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3) 통영호의 화재
참위로 임관된 후 내가 처음으로 승선했던 함정은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그 소해정 302호(統營號)였다. 당시 인천기지에 소속되어 있던 그 통영호는 1946년 10월 초 JMS301(大田號), 303(大邱號), 304(太白山號)호 등과 함께 인수한 일본 해군 함정이었는데, 이러한 함정을 가지고서 인친기지에서는 해상초계업무와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의 인천기지사령관은 그 후 초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신현준 중위였다.
그런데 약 7개월간 그 통영호의 부장(副將)으로 근무하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진해로 운항 중에 있던 그 통영호가 인천에서 약 35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발생한 기관실의 화재사고 때문에 정장(尹英遠 중위)을 비롯한 전 승조원들과 함께 큰 곤욕을 치렀다.
특히 그 날 그 배 안에는 만삭의 몸을 한 인천기지 보급관 김동하(金東河)소위의 부인(吳榮信, 당시 25세)이 진해로 가기 위해 타고 있었다.
화재의 원인은 발전기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유류에 인화된 때문이었는데 전기선로의 소실로 자동조타(自動操舵)가 불가능해진데다 후미에 있는 인력조타실마저 기능이 상실되는 바람에 항로를 이탈한 배가 약 10노트의 속력으로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정장은 기관실 내에 있는 대원들을 기관실 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 기관실의 해치를 모두 닫아 버리고 위급상황에 대처했다. 해치를 닫은 이유는 기관실을 밀폐시킴으로써 기관실 내부에서 자연진화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정장이나 부장인 나 자신으로서는 대원들에 대한 퇴함명령을 고려해 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마는 미군들로부터 이양받은 그 일본해군 소해정에는 구명재킷이라든가 구명정(救命艇) 등이 전혀 비치되어 있지 않고 다만 전마선 한 척이 있을 따름이었다.
배가 향하고 있던 방향은 3시 방향이었다. 행여나 기관실 내부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마음들을 죄고 있던 승조원들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 배가 돌진해 가고 있는 방향에 조그마한 섬 하나가 나타나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했다 피난처가 생겨난 때문이었다.
일단 배가 섬 기습의 모래사장에 닿기만 하면 승조원들의 안전은 보장이 될 수 있는 일이었고, 만에 하나 자연진화가 될 경우에는 조타기능을 회복시킨 연후에 만조시를 기해 배를 해상으로 밀어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상황이 못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데, 배와 모래사장과의 거리가 약 300미터 정도로 접근되었을 즈음에 선수(船首)가 갑자기 약 15˚방향의 암초지대로 방향을 바꾸어 돌진하기 시작하자 정장과 나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 배에 타고 있는 김동하 소위의 부인과 수영이 미숙한 대원들을 먼저 구조하기 위해 전마선을 끌어 내리게 했으나 황급히 끌어 내린 그 전마선이 빠른 조류와 모선의 속력 때문에 팽이처럼 빙빙 돌다가 모선에 연결된 로프가 꼬여 절단이 되는 바람에 미처 사람을 태우기도 전에 놓치고 말았다.
한편 전마선을 잃게 된 나는 정장의 지시로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 선체와 암초의 충돌을 막기 위해 펄사적인 노력으로 선수 좌우측에 있는 두 개의 닻을 동시에 투묘했다. 배의 속력이 빠른 상태여서 두 개의 닻을 선수 전방에 동시에 투묘한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담력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인데 용케도 나는 노련한 선임하사관을 지휘하여 그 일을 어렵게 해내었다.
선수 전방에 두 개의 닻이 동시에 투묘되자 암초가 있는 곳으로 망나니처럼 돌진해 가고 있던 선체가 갑자기 빙빙 돌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됨으로써 암초와의 충돌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장과 나는 또 다른 위기감을 느꼈다. 또 다른 위기감이란 기관실의 화재로 열을 받아 갑판 밑에서 치받듯이 불룩거리고 있는 기관실 양쪽의 오일탱크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준 것이었다. 그래서 정장은 지체없이 퇴함명령을 내려 승조원들을 약 100미터 가량 떨어진 섬 기슭의 모래사장으로 피난하게 했다.
그리고 퇴함명령이 내리자 나는 수영을 잘 하는 하사관 2명에게 김동하 소위의 부인을 부축해서 섬 기슭으로 헤엄쳐 가게 했으나 약 50야드 쯤 헤엄쳐 간 그 하사관들은 거센 물살 때문에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배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물살이 얼마나 세었던지 약 100야드 가량 떨어진 섬 기슭까지 헤엄쳐 가는 도중 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수영이 미숙한 일부 대원들은 폭발을 하지 않고 있는 배로 되돌아 오기도 했다.
그 퇴함 과정에서 내가 놀랍게 여겼던 것은 그러한 위기에 너무나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던 그 부인의 행동이었다. 보통여자 같았으면 기절초풍을 하여 버둥거리거나 실성을 하여 허우적거렸을텐데 더구나 만삭의 몸으로(후에 안 일이지만)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어쩌면 그렇게도 침착하게 행등을 하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스러웠던 일은 당장에 폭발할 것 같던 그 기관실의 오일 탱크가 폭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퇴함명령은 내렸으나 위난에 처해 있는 배를 떠날 수가 없어 비장한 각오로 갑판 위에 남아 있던 정장과 나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는데도 오일 탱크가 폭발을 하지 않고 갑판을 치받고 있는 그 불룩거리는 강도가 눈에 띄게 낮아진 것을 보고 하늘이 우리를 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기관실의 해치를 열고 그 내부를 살펴봤더니 밀폐된 기관실 속에서 타고 있던 불이 저절로 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관실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발전기의 전기배선이 죄다 타 버리고 없어 조난신호를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정장과 나는 조그마한 전마선을 노로 저어 조난 현장으로 다가온 60대의 노인 어부가 있기에 그 섬이 무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을에 가면 혹 무슨 통신수단이나 교통수단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 2~3명의 대원들과 그 어부의 전마선을 함께 타고 섬으로 가 봤더니 그 섬 반대편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노인의 전마선보다 약간 더 튼튼한 전마선 한 척과 젊은 뱃사공 한 사람뿐 달리 이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부장인 나로서는 내가 그 전마선을 타고 인천기지로 가서 직접 조난보고를 하여 사태를 수습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정장도 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섬 기슭에서 전마선을 타고 인천 외항에 있는 월미도까지 가는데는 약 12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뱃사공과 내가 번갈아 가며 노를 젓고 갔는데, 밀물 때는 속도가 빨랐으나 썰물일 때는 죽자사자 노를 저어도 1시간에 고작 2~3마일 정도의 거리밖에 단측시킬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풍랑이 잠잠한 날이었기 망정이지 만약에 일기가 불순한 날이었더라면 그런 전마선을 가지고선 애당초 엄두조차 낼 수 있는 일이었다.
오후 1시경부터 노를 젓기 시작했던 그 전마선이 인천 외항에 있는 월미도의 방파제 끝부분에 당도했던 시각은 그 날 밤 12시경이었다. 그 섬을 떠나올 때 점심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나와 뱃사공은 저녁끼니까지 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허기와 피로와 졸음 때문에 고달프기 짝이 없는 신세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하기 이를 데 있는 그 일엽 편주가 가까스로 방파제끝에 닿긴 했으나 칠흑 같은 어둠과 출렁이는 파도로 인해 전마선을 방파제에 갖다 대는 일 때문에 죽을 고생들을 해야만 했고, 또 기진한 몸들을 이끌고 그 방파제 끝에서 험한 산을 넘어 기지사령부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약 1시간이 걸렸다. 당직실에 켜져 있는 전등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비록 말들은 없었지만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른다. '이제 다 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나 그 불빛이 반가웠던지 눈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위병소의 정문 앞에 당도하니 위병소의 근무병이 선잠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라며 소총의 노리쇠를 작동시킨 다음 "누구얏"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내가 JMS302호의 부장이라고 말하고 놀라지 말라고 했더니 그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했고, 신분증을 제시하자 그것을 눈여겨 보려고도 하지 않다가 나로부터 간략한 사고경위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태도를 바꾸며 동정적인 언동을 취했다.
위병소를 거쳐 당직실로 간 나는 당직장교에게 자초지종 조난경위를 설명한 후에 몸도 씻고 옷도 갈아 입고서 날이 밝을 때까지 눈을 붙이고 있다가 날이 밝은 다음 대구호(303)를 이용하여 조난당한 통영호를 인천기지로 예인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그 날 그 조난사고의 와중에서 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일들 때문에 통영호의 화재사건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악몽같이 떠오르는 그 영상들을 지울 수도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의 오랜 군대생활을 통해 그 때처럼 초급장교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며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일도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때 만삭의 몸으로 죽을 고생을 했던 그 김동하 소위(퇴역 중장)의 부인에 대한 일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그 부인이 순산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으나 그로부터 먼 훗날 그 때 차남으로 태어났던 그 애기가 출생 직후부터 잦은 경기(驚氣)를 앓다가 네 살 되던 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행여 그 사인(死國)이 통영호의 조난사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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