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1)
해군신병훈련소와 실무교육대를 전투부대로 편성하여 6월 27일부터 부산 항만경비에 임하고 있던 나는 7월 7일 해군본부로부터 해군육전대장으로 보(補)한다는 인사명령과 함께 부산 항만경비대를 해군육전대로 개편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러한 명령을 받은 지 이틀 후 나는 전 병력을 LST에 승선시켜 포항으로 떠났다.
그 날 오후 3시경 LST가 포항경비부에 도착하자 부두에는 경비부사령관 남상휘(南相徽) 중령을 비롯한 간부장교들이 출영하여 우리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도착과 동시에 나는 경비부사령관실로 안내되어 해군육전대 편성을 위해 마련해 둔 경비부의 지침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나 자신의 의견도 피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 사령관과 참모장 박영태 소령, 정보참모 박재옥(朴在玉) 중위, 작전참모 이판개(李判凱) 중위 등으로부터 포항·영일지구의 적정에 관해 설명을 들었는데, 당시 포항경비부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7월 초 울진(蔚珍)을 점령한 북한군의 대부대(5사단)가 영덕(盈德) 북방 14킬로 지점의 영해(寧海)로 남진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울진에서 산악지대로 잠복한 또 다른 부대(766 유격부대)가 구암산(九岩山-△807)과 보현산(普賢山-△1124)및 비학산(飛鶴山-△762)등을 거점 삼아 포항·영천(永川)사이로 뚫고 들어와 포항 서방 20킬로 지점의 기계(杞溪)와 안강(安康)을 거쳐 경주(慶州)를 노리게 될 것으로 판단되니 해군 육전대가 그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적인 분전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 날 저녁식사가 끝난 후 포항기지에서는 부둣가에 있는 3동의 대형 통운창고(함석지붕) 안에서 찌는 듯한 무더위와 극성스런 모기 떼에 시달리며 밤늦게까지 육전대의 편성작업을 진행했다.
해군본부의 편성지침에 따라 이루어진 육전대의 편성은 기간부대(신병훈련소와 실무교육대)의 병력 외에 약간의 포항기지 근무요원과 7월 1일 묵호(墨湖)로부터 철수한 묵호기지 요원 등 약 100명의 인원으로 편성한 용호대(남 사령관이 책임자로 임명한 鄭昌龍중위의 끝 이름자인 龍자와 虎자를 따서 붙인 이름) 장병들과 바로 그 날 강구(江口)로부터 철수시킨 42명의 강구파견대 병력을 가지고 편성한 것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골격으로 그 편성이 이루어졌었다.
※ 이 편성표에 기재되어 있는 장비(무기)가운데 37밀리포는 포항기지의 장비였고, 기타 중기·경기 및 소총 등은 신병훈련소와 현지부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장비들이었다. 그리고 본부중대에서는 행정·보급 및 화기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육전대가 편성된 후 처음으로 치른 전투는 7월 12일 경주군과 영천(永川)·경산군(慶山郡)의 경계지대에 있는 구룡산(九龍山·△675)에 출몰하고 있는 적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치른 전투였다.
7월 11일 오후 4시경 포항기지사령부로부터 적정을 통고받은 나는 즉시 제 1중대를 안강(安康)으로 출동시켰는데, 안강에 도착한 1중대장 정창룡 중위는 현지 경찰지서를 통해 얻은 정보를 근거로 적정을 파악한 후 경주 서방 약 20킬로 지점에 있는 임포(林浦)를 거쳐 그 서남방에 있는 구룡산 중복에 준동하고 있는 적과 2시간여에 걸친 교전을 한 끝에 8명의 적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1시경 1중대가 무사히 귀대하자 나는 그 사이 운용하고 있던 정찰대로부터 산악지대를 타고 죽장(竹長·영일군)방면으로 침투해 오고 있는 적 게릴라부대가 있다는 보고를 해 옴에 따라 그 적을 저지하기 위해 1중대를 먼저 현지로 출동시킨 다음 제 3중대를 추가로 출동시켰다.
그리고선 나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그 날 오후 예비중대와 함께 지휘소를 개설할 기북면(杞北面)의 용기(龍基)국민학교로 이동했는데, 그 날 육전대의 CP에는 영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 제35비행단 소속 제40전투비행대대에서 파견한 2명의 항공지원연락반(장교1,하사관1)이 도착하여 육전대의 작전을 지원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제 때 가미가제(神風)특공대의 훈련기지로 건설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영일비행장(영일군 오천면)은 6·25전쟁 초기에는 전투기의 출격이 가능한 활주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7월 12일부터 착수된 미 공군 제802공병대대 A중대의 활주로 보수공사가 완료된 14일 미 공군 제613항공기지사령부가 도착하게 됨으로써 이곳에 투입된 미 해병대의 제40전투비행대대에 대한 지원임무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7월 16일 아침 6시경이었다. 정찰대와 기북지서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비학산(飛鶴山-△762) 방면에 약 100명의 적이 출몰하고 있다기에 나는 1개 소대의 병력을 현지로 출동시켰으나 적이 죽장(竹長)북방으로 달아나 버리고 없어 가토리(加土里)방향으로 적을 추격했다.
그리고 17일 새벽에 이르러 기북지서장으로부터 합덕리(合德里·죽장면)고지에 약 500명의 적이 잠복하교 있고 그 남쪽의 정자동(亭子洞)방향에도 수백 명의 적이 출현했다는 적정을 통고받게 된 나는 즉시 1중대와 3중대를 차례로 출동시켜 그 적들을 포착 격멸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육전대 장병들은 약 40명의 경찰특공대와 합동하여 영일비행장에서 출격한 F-51 전폭기 편대의 지원에 힘입어 합덕리고지의 적을 포위 공격한 연후에 그 날 밤 9시 30분경 7시간의 격전 끝에 그 적들이 잠입한 합덕리 고지 동북방 약 8킬로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구암산을 완전 점령했다. 이 날의 전투에서 육전대는 적 생포 4명, 사살 161명의 전과를 거둔 반면 아군측은 중경상자 5명을 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5시경 육전대에서는 대장인 나 자신과 1·3중대장이 자리를 같이한 병력 집결지에서 구암산 꼭대기에 꽃혀 있는 인공기(人共旗)를 꺾어 오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했는데, 그 때 특공대를 지원하여 용감하게 그 일을 해냈었던 송세준(宋世俊) 3등병조와 임기현(林基絃)·유명식(兪明植) 일등수병에게는 특공대를 조직할 때 약속한 바에 따라 1계급 특진을 상신했고, 그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운 1중대장 정창룡 중위와 3중대장 박승도 소위에게도 1계급 특진이 상신되었다.
그 수훈의 전투공적자들에 대한 특진 상신은 7월 18일 오후 육전대가 기계로 철수한 후 인사관을 겸한 본부중대장 박수옥 소위에게 지시하여 포항기지사령부를 통해 해군본부에 제출되었는데 그들에 대한 특진명령은 그로부터 10일 후인 7월 28일부로 났었다.
그리고 그 때 기지사령관 남상휘 중령은 나에 대한 훈장 내신도하라고 했으나 나는 그것을 굳이 사양했다. 그러나 그 후 해군본부에서 훈장 내신을 하게 되어 1952년 내가 해병대로 전입한 후(1952년 3월 초) 인공기를 공취(功取)했던 그 구암산 전투의 전투공적으로 나는 미국정부로부터 동성 무공훈장을 받았다.
한편 구암산 전투 때 공취한 그 인공기는 귀한 노획품으로 처리되었다. 왜냐 하면 포항기지사령관 남상휘 중령이 그 인공기에 관한 소식을 대구(大邱)에 있는 국방부 해군연락장교실장 김대식(金大植) 중령을 통해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에게 보고를 함에 따라 진귀한 기념물로 여기게 된 신 장관이 지체없이 국방부로 보내라고 하명하는 바람에 신명이 난 남 사령관이 그 인공기를 신주(神主)모시듯이 상자에 담아 대구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계로 철수하여 정찰활동을 강화시키고 있던 나는 정찰대에서 연행해 온 수상쩍은 용의자 한 사람을 밤을 세워가며 심문한 끝에 그 자의 정체도 파악을 하게 되고, 또 그로부터 766유격부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피난민을 가장하여 한 무리의 피난민들 틈에 끼여 있던 그 30대 중반의 용의자를 심문함에 있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세웠다. 즉 그가 어떠한 자이든, 그리고 그 자로부터 어떠한 정보를 얻어 내게 되든 얻어 내지 못하게 되든 간에 심문을 마치게 되면 일단 그를 되돌려 보낼 작정이었다.
내가 그러한 방침을 세우게 된 것은 그를 아군측의 심리전 요원으로 역이용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침을 세운 나는 마치 묵비권을 행사하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 자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우정 저녁식사를 융숭하게 대접한 다음 담배도 꺼내 피우게 하는 등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면서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나 성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자 나는 만약에 나의 심문에 순순히 응해주기만 하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대로 되돌려 보내 주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던 정보는 이러한 것들이었다.
즉 해군 육전대를 「물개부대」라고 부르고 있던 그 경상도 말씨의 용의자는 자기 자신은 인민군 유격대의 첩자(諜者)에 불과하다고 말한 다음 지금 인민군 해방전선에서는 6·25전쟁 전에 남한에서 월북한 강태무(姜太武) 소령과 표문원(表文源)소령이 중좌로 승진하여 회령(會寧)군관학교 교장이 군관학교 학생들을 편입시켜 편성한전투사단의 연대장으로서 출전하여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또 머지 않아 부산이 해방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 용의자로부터 그러한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가 말한 강태무 소령과 표문원 소령의 월북사건이 실제로 있있던 사건이었고, 또 그가 머지 않아 부산이 해방될 것이라고 공언을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단순한 첩자가 아니라 북한군의 선무공작 요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나대로 이러한 말을 그에게 하며 심리적으로 그를 역이용하려고 했다.
즉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은 북한군의 만행을 응징하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 유엔 회원국의 군대가 속속 한국에 도착하고 있으니 머지 않아 북한군이 궤멸을 당할 것이라는 말과 지금 우리의 배후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첩첩이 진을 치고 있으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라고 했던 것인데, 내가 약속대로 그 때까지 제지를 당해 있던 피난민들과 함께 그를 되돌려 보내자 그는 조금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 그 첩자란 자가 내가 한 말을 어느 정도 믿으려 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반신 반의를 했는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스스로 첩자라고 했던 그 용의자를 간혹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즉 설사 그 당장에서는 내가 한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기계와 포항, 그리고 안강까지 점령했던 그들이 결국 영천이나 경주로 진출하지 못하고 안강지구에서 궤멸을 당하고 말았을 때 만약에 그 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 한다면 내가 했던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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