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3)
7월 말경이었다. 나는 강구국민학교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3사단본부를 방문했다. 당시 3사단은 북한군 5사단과 영덕지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까지 영덕은 아군에 의해 확보되고 있는 상태였고, 그 북방고지 일대에서는 요란한 포성이 간단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강구국민학교 교실에 자리잡고 있는 사단본부에 들렀더니 그 곳에는 사단장 이준식(李俊植) 준장 외에 견습을 위해 그 곳에 와 있는 체구가 왜소한 최덕신(崔德新) 준장(후일 외무장관, 천도교 교령 등 역임)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사단장 이준식 준장은 그로부터 약 10일 후 학도병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수도사단장 김석원(金錫源) 준장과 임무를 교대했었다.
사단본부에 들러 사단장을 비롯한 여러 참모들과 두루 인사를 나누고 작전상의 협의를 했던 나는 같은 학교 건물의 다른 교실에 있는 23연대 CP로 가서 세칭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연대장 김종원(金宗元) 중령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거구인데다 디룩디룩 살이 쪄 있던 그는 더위를 이길 길이 있었던지 위통을 홀랑 벗어 버린 채 교실 의자에 앉아 탁자 옆에 놓여져 있는 대바구니 속에 담긴 돼지고기를 쩍쩍 씹고 있다가 나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격식이나 예절 따위에는 전혀 구애됨이 없이 "반갑심니더, 마 이리 좀 앉으시이소, 그리고 이 고기도 즘 잡숫고예"하며 소탈하고 인정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당시 영덕지구에 배치되어 있던 육군 3사단은 1947년 12월 부산에서 편성된 육군 제3여단이 1949년 12월 제3사단으로 개편된 것으로 휘하에 있는 2개 연대(22연대와 23연대) 중 경상도 지방에서 공비토벌에 임하고 있던 23연대는 7월 초 북한군 5사단이 울진(蔚珍)을 점령할 그 시기에 사단본부와 함께 영덕지구에 투입이 되고, 6.25직전 수도권에 배치되어 있다가 중부전선의 지연전에 참가하고 있던 22연대는 7월 26일경에야 강구지구 전선으로 이동하여 본대에 합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포항기지에서 10여 일 동안 휴식과 재정비를 하고 있던 육전대가 재출동을 한 날은 8월 5일이었다.
그 사이에 전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있다. 즉 개전 이래 파죽지세와도 같은 북한군의 침공 앞에 계속 지연전을 거듭해오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에 따라 8월 1일을 기해 낙동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7월 말경에 이르러 영덕, 안동, 함창, 상주, 김천, 진주를 연하는 선으로 침공하여 구형(矩形)의 낙동강 외곽선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게 된 북한군은 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서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東)-서(西)로 80킬로, 남북 약 100킬로의 종심(縱深)이 얕은 이 낙동강 방어선은 영덕에 인접한 동해가 그 동쪽 한계선으로 그어져 있었고, 영덕에서 낙동리(洛東里)-왜관(倭館)에 이르는 선이 그 북쪽 한계선, 그리고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지(南旨)서쪽이 남쪽 한계선으로 돼 있었는데 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피아군 간의 사활을 건 피의 대공방전이 벌어졌던 시기는 8월 5일을 전후한 때였다.
그런데, 이러한 정세 상황 속에 해군 육전대가 투입이 된 영덕·포항·기계지구의 사정은 북한군 12사단의 출현으로 인해 느닷없이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개전 당시의 단대호(單隊號)는 7사단(2군단)이었으나 홍천(洪川)지구 전투 후 12사단으로 개편이 된 이 부대는 원주-제천선으로 내려오고 있던 중 갑자기 안동(安東)으로 동진(東進)하여 기계로 지향한 것이었는데, 그 12사단의 동진 목적은 5사단이 투입된 동해안지구의 전선이 유엔군의 함포사격과 함재기의 폭격으로 인해 전진속도가 지체됨으로 해서 포항을 서측방으로부터 압축하여 5사단의 남진(南進)과 그들의 경주 점령을 가속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기계를 잃는 것은 곧 경주를 잃게 됨이며 경주를 잃게 되면 곧 부산 교두보를 잃게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있는데, 그러한 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곧 그 12사단의 기계 침공이었고, 또 그 적을 안강(安康))지구에서 격파한 아군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재출동을 하게 된 육전대의 소임은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8월 5일 포항기지에서 제공해 준 10여 대의 트럭에 병력을 분승시켜 안강에 도착했던 나는 그 다음 날 다음과 같은 부대배치를 하고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즉 부대 지휘소를 안강 읍내에 설치했던 나는 제1중대를 기계국민학교 서북방 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2중대를 도덕산과 옥산동 후방고지에, 그리고 3중대를 안강읍에 배치하여 안강읍에 대한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한편 1개 소대 병력을 무릉(武陵) 두류리(斗流里)로 파견하여 그 일대의 적정을 람색하게 했는데, 그 날 제1중대는 운주산(雲住山) 중복에 잠복해 있는 약 1개 소대 병력의 적과 교전을 한 끝에 25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8월 7일 청송군(靑松郡)과 군위(軍威)․영천(永川)․영일군의 경계지대에 있는 보현산(△1124)을 점령한 북한군 12사단의 첨병부대가 바로 그 다음 날 장갑차 및 야포부대의 지원하에 마침내 기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함에 따라 나는 예비대인 3중대를 이끌고 기계국민학교로 이동하여 그 곳에 지휘소를 개설한 다음 옥산동에 배치시켜 놓은 2중대를 기계국민학교로 이동시켜 예비대로 확보하는 가운데 3중대를 기계 북방에 진출해 있는 1중대에 합류시켜 우군 공군기의 지원하에 적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결사적인 노력을 전개한 끝에 중대장급 군관을 포함한 5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기계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던 날은 바로 그 다음 날인 8월 9일이었다. 그 날 새벽 적의 대부대가 기계 서북방의 산악지대와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자 나는 아침 9시경 대거 출격한 우군 공군기의 지원하에 제1중대로 하여금 계천(溪川)지대를 이용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고 2중대는 달성동 전방고지를 이용하여 적의 전면(前面)을, 그리고 제3중대를 예비대로 확보한 가운데 비록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서나마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적의 기계 진입을 일단 저지시킬 수가 있었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1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둔 반면 1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그런데 우군기의 맹폭격과 육전대의 결사적인 분전으로 적의 공세가 일단 주춤해지자 나는 그 날 오후 육군 25연대와 임무를 교대하라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기계국민학교에 위치하고 있던 육전대의 지휘소를 단구리(丹邱里)남쪽 벽계리로 옮기는 한편 CP주변과 기계면의 북방과 서남방 고지 일대에 배치시켜 놓은 육전대의 병력을 벽계리의 새로운 CP근처로 이동시킬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그 날 오전 11시경 벽계리의 육전대 CP에는 국방부 해군연락장교단실에 파견되어 있던 김대식(金大植) 중령이 방문하여 격전에 지쳐 있는 육전대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는데, 그 날 김 중령은 해군총장의 명의로 된 금일봉을 장병들에 대한 격려금으로 가지고 왔었다.
해군 육전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육군 25연대가 집결지인 나단리에 도착한 시각은 그 날 오후 3시경이었다. 대구(大邱)에서 차량편으로 출동을 했던 그 25연대의 최초의 집결지는 다산리(경주군 강동면)남쪽의 노당리였는데, 노당리로부터 벽계리 서북방의 나단리까지는 전술대형을 갖추어 도보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한데, 25연대 장병들이 현지에 당도했을 때 육전대 대원들은 육군장병들이 착용하고 있는 군복과 군화, 그리고 M1소총을 비롯한 각종 장비가 완전 신품인 것을 보고 부러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특히 총신에 묻어 있는 구리스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그런 신품 M1소총을 눈여겨 보고 있던 대원들은 얼마나 그러한 소총이 갖고 싶었던지 목구멍에 마른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일본군이 남겨 두고 간 99식 소총, 한 발, 한 발씩 실탄을 장전하여 쏘게 돼 있던 그 낡아 빠진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육전대 대원들로서는 당연한 부러움이 아닐 수가 없었다.
25연대장(유모 중령)이 집결지에 도착하자 나는 내가 휴대하고 있던 상황판(흑백으로 인쇄된 지도)을 펼쳐 들고 작전지역의 지형 지세와 내가 파악하고 있는 개략적인 적정을 설명해 준 연후에 육전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고지들을 도면과 관측 등을 통해 가리켜 주며 속히 부대교대가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병력을 배치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에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데 왜 속히 병력을 배치하지 않소. 이러고 있다가 육군이고 육전대고 다 죽일 작정이요?" 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그토록 그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첫째는 육군부대가 방어진지에 진입해야만이 진지 인계에 대한 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가 있었고, 둘째는 일몰 시를 기해 단행하려 하고 있던 육전대의 부대이동에 위기가 초래될 염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대교대가 완료된 시각은 그 날 오후 6시경이었다. 진지를 인계하고 벽계리의 집결지에 도착했던 육전대 대원들은 점심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과수원 일대에 드러 누워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었고, 집결지의 한 모퉁이에서는 취사병들이 서너 개의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고 있었다.
대원들에게 주먹밥 한 덩어리씩이 배식된 시각은 오후 7시경이었다. 낮잠을 자고 있던 대원들은 게눈 감추듯이 그 주먹밥 덩어리를 먹어 치우곤 부대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내가 세워놓은 복안에 따라 1중대를 25연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달성동 서남방(노당리 북방)고지로 올려 보냈다가 일몰 시를 기해 은밀히 빠져 나와 이동제대(移動梯隊)의 후속제대로 따라오게 했다. 내가 그러한 조처를 취한 까닭은 육전대의 부대이동을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그 날 오후 8시경 부대이동을 개시한 육전대가 바야흐로 뉘엿뉘엿 타들고 있는 석양을 등지고 한참 동안을 도보행군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기계의 운명도 그 석양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을 기해 적의 결정적인 대공세가 취해졌기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요란한 총포성이 기계의 하늘과 땅을 뒤흔들기 시작했고, 그런 상황 속에 육전대와 임무를 교대한 그 육군 25연대의 병력이 배치된 고지들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화하고 있었다. 참으로 생과 사가 엇갈리는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고, 특히 교대하자마자 그러한 변을 당하게 된 25연대 장병들로서는 마치 죽을 곳을 찾아온 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날 저녁 초전에 박살이 나고 말았던 그 육군 25연대는 6·25전쟁 초기 육군 2사단에 배속되어 있다가 해체가 된 후 그 잔존병력이 순천, 김해 등지를 거쳐 대구로 이동해 오는 과정에서 낙오병들과 학도병들을 주축으로 대구에서 재편을 한 신편연대였다.
그리고 그 때 육전대의 후미에 속해 있던 1중대의 꽁무니에도 불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현장에 있던 1중대장 정창룡 대위는 허리춤에서 뽑아 든 권총을 치켜 들곤 땅거미가 지고 있는 그 일몰의 하늘을 향해 빵, 빵, 실탄을 쏘아대며 정신없이 내닫고 있었다.
한편 부대이동을 할 때 나는 가는 도중 적의 척후병이나 정찰대의 기습공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우정 도로를 따라가지 않고 도로를 벗어난 개활지의 논밭이나 산기슭의 논두렁을 타고 가게 했으므로 대원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따라서 그 날 밤 안강을 거쳐 포항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 나와 행동을 같이 했던 김대식 중령도 여러 차례 무논에 빠지거나 발을 헛디뎌 논두렁에서 떨어져 골병이 드는 등 형용키 어려운 고생을 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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