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1) 6·27의 특명
1950년 6월 25일, 이 날은,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전면남침을 감행한 날이었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아침 신병훈련소(그 해 4월 13일부로 신병교육대가 신병훈련소로 개칭됨)에서는 평일과 다름없이 아침 8시에 조례를 마치고선 훈련소 단지 내에 있는 무논에 모심기를 하고 있었는데, 9시 15분경 급히 그 현장으로 달려온 전령이 해군본부로부터 긴급전화가 걸려 왔다고 하기에 대기 중인 지프차를 타고 가서 전화를 받았더니 그와 같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주면서 비상근무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고, 잠시 후에는 통제부 당직실로부터도 그러한 전화가 걸려 왔었다.
해군본부로부터 그러한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시끄러운 사건들이 빈발하여 펄시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던 그 38선에서 마침내 큰 변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민족상잔의 비극적인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러한 전화연락을 받은 나는 일단 대원들의 모심기 작업을 중단시키고 대원들을 교육대에 집결시킨 다음 자체경비를 강화하는 가운데 언제 있을지도 모를 상부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 날 오후 6시경 통제부로부터 해군본부에서 나를 부산 항만 경비대장으로 임명했으니, 신병훈련소의 교육대와 실무교육대를 전투부대로 편성하여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구두명령을 받게 되었던 나는 즉시 부대의 개편에 착수했다.
그 당시 신병훈련소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가용병력은 6월 13일에 수료식을 거행한 뒤 휴가를 거쳐 실무배치를 대기 중에 있던 417명의 16기 신병들과 신병교육대 내에 설치되어 있던 실무교육대 대원 150여 명 뿐이었고, 8월 초에 입대식을 거행할 예정이던 17기 신병들(약 150명)은 가입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병훈련소장이 대장직을 겸하고 있던 그 실무교육대는 통제부 내의 각 실무부서에서 근무 중인 실무부서 대원들의 재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417명의 16기 신병들과 150여 명의 실무교육대 대원 및 소수의 교육대 기간장병들을 가지고 지휘체계가 그대로 유지된 3개 소총중대와 화기소대와 보급반이 딸린 본부중대를 편성하고 경기관총과 99식 소총 등 교육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교육용화기로 각 중대를 무장시켰다.
그리하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만반의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던 나는 27일 아침 드디어 출동명령을 받고 해군 LST편으로 부산으로 출동하게 되었는데 출동할 때 17기 신병들의 입대와 교육을 위해 잔류시켜 놓은 병력은 교육대의 소수 기간요원과 갑판·기관 기술분대의 대원 약 100명이었다.
부산항만경비대로 개편된 전투부대가 제1정대(艇隊)사령부가 있는 부산항 제4부두에 도착한 시각은 그 날 오전 10시경이었다. 병력을 부두에 상륙시킨 나는 그 병력을 제4부두에서 제1부두 사이에 배치하여 부산항만의 경비에 임했다.
당시 부산항에는 여러 척의 미군 수송선이 입항해 있었고, 부두에서는 수송선에 선적되어 있는 군수물자들을 하역하는 인부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무렵에 도착한 물자들은 주로 각종 탄약(彈藥)과 야전식량 등의 군수보급품이었는데, 그 물자들은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불시에 선적해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유사시에 대비하여 이미 오래 전에 선적해 둔 전쟁물자란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의 명령이 유할 시에는 세계 어느 지역이라 할지라도 즉각 투입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미 합중국의 출전준비 태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해방 후 미국으로부터 주한 미군의 군수물자나 구호품 등을 실은 수송선이 부두에 정박하여 물자를 하역할 때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물자를 하역하거나 창고 안팎에 쌓아 두게 되자 부두에는 이른바 얌생이꾼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얌생이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우리 경비대원들은 불철 주야의 근무를 해야만 했다. 항만 경비를 맡고 있던 기간 중 우리 경비대는 여러 명의 좀도둑을 붙잡아 경찰에 넘겼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C레이션 등을 노린 얌생이꾼들이었고, 한밤중에 실탄상자를 C레이션 박스로 오인하여 훔쳐 가려다 붙들린 자도 있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2) (0) | 2015.01.24 |
---|---|
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1) (0) | 2015.01.22 |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6) 신병교육대 (0) | 2015.01.21 |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5) 덕천호 (0) | 2015.01.21 |
나의 人生旅路 - 1. 해방병단 (4) 중국인의 뇌물 공세 (0) | 2015.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