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1) 입대 배경

머린코341(mc341) 2015. 1. 15. 05:56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1) 입대 배경

 

1946년 3월 초순경의 일이었다. 당시 전남 목포지구에서는 진해(鎭海)에 본부를 둔 해방병단(海防兵團)에서 일반대원(사병)과 간부요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모병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 당시 고향인 영암(靈岩)에서 향학을 위한 진로를 모색하고 있던 내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목포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걸려 온 전화연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의 말인즉슨 진해에 있는 해방병단이란 곳에서 왔다는 장교 두 사람이 해방병단의 일반대원과 간부요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목포에 와 있으니 속히 목포로 올라와서 그들을 한 번 만나 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고, 또 그 모병관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유달여관이란 말도 했다.

 

친구로부터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나는 그 다음 날 목포로 가서 유달여관을 방문하여 그 곳에 묵고 있는 두 사람의 모병관을 만나 보게 되었는데, 수일 전 목포에 왔다는 그 모병관들은 그 동안 모병공고문을 반절지나8절지 또는 16절지 크기의 시험지에 붓글씨로 써서 부둣가나 시가지의 담벽과 전봇대 등에 풀로 붙여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방송국을 비롯한 목포지방의 여러 기관에 모병선전에 대한 협조를 의뢰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달여관에 묵고 있던 그 두 사람의 모병관은 20대 초반의 석은태(石銀泰)소위와 30대중반의 백진환(白鎭煥)대위였었는데, 그들 중 직접 상담에 응하고 있는 사람은 석은태 소위였다.

 

나와 먼저 인사를 나눈 석 소위는 나의 군대경력을 물어 보더니만 1945년 11월 11일에 결단(結團)이 된 해방병단이 11월 13일에 공포된 군정청(軍政廳)법령 제28호에 의거하여 설치된 국방사령부(國防司令部)에 편입되어 군정법령에 의한 정식 군사단체가 되었다면서 해방병단의 창설기 간부요원으로 입대하여 장차 해군의 모체가 될 해방병단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동참하지 않겠냐고 했고,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던 백진환 대위도 "당신과 같은 경력자를 뽑아야지 누구를 뽑겠소"하며 적극적으로 입대를 권유했다.

 

그들의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일본 해군 경험자로서 언젠가 조국의 해군을 건설할 때가 되면 기꺼이 그 초석이 되어 나의 일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치겠노라고 다짐해 왔던 그 마음 속의 다짐을 실행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1946년 3월 16일 마침내 해방병단의 간부요원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한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1945년 11월 11일에 결단이 된 그 해방병단은 8·15직후 해양의 선각자(先覺者)인 손원일(孫元一)씨를 비롯한 몇몇 발기인들에 의해 조직된 해사대(海事隊)와 그 해사대의 후신(後身)인 해사협회(海事協會)를 모체로 하여 결단이 된 것이었고, 입대 당시 해방병단의 업무분담 편성표와 계급제도는 아래와 같이 돼 있었다.


업무분담편성표

단 장 손원일(孫元一)

일반행정 민병회(閔丙會)

교육훈련

항해교육 김영철(金永哲)

기관교육 정긍모(鄭兢模)

군사훈련 변택주(邊宅周), 김정주(金廷株)

경 리 석은태(石銀泰)


그리고 당시의 해방병단 계급제도는 참령(參領),정위(正尉),부위(副尉), 참위(參尉), 견습사관(見習士官), 병조장(兵曺長), 일등병조(一等兵曺), 2등병조, 견습수병 등으로 되어 있었고, 해방병단 간부들 중 손원일(孫元一) 단장의 계급은 참령(소령), 인천경비부사령관 백진환(白鎭煥)씨의 계급은 정위(대위)이고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부위(중위)또는 참위(소위)의 계급이 부여되어 있었다.

 

입대와 동시 나에게 주어졌던 첫 보직은 신병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신병교육대의 6중대 1소대장이었다.

 

당시 신병교육대에 입대해 있던 신병들은 약 700명 정도였다. 그 700명의 신병들은 해방병단이 결단되어 서울로부터 진해로 이동한 직후부터 모병에 착수하여 모집한 신병들이었는데 그들 중 서울지구에서 모집한 인원은 약 200명이었고, 나머지 인원은 군산과 목포를 비롯한 타 지역에서 모집된 인원이었다.

 

해방병단의 신병교육대가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 시기는 1946년 2월 중순경, 그러니까 내가 입대하기 1개월 전이었다.

 

초기에는 교육대의 편제가 일본 육군식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후 개정이 되어 중대는 분대로, 소대는 교반으로 고치는 등 차츰 일본 해군식 편제로 개정해 나갔다. 모든 것이 미비했던 초창기였으므로 일과표 자체도 엉성한 면이 많았다. 호루라기를 불어 대며 "총기상 15분전" "총기상 5분전"하고 외치던 당직근무자들의 구령 소리가 지금도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병들에게 가르쳤던 교과목들은 일본 해군체조와 구보, 제식교련, 소단위 부대 전투훈련, 결색(선박운용술에 속하는 밧줄묶기), 갑판소제, 선구(船具)의 정비 및 비치, 보트를 달아매는 일과 내리는 일 등이었고, 훈련용 장비(화기)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아 빠진 99식 및 38식 소총이었다.

 

신병 1기생들이 수료했던 날은 그 해(1946년)5월 말경이었다. 1기생이 수료한 뒤 나는 6월 1일부로 나로서는 최초의 계급인 준사관의 계급을 부여받고 준하사관교육대 내에 병설된 준사관반에 입교할 때까지 진해특설기지(통제부의 전신) 갑판사관(甲板士官)겸 해방병단 작전기획부 요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그 작전기획부에서 나는 중대와 소대 등 그 때까지 일본 육군식으로 편성되어 있는 편제를 오늘날의 해군 편제인 분대(중대)와 교반(소대)등으로 고치는 작업을 했다. 그 당시의 편제가 일본 육군식으로 돼 있었던 것은 애당초 편성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일본 육군 출신이나 만군(滿軍)출신간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기획부에 있는 동안 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마는 후일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신현준 장군(당시 중위)과 2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김석범 장군(당시 견습사관)을 그 부서의 상사로 모시고 근무를 했었는데, 비록 희귀한 인연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때 한 부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세 사람 모두가 훗날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하게 되리라곤 그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해 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6월 초에 문을 열게 된 준하사관교육대는 해방병단의 중견간부 양성을 위해 개설한 교육기관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준하사관교육대로 되어 있었지만 교육반의 구성은 준사관반과 하사관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2개반을 합친 전체 피교육자들의 수는 약 300명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육기간 중 나는 그 교육대(2개반)의 반장으로 근무했다.

준하사관교육대의 교육주임을 맡았던 사람은 신현준 중위였고 교관진은 김성은(金聖恩), 최용남(崔龍男), 김정주(金廷柱)소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교육대에서 가르친 주요 학과목은 소양교육을 비롯하여 육전, 화기학, 항해술, 운용술, 정신교육, 조정(操艇)훈련 및 함상실습교육 등이었는데 그 교육대는 유능한 중견간부들을 양성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교육을 지도한 모든 교관들의 진지한 노력과 스스로 유능한 중견간부들이 되기 위해 분발한 피교육자들의 의욕적인 노력이 합치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