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5) 덕천호
통영호(JMS302호)의 부장으로 있을 때인 1947년 5월 1일 중위의 계급으로 승진했던 나는 그 해 5월 16일부로 306호(丹陽號) 정장으로 임명되어 그로부터 약 4개월간 동·서해안과 남해안에 대한 경비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관할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여러 해군부대에 대한 물자수송과 병력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 해 9월 16일 소해정 310호(德川號)의 정장으로 임명되어 그 이듬해 12월 29일 해군신병교육대의 대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약 1년 3개월간 그 직무를 수행했다.
한데 그 해(1948년)4월 1일 내가 대위로 승진한 지 이틀 후 제주도(濟州道)에서는 이른바 4·3사건으로 일컬어진 폭동사건(暴動事件)이 발생하여 충격적인 참상이 빚어졌었다.
그 폭동을 주동했던 자들은 남로당(南勞黨) 전남도 지구당 총책이었던 김달삼(金達三)과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 산하 군사부(軍事部) 직계인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이덕구(李德九) 등이었고, 이들의 지휘하에 약 500명의 게릴라들을 포함해서 1,500여 명의 폭도들이 총기와 흉기 등으로 무장하여 제주읍을 제외한 전지역(각 면소재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찰지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경찰관을 비롯한 우익계열의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살상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제헌의회(制憲議會)구성을 위한 남한 당국의 5·10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남한의 정정(政情)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 안정을 위협했다.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해안경비대에서는 목포·군산· 인천·진해·부산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각종 함정을 차출하여 그 폭도진압을 위해 투입하는 병력과 장비, 탄약, 식량 등의 군수물자 수송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인천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JMS 302호도 그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 나는 간혹 폭동 떼에 다친 민간인 부상자들과 폭동 진압을 하다가 다친 군인이나 경찰 또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육지로 수송해 오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현지 주둔 육군 진압부대의 요청에 따라 서귀포에 있는 병력을 제주읍으로 이송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하루는 송요찬(宋堯贊)중령이 지휘하는 폭등진압작전 부대 본부를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기회를 통해서 나는 그 폭동의 성격과 참상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고, 또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여러 갈래의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증언을 통해 차분히 분석해 볼 수도 있었다.
4·3사건은 폭동행위 그 자체와 그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초래시킨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당시 내가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꼈던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 바로 그것이었고, 남한의 적화 전략을 위해서는 천인이 공노할 그 어떤 만행도 자행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덕천호의 정장으로 있을 때 해안경비대에서는 두 건의 함정 월북사건이 발생하여 군 내부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소해정 311호(通川號)와 517호(高原號)의 월북사건이 곧 그것이었다.
38선의 해상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통천호의 월북사건이 발생했던 것은 제주도에서 4·3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948년 5월 7일이었고, 고원호의 월북사건 역시 그 해의 같은 5월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들 두 함정의 월북사건은 군 내부에 깊이 침투해 있던 좌익분자들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일으킨 것이었는데, 통천호의 경우는 주문진(注文津)에서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묵호(墨湖)기지로 돌아오던 중 수명의 좌익분자들이 정장(김원배 소위)과 부장(백경천 병조장) 등을 사살하고 남은 대원들을 협박하여 월북한 것이었고, 목포기지에서 묵호기지로 전속 배치명령을 받고 묵호기지로 운항중에 있던 고원호 역시 그와 같은 수법에 의해 납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6월에 접어든 후에는 301호(大田號)에 침투해 있던 좌익분자들이 납북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다 정내(艇內)의 분위기를 수상쩍게 생각한 정장 조정우(趙丁佑)중위와 기관장 김득상(金得商)중위 등의 재치있고 기민한 대처로 그들이 일망 타진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동해안 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함정들을 죄다 진해로 철수시켜 버리고 그 당시 군산(辨山)기지에 배치되어 그 지역의 해안경비에 임하고 있던 310(덕천호)정장인 나에게 월북사건이 빈발하고 있는 동해지구 해안에 대한 경비임무를 단독으로 수행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와 같은 명령을 받은 나는 한편으론 사태의 심각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한편으론 나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무를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동해안의 38선 이남 해안에 대한 경비임무는 1947년 10월에 발족된 제1특무정대(特務艇隊)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는데, 그 정대에 소속되어 있던 몇 척 안 되는 함정들 가운데서 그와 같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군산기지로부터 포항기지로 소속이 변경된 덕천호가 동해로 출동했던 시기는 그 해(1948년) 5월 하순경이었다.
출동에 앞서 나는 모든 승조원을 집합시켜 놓은 자리에서 그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굳건한 결의를 가다듬게 하기 위해 덕천호에 부여된 중차대한 책무를 설명하는 한편 그 책무에 따른 긍지를 깊이 간직하고 임무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분발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런데 포항기지에 도착한 후 나는 함정 월북사건과 관련된 이런저런 소문이 유언비어처럼 떠돌고 있는 것을 귀담을 수 있었다. 그러한 소문들 가운데는 남로당에서는 함정 납북을 위해 미인계(美人計)도 쓰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장인 나로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덕천호의 승조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미인계에 포섭당하기라도 하면 어찌나 하는 생각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그러한 처지였다.
한편 당시 해안경비대에서 보유하고 있던 약 30척의 소해정(250~300t급 JMS 또는 AMS)에는 포(砲)는 장비되어 있지 않고 주무기는 Cal.30 기관총과 몇 자루의 99식 또는 38식 소총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장비를 가지고서 그 엄청난 광역(廣域)을 더구나 덕천호 한 척만으로 경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전 승조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막중한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그야말로 일심동체가 되어 분발했다.
내가 덕천호를 떠나게 된 것은 1948년 i2월 29일부로 내가 해군 신병교육대의 대장으로 임명된 때문이었는데, 1년 3개월여에 걸친 그 덕천호 정장 근무기간 가운데 포항기지로 출동하여 38선 이남 동해안지구 전체에 대한 그 막중한 경비임무로 불철주야 열과 성을 다해 완수했던 그 시절에 대한 긍지를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언급해 두고자 하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곧 당시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공산프락치와 그들에 의해 수행된 여러 가지 사건들에 관한 건이다.
앞에서 언급한 통천호와 고원호의 월북사건 외에도 해군에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5월 11일 주문진 근해에 대한 경비임무를 띠고 부산항을 떠났던 제1특무정대의 기함인 소해정 508호가 포항지구 해상에 이르렀을 때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월북을 음모하고 있던 해군사관학교 2기생 이송학(李松鶴)소위 등 7명의 좌익분자들이 일반사병들을 내무실에 감금함과 동시에 제1정대사령관 황운서(黃雲瑞)중령과 508호 정장 이기종(李基琮) 소령을 사살하고 그 함정과 함께 월북한, 이른바 511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월북음모사건이 발생했고, 또 그 외에도 미수로 그친 두어 차례의 월북 기도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은 비단 해군 내에서 뿐 아니라 조선경비대(육군)에서도 발생하여 혼란기의 남한국민들을 전전 긍긍하게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19일 육군 14연대 내에 침투해 있던 김지회(金智會)중위와 지창수(池昌壽)상사 및 홍순석 중위 등을 비롯한 약 40명의 공산프락치들에 의해 거사되었던 여순지구(麗順地區)사건이 그러했고, 1946년 10월 1일 대구 주둔 6연대 내부에서 일어났던 제1차 반란사건 및 1948년 12월 6일과 1949년 1월 30일에 발생했던 같은 6연대 내부의 제2, 제3 반란사건, 그리고1948년 5월초 38선상의 2개 처에서 일어났던 8연대 1대대장 표문원(表文源)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姜太武)소령의 월북사건 등이 곧 그러한 사건들인데, 이와 같은 사건들은 남침을 획책하고 있던 북한이 8·15직후의 사회적 사상적인 혼란기를 이용해서 아군 내부에 침투시킨 그들의 프락치를 조종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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