보다 큰 목소리로 거의 고함치다 싶이 소리쳤다.
“이병 김전식, 중대장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뭐야(?) 이병 김진식이? 중대장님께 용무? 아니 도데체 이병이 중대장에게 무슨 용무가 있단 말이냐”
중대장을 두 번째 해보지만 이병은 중대장에게 용무가 있을리 없다. 중대장이 부르기 전에는,
“뭐야 (이병이니까 윽박지르지도 못하고 다정하게) 여기 앉아봐”
그래 무슨 용무냐? 하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첫마디가.
“ 중대장님 휴가를 좀 보내 주십시오.” 한다.
실무에 배치된지도 몇 달 안 되는 이병이 감히 중대장님에게 직접 찾아와 휴가를 청원한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하니 울먹울먹하며 몸아 아파서 도저히 병영 생활을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쎄.........아프면 의무실에는........ ” 하니까 의무실에 가도 환자 취급도 안하고 (뚝 뿌러지거나 곪거나 열이 확확 나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나일론이라며 청소나 시키고 치료 같은것도 안 해주고 가 봐도 아무 소용은 없고 몸은 아프고 환장하겠어서 집에 가서 민간병원에 좀 다니며 치료도 하고 보약도 좀 먹고 해서 기운차려서 근무하려고 마지막으로 목숨 걸고 중대장실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신상에 애로 사항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말씀을 믿고,”
“ 아하! 이 애에게는 내가 신문고로구나” 생각하고 일단 중대장실 문을 잠그고 신상상담을 시작했다.
결과는 이렇다. 자기들 내무반에서 걔가 제일 쫄잔데 순서에 입각해서 휴가를 갈려면 4-5개월 기다려야 하고 몸은 아프고 죽고 싶다는 거다.
원래 해병대는 팔팔하고 기운당찬 놈들 위주로 모든 조직이 편성되어 빌빌거리는 놈은 설 땅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안다. 내가 빌빌거리니까.
"알았다 내가 선처 할 테니 너는 아무소리 말고 근무에 충실 하라."해 놓고 생각해 본다.
실무 온지 2개월짜리를 휴가 보냈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옴팍 덮어 써야 할 테고 안 보내면 최후로 나를 찾아 왔다는 놈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고.
중대 선하를 불렀다
“제7내무반 김전식 휴가원 올려!”
하니 중대 선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김전식은 실무 온지............ 하며 말끝을 흐린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중대장은 중대장.
내무 규정에 휴가, 외출, 외박은 중대장의 고유 권한인데, 편의에 따라 순서별로 보내곤 하지만 중대장이 고유 권한을 행사하겠다는데 제 놈들이 어찔거야, 중대 선하는 우물쭈물 하다가 나갔다.
역시 중대 선하는 선하다. 오랜 군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인 것이다.
벌써 중대장의 결심을 간파한 것이다, 이건 상의가 아니라 명령인 것이다.
조금 있으니 전포대 선하(중사)가 들어 왔다.
"중대 선하에게 들었는데......," 야, 이놈 봐라 감히 중대 선하도 꼬리 내리고 나갔는데 네가 감히 나에게 도전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휴가 순서를 바꾸면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어쩌고저쩌고하며 이놈이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든다.
“그래서 내 명령을 불복하겠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나는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참 기가 막혔다.
나이 어린 사람이 중대장을 하니 휴가 하나도 맘대로 못 보내? 전전 긍긍 하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길을 들이지 하고 있는데 대대 선하가 찾아 왔다. 대대 선하는 중대장도 무시는 못한다.
일거수일투족이 대대장에게 보고되니까,
“중대장님은 하사관들의 건의 사항을 아주 무시한다고 대대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래요? 대대선하쯤 되면 처신이 유연하다. 꼬지 꼬지 물어보지는 않는다.
참 더러워서 이거 중대장 해 먹겠나 중대인사계에서는 아직 휴가원이 안 올라온다.
조금 있으니 내무반장(하사)이 또 찾아 왔다. 제7 내무반장은 고참 포 분대장이다.
그런대로 권위가 있다는 하사다. 예의 그 전식이 문제다.
"중대장님 어쩌고저쩌고..........." 이젠 전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대장을 해 먹느냐 못 해먹느냐 문제인 것이다. 울화통도 치밀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처음 해병대를 들어올 때 창피한 이야기지만 해병대원 한사람도 알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말만 듣고 들어와서 훈련이야 참으면 되는 것이지만은 실무의 하사관이나 사병들이 무섭고 겁도 난 건 사실이다.
당시엔 천하에 못된 놈들이 다 모인 부대, 자기 부모 말도 안 듣고 모인 사람들,
거기서 과연 내가 간부로서 위치를 지켜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2~3년 복무해 보니 독하게 깡다구만 잘 부리면 상대가 도리어 나에게 겁을 먹는다는걸 알았다.
법률로 보장된 계급이 있고 지휘권이 막강한 중대장이라는 직책 거기다가 나는 단기 복무자, 거기에 비해 중상사들은 딸린 식구가 있는 장기 복무자이고 나는 재수 없어 복무 연장된 마당에 서발막대 걸릴게 무어냐 막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늘 공무원들 일절 퇴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끝까지 가보자 까짓것 누군 군대생활 하고 싶어 하냐?
석별과 시간에 간부를 포함한 전 중대원을 병사 앞에 집합시켰다.
근무자(차동초, 포동초, 내무감시)만 제외하고.....
중대장의 대갈일성
“나 중대장이 중대를 지휘하는데 감히 불복하고 나오는 놈들이 있다.
이는 첫 번째는 나의 부덕의 소치이지만 나는 지휘를 위하여 강권을 써야겠다!”
어쩌고 하며 일장의 훈시를 하고 "중대 선하 나와" 라고 불러서 중대 선하를 빳다 두 대를 쳤다.
만약 불복하면 맞짱뜰 각오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나이도 젊고 당수2단 딴지도 얼마 안 되고 나이 많은 중대 선하 하나 정도는 주먹으로도 겁이 안 났다. 설마 전 중대원이 나에게 작당하고 덤비지는 않겠지 하고, 전 중대원들 앞에서, 그리고 빳다를 집어 던지고 내방에 들어와 버렸다.
중대장실에서 들으니 악에 바친 중대 선하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툭탁툭탁 빳다치는 소리가 나고 신음 소리, 비명소리도 났다,
어쨌거나,
다음날 문제의 휴가원이 올라오고 전식이는 휴가를 갔다.
그 다음날부터는 중대 하사관들과 좀 서먹서먹하기는 했어도 별 문제없이 중대는 옛날보다 더 잘되는 것 같았고 중대 선하도 약간 겁을 내는 눈치였다.
아마 또라이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2차로 파월되고 귀국 후 김포로 가서 9중대와는 인연이 끝이 났다.
그 후 까맣게 잊었던 김전식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무 약속도 없이, 참 신기한 일이고 대한민국은 참으로 좁다는 걸 실감한다. 원수짓지 말아야지.
미국사람들(엥그리코맨 월남)은 한번 헤어지면 약속하지 않으면 평생 못 만난다던데......
근데 나는 약속 없이 두 사람이나 만났다.
그 후일이 궁금해서 전식이에게 그 후 어떻게 됐니,
너 근무 하는데 무슨 설움은 안 받았니 하니까 중대장님 친척이라고 소문이 나서 군대 생활을 아주 편하게 잘 했다고 하며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김전식이란 놈 참 대단한 놈이였다. 그 요령 좋은 놈이 농촌에서 썩을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달라 몇 년 있다가 울산조선공장에 취업 하러 간다 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곳은 잘 안 가려고 했는데 과감히 간 것이다.
명절이면 당시에는 꼭 고향에 오고 오면 꼭 날 찾아 왔다.
난 먹지도 않는 술 한 병 사 들고,
한번은 중대장님! 조선소라는게 월남전 보다 더 위험해요 한다.
뭐가 그리 위험하냐니까 크레인으로 큰 철판을 잡고 그 밑에서 용접하는데 크레인 기사가 잠깐 한눈팔면 밑에 있던 놈 그냥 간다는 것이다.
그래도 월급은 많아서 좋다고 하드니 저네 엄마 죽고 나니 이젠 오지도 않는다.
못 본 지도 벌써 10년도 넘는다. 이젠 먼 예날 이야기다.
나이는 한살 한살 더 많아지고 자꾸 옛날 생각만 난다.
그래도 해병대 생활은 잊을 수 없다. 자꾸 그때가 그리워진다. 나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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