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6) 신병교육대

머린코341(mc341) 2015. 1. 21. 03:11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6) 신병교육대

 

 

1948년 12월 29일이었다. 나는 대위의 계급으로 해군신병교육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해 군항기지의 방어와 경비, 그리고 출동준비에 관한 사항을 총괄하고 있던 통제부(統制府)내에는 해방병단 시절에 발족을 한 신병교육대 외에 이른바 해군종합학교를 형성하고 있는 항해학교, 통신학교, 기관학교, 공작학교, 포술학교, 주계(主計)학교, 위생학교 등 많은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그러한 교육기관 가운데, 그 기구나 인력 양성면에서 최대의 교육기관으로 손꼽히고 있던 것이 곧 신병교육대였다.

 

내가 교육대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신병교육대에서는 목전에 다가선 11기 신병들의 수료식과 12기 신병들의 입대식 준비 때문에 한창 분망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1945년 11월 11일에 결단된 해방병단의 창설과 함께 발족이 된 그 신병교육대는 그간 1기에서 11기까지 약 3,70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안경비대 시절을 거쳐 대한민국 해군으로 발전된 그 당시 해군 전력의 주춧돌이 되게 하고 있었다.

 

그 신병교육대의 책임자로 부임했던 나는 해군의 전력을 지탱해 주는 신병교육대에 대한 남다른 포부를 가지고 국가관이 투철한 용감하고 충성스런 수병들을 길러 내어 해군의 발전과 조국의 국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신병교육대의 분대장들과 함께(뒷줄 왼쪽부터 沈布學, 朴秀玉 소위, 교육대장 姜起千 대위, 姜壽福, 尹錫根 소위, 가운뎃줄은 기혼자들의 부인, 앞줄 왼쪽부터 丁漢哲, 鄭昌龍 소위)

 

그런데 신병교육대장으로 부임한 지 약 2개월 후인 1949년 2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상부로부터 가입대 중에 있는 13기 신병들(1,208명) 중에서 300명을 선발하여 창설을 앞두고 있는 해병대로 보내 주라는 명령을 받았던 나는 특수부대로 보낸다고 해서 신체가 강건한 대원들을 뽑아 해병대의 인수단에 인계했다.

 

그 300명의 해군 13기 신병들은 4월 초 진해 덕산비해장에서 입대식을 가진 다음 해병대에서 실시한 3개월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해병 1기 신병으로 배출이 되었다.

 

그리고 그 13기 신병들이 수료하기 전(7월 말경) 해군신병교육대에서는 이미 모집이 되어 가입대 상태에 있던 14기 신병들(900 여명) 중에서 그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을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해병대로 보냈는데, 해병대에서는 그들을 해병대의 제2기 신병으로 훈련시켰다.

 

한편 해병대가 창설된 (1949.4.15) 바로 그 해 6월, 그러니까 해군 13기 신병 중에서 해병대로 뽑혀간 그 300명의 해병 1기 신병들이 훈련과정을 이수하기 약 1개월 전이었다.

 

통제부에서는 진해지구에 주둔하는 해군·해병대 장병들의 친목과 체력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각 단위부대 대항 체육대회를 진해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개최한 바 있었다. 그 대회에 참가했던 단위부대팀은 해군사관학교, 신병교육대 및 해병대팀을 비롯한 5~6개팀이었고, 경기종목은 씨름과 줄다리기, 장대눕히기, 기마전 및 육상경기 등이었다.

 

그런데 대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막강한 강팀으로 등장한 팀은 신병들을 주축으로 하여 편성한 해병대팀이었다. 얼마나 혹독한 훈련으로 실력을 연마했는지는 몰라도 모든 경기종목에서 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팀이 곧 해병대팀이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판세(版勢) 속에 뜻밖에도 일반의 예상을 뒤엎은 한 가지 종목이 있었다. 그것이 곧 기마전이었다.

 

20여 기(騎)의 기마들(박효열 소위가 지휘하는 해군 신병 1개분대와 해병신병 1개 중대)이 출전했던 그 기마전에서는 해군신병교육대팀의 기발한 비책이 주효하여 해병대팀으로 하여금 참패를 면치 못하게 함으로써 그 전술에 분개한 해병대팀의 소대장과 구대장들이 본부석 앞으로 몰려와서 항의를 하는 소동을 빚기까지 했다.

 

해군신병교육대팀이 짜내었던 그 기발한 비책이란 물론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지마는 상대방 기수(騎手)들의 공격목표가 되는 기수들의 머리를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해 기수들의 머리를 빡빡 깎은 다음 그 머리위에 바셀린을 잔뜩 바르게 함으로써 머리털을 움켜쥐고 상대방 기수를 넘어뜨려야만 했던 해병대팀 기수들이 손이 미끄러워 해군팀 기수들의 머리를 잡지 못해 제대로 맥을 춰 보지도 못하고 한 사람 두 사람 그들의 머리털이 사정없이 뽑혀지는 가운데 추풍낙옆처럼 낙마하고 말았으니 그 기수들이나 소대장과 구대장들로서는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대회본부석에서는 통제부사령관장 김성삼(金省三)대령을 비롯한 여러 단위부대의 지휘관들과 진해시의 유지 및 기관장들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호각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초전에 박살을 내고 말겠다는 기세로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덤벼들던 해병대팀이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부터 고전을 치르다가 참패를 당하자 어떻게 해서 저런 이변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해병대팀의 소대장과 구대장들이 본부석으로 달려와선 "비겁하게 머리를 빡빡 깎고 그 위에 기름까지 잔뜩 발랐는데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머리를 안 깎은 기수들과 재경기를 시켜 주세요." 하며 항의하는 바람에 그제서야 그 이변에 대한 흥미진진한 진상을 알아차리고 포복 절도하며 웃어대고 있었다.

 

신병교육대 13기 7분대 장병들과 (1949. 11. 15 입대기념)

 

하지만 그 날의 대회는 그 기마전을 끝으로 이미 막이 내려 곧 시상식과 폐회식이 거행되고 말았는데, 그러한 사연들로 하여 그 기마전 얘기는 지금도 전설같은 화제로 전해지고 있다.

 

1949년 7월 말경이었다. 나는 통제부사령관장(김성삼 대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 즉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회담을 갖기 위해 진해를 방문하는 장개석(蔣介石)중화민국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 및 그 수행원들을 영접하기 위해 해군 의전장교의 한 사람으로 선발이 된 나는 장 총통이 내진하기 전까지 신병교육대의 신병을 동원해서 함대사령부 정문 오른쪽으로 해서 올라가는 해변고지 정상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까지 차도(車道)를 닦으라는 명령도 아울러 부여 받았다.

 

그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은 일제 때 일본 해군이 건립해 놓은 통신시설 건물을 별장으로 개조한 것이었는데, 함대사령부 정문 오른쪽에서 그 별장에 이르는 약 200미터의 길은 도보로 올라가게 돼 있는 경관이 좋은 산길이었고, 그 산길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잡목들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따라서 그 산길을 차도로 넓혀 닦으려면 일단 그 큰 소나무와 잡목들을 베어 없앤 다음 그 나무들의 뿌리까지 송두리째 캐 내어야만 했는데, 불도져를 갖지 못하고 있던 그 시기에 불과 1주일 동안에 오로지 곡괭이와 삽 등으로 무장한 인력(人力)으로 해내자니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임무를 부여받은 나는 수 백명의 신병들을 주야로 동원하여 예정된 시일 내에 기어코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는데, 지금도 나는 대원들에게 죽을 고생을 시켰던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한편 그 때 덕산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에서는 의장대와 분열식을 거행할 행사부대를 급편하여 국빈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통제부에서는 진해에서 회동할 장 총통과 이 대통령 일행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느라 경황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그 때 통제부에서는 통제부사령장관의 공관을 비워 장 총통과 수행원의 숙소로 제공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별장에서,그리고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겸 국방장관)와 임병직(林炳稷) 외무, 윤치영(尹致英)내무, 윤보선(尹譜善) 상공, 허정(許政) 교통체신부장관 등의 수행각료들은 동문안에 있는 영관급 장교들의 갑호관사에서 유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날(8월 6일) 나 자신도 덕산비행장에 나가 있었지만 오후 4시경 덕산비행장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각료 및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등 출영한 인사들로 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아던 장개석 총통은 그 다음 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태평양동맹 결성과 관련된 정상회담을 하고 8월 8일 오전 진해를 떠났는데, 장 총통이 진해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 대통령의 별장에선 연일 특별한 의미를 갖는 환영연회가 베풀어졌었다.

 

그리고 그 당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는 마지막 거점인 광동성(廣東省)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 때 이미 대만(臺灣)으로 천도(遷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실제로 중국 대륙을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 군대에 넘겨 주고 대만으로 천도했던 것은 그 해 12월 말경이었다.

 

1949년 9월 24일이었다. 나는 당시 18세의 추씨(秋氏) 가문의 규수(秋月景)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때 나의 연령은 24세였고 나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결실의 가을을 맞아 식을 올리게 되었던 두 사람의 혼인은 양가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일어진 일종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식을 거행할 장소는 그 당시로서는 관례상 처가에서 거행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으나 단 하루도 근무지를 떠날 수가 없었던 내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양가에서 나의 근무지인 진해에서 거행키로 합의함에 따라 동문(東門) 밖에 있는 도천(道泉)국민학교 강당을 빌려서 식을 올렸다.

 

그 때만 해도 진해 시내에는 예식장이라는 것이 없던 때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주말이나 경축일과 같은 특별한 휴일을 이용해서 교회나 학교, 또는 공공기관의 강당 같은 곳을 빌려 혼례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 날 혼례식의 주례를 서 주신 분은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김영철(金永哲) 제독이었고, 사회를 맡아 준 분은 후일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영관(金榮寬) 소령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