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2) 임관
내가 준하사관교육대의 준사관반을 수료한 날짜는 1946년 8월 24일이었고, 해방병단의 참위(소위)로 임관한 날짜는 그 해 10월 28일이었다. 그리고 임관할 때 나에게 부여된 군번은 80082번이었다.
그런데 특별임관(특임) 케이스로 임관했던 나의 참위 임관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즉 1946년 6월 15일에 공포된 군정청 법령에 의하면 해방병단은 통위부(統衛部)로 편입됨과 동시에 그 통위부 산하에 설치된 「조선해안경비대」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발전하게 되고, 또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해안경비대에는 8월 말경 일본으로부터 4척의 소해정이 도입됨과 동시에 미국 해안경비대로부터 16명의 고문관이 파견되어 대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적극 지도했는데, 9월 1일 미국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파견된 그 16명(중령 1명, 소령 1명, 대위 1명 및 병조장 13명)의 고문단 요원들 중 직접 대원들의 교육훈련을 지도했던 사람들은 수석고문 맥고원(Mcgowan) 중령을 비롯한 4명의 대위와 6명의 병조장이엇고, 나머지 요원들은 행정 및 관리업무를 담당하였다.
고문단은 해방병단 시절에도 5~6명으로 구성된 요원들이 파견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미 군정청에 소속된 미 육군 요원들로 그들이 했던 일은 주로 미국으로부터 식량(소맥)을 도입하는 일을 추진했었다.
교육과 훈련을 지도하게 된 그 고문관 요원들은 준사관급 이상의 간부들을 갑판과(甲板科)와 기관과(機關科)로 나누어 학과 강의와 실습교육 등을 실시했는데 수석고문 맥고윈 중령은 피교육자 전원에 대한 소양 지도교육을 매일 한 시간씩 담당했고, 갑판과는 와그너 대위와 키인 대위가, 기관과는 후식 대위, 그리고 실습교육은 2명의 병조장이 담당했다.
그런데 약 1개월간의 학과교육과 약 3주간의 실습교육으로 마무리된 그 교육기간(1차) 중 미 고문단에서는 2~3명씩의 피교육자들(준사관)을 실습선에 태워 진해만과 목포항을 내왕하면서 실습교육을 지도했는데, 그 실습과정에서 그들은 항해술과 운용술에 대한 피교육자들의 능력을 면밀히 체크해서 기록한 평점(評點)을 피교육자들의 임관서열에 반영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테스트 과정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나는 그 실습과정이 끝나자 마자 인천기지에 소속된 JMS 302GH(통영호)의 부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10월 28일 참위(소위)로 임관되어 인천기지에 부임하게 되었다.
한편 참위로 임관할 때 나에게 부여된 그 80082번의 군번과 관련된 얘긴데 1946년 3월 계급과 함께 부여된 초창기 해방병단 간부들의 군번이 8001번(손원일 단장의 군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그 숫자상의 서열로 본다면 나에게 부여된 그 군번은 82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미 고문단 요원들의 지도하에 실시된 그 해상 실습교육과정을 마치고 참위로 임관되어 나 자신의 군복에 참위의 계급장을 달게 되었던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고무적인 감회를 느끼면서 해군 청년장교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성실하게 완수할 것을 마음 속에 굳게 다짐했다.
이 밖에 그 해 8월 말경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4척의 소해정과 관련된 얘기도 아울러 소개해 둔다.
당시 진해특설기지사령부에서는 부산항에서 인수하게 되어 있는 그 4척의 소해정을 인수해 오기 위한 요원들을 편성하여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60명으로 구성된 그 인수단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8월 말경에 도착한 그 4척의 소해정을 인수하기 위해 인수단 일행과 함께 선편으로 부산항에 도착했던 나는 우리가 인수할 그 배들이 과거 내가 일본 요코스카 대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의 낮익은 실습선이라는 사실과 그 함정들을 해안경비대에 인도하기 위해 운항해 온 단장이 내가 그 대잠학교에 다닐 때 소속했던 분대의 분대장(해군소좌)이었고, 그 밖의 승조원들도 그 때 나와 함께 교육을 받았던 동창들과 선후배 및 그 당시의 교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말할 수 없는 해후의 정을 느꼈다. 그들 역시 그러한 감회를 정겹게 토로했었다.
그리고 그 함정들을 인수한 특설기지 인수단은 그 4척의 함정에 분승하여 진해 군항으로 회항, 그로부터 약 1개월간 운항실습을 받았는데 그 기간 중 나는 그들과 특설기지사령부를 연결하는 연락업무를 맡았고, 또 그들이 진해에 채류하는 동안 숙식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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