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4)
그 날 밤 육전대의 전 병력이 안강읍에 집결했던 시각은 밤 10시경이었다. 안강에 도착해서 감지했던 것은 시가지가 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었고, 그러한 시가지에서 50대의 한 민간인을 목격하게 되었던 나는 텅 빈 공간 속에 혼자 서성거리고 있는 그 사람이 수상쩍게 여겨져 권총을 들이대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안강읍을 지키고 있는 면장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그런 대꾸를 한 그가 더욱 수상스럽게 여겨졌지만 그 이상 그의 정체를 확인해 볼 길도 없었고, 또 그럴 겨를도 없었다.
안강읍에 도착한 나는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한 다음 1중대장 정창룡 대위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김대식 중령과 함께 포항기지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내가 1중대장에 지휘권을 이양하고 기지사령부로 돌아가게 된 것은 그 전날 밤 기지사령부를 통해 나에게 전해진 해군본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휘권을 이양하기 전에 내가 취했던 조처는 안강에서 영천과 포항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과 시가지의 요소에 경비를 강화하는 일과 텅 비어 있는 안강역의 기능을 회복시켜 포항역으로 운송되는 3사단의 군수물자 수송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게 하는 일 등이었다.
당시 3사단(영덕)으로 보내자고 있던 군수물자는 일부는 해군 수송선 편으로 운송되고, 일부는 안강역을 거쳐 포항역으로 운송된 다음 트럭에 적재하여 현지로 수송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텅 비어 있는 안강역의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응급조처를 장구했다. 즉 대원들 중에 과거 기관사나 역부로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세 사람의 경력자가 있어 그 중의 한 사람(선임자)을 역장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두 사람을 역부로 임명하여 역의 기능을 회복시키도록 했다.
한편 내가 안강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나와 김대식 중령을 안내해 가기 위해 와 있는 이판개 중위(포항기지 작전참모)가 하사관1명을 데리고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지휘권을 이양하는 즉시 나는 김 중령과 함께 그들을 따라 도보로 포항으로 떠났다.
그 날 저녁 이판개 중위는 기지를 떠나 올 때는 4분의3 트럭을 타고 왔으나 오는 도중 적의 척후병과 조우하게 될 염려 때문에 차를 잉어장이 있는 제산(弟山)터널 입구 부근에 세워 두고 그 곳에서 안강까지는 도로를 벗어나 산기슭과 논밭과 하천을 가로지르며 왔다기에 부득불 같은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안강읍에서 터널이 있는 곳까지는 약 5킬로미터, 그 5킬로의 밤길을 그런 식으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 일행은 어디서 불쪽 나타나게 될지 모를 적의 척후병을 경계하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마치 네 사람 모두가 아군의 척후병이 된 것처럼 민첩한 행동을 취했다. 한여름철의 그 산기슭과 하천지대에는 무수한 반딧불이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터널 입구까지 걸어가게 된 일행은 그 곳에 대기시켜 둔 차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는데, 기지에 도착한 나는 기지사령관 남상휘 중령에게 내 자신의 정세판단에 따라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즉 기계·안강지구의 상황이 위급하니 금명간 포항시민들을 소개시키고 기지사령부를 철수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자리를 같이 하고 있던 김대식 중령도 나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나와는 정세판단을 달리하고 있던 남상휘 중령은 그러한 건의를 무시한 채 있다가 결국에는 8월 11일 새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포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주둔부대만을 의지하고 있던 포항시민들로 하여금 전전 긍긍케 하였고, 뒤늦게 피켓보트를 타고 기지를 탈출하고 있던 남 사령관 자산도 그의 호위병(헌병)이 적탄에 맞아 옆에서 쓰러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포항기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곳에는 해군본부에서 보내온 해군 1호정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이 남겨 두고 간 유일한 함정인 1호정은 시속 7노트 정도밖에 내지 못하는 예인선(曳引船)이었다. 해군본부에서 나를 위해 1호정을 보내게 된 것은 그 당시 영천·기계 지구의 상황이 불투명한 때였으므로 내가 육로로 내려오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군본부에서 나를 후방으로 내려오게 했던 까닭은 해군 육전대를 해체하기에 앞서 그 동안 문을 닫아 놓은 신병훈련소를 운영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내가 지취권을 이양한 후 해군육전대는 정창룡 대위의 지휘하에 8월 20일 육전대가 해체될 때까지 안강에 설치된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어 약 10일간 그 전투사령부 예하의 육군부대와 합동하여 기계전투와 일시적인 포항시가지 탈환작전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했다.
포항이 점령당한 8월 11일 육본명령에 의거 설치된 그 포항지구전투사령부는 육군 수도사단을 기간으로 편성된 것이었는데, 그 예하에는 육군 17연대와 육군 25·26연대, 육군 민기식(閔機植)부대, 육군 제1연대, 육군 독립제2유격대대, 육군 독립기갑연대 등이 편입되어 있었다.
8월 11일에서 8월 20일에 이르는 그 기간 중 우리 해군 육전대는 그 배속부대의 일원으로서 8월 14일부터 18일 사이에 감행된 기계탈환작전과 안강방어전 등을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8월19일에는 일시적인 포항시가지 탈환작전에 참가한 뒤 해군경비부의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했는데, 그 때 국기가 게양된 그 경비부에서 육전대를 지휘했던 정창룡 대위는 바로 그 시기에 철수지인 감포(甘浦)에서 소해정 516호를 타고 기지에 상륙한 기지사령관 남상휘 중령과 극적인 악수를 교환하고 상황설명을 하는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편 육전대의 해체일인 8월 20일 전투사령부에 복귀하여 수도사단장으로부터 공적표창과 표창금을 받았던 육전대 장병들은 그 날 오후 3시경 감포에 있는 경비부사령부로 가 있다가 그 다음 날 포항경비부의 위병분대 편성요원으로 잔류한 소수 인원을 제외한 거의 전원(470명)이 해군 수송선에 승선하여 진해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470명의 인원 가운데 애당초 신병교육대에 소속되어 있던 인원은 일단 원대로 복귀하고 나머지 인원은 통제부의 병력 배치계획에 따라 배치되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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