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6)
영덕지구 전선에 위기가 감돌고 있던 1950년 7월 9일 밤 포항기지의 통운창고 안에서 편성에 착수하여 7월 10일부로 발족을 보게 되었던 해군 육전대는 그로부터 만 1개월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서 영덕지구에서 북한군 5사단의 동해안 남진을 결사 저지하고 있던 육군 3사단에 대한 작전지원과 포항 서측방을 간단없이 위협하고 있던 적 게릴라부대의 활동 분쇄를 위해 구암산을 공격 점령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둠으로써 세칭 물개부대로서의 용명을 떨쳤다.
그리고 8월 초에 이르러서는 그 시기를 기해 기계지구로 동진(東進)한 북한군 12사단의 기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적인 분전을 함으로써 그만큼 유엔군과 국군의 지연작전을 위해 기여를 했고, 또한 8월 11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된 후에도 육전대가 해체되기 직전까지 계속 용전분투하여 충무공의 후예로서의 빛나는 구국정신을 발휘 했다.
그런데 해군 육전대의 활약과 관련해서 간혹 나는 병력도 열세하고 보잘것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던 육전대 장병들이 그만큼 용감하게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육전대의 주축이 된 중졸이상의 학력 소유자인 그 16기 신병들이 신병훈련소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병사들이었고, 둘째는 그 16기 신병들이 신병교육대의 지휘체계 그대로의 조직체 내에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대원들이 해군의 명예를 걸고 일심동체가 되어 용전분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 이유를 분석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1중대장을 역임했고, 또 내가 전선을 떠난 후 약 10일간 육전대장 직무대리를 했던 정창룡 씨(예비역 대령)도 나의 그러한 생각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특히 그 16기 신병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바 있었다.
이상으로 해군육전대 시절에 대한 얘기를 마치기로 한다.
이 글을 맺으면서 나는 그 때 나와 함께 싸우다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전몰장병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며, 아울러 이 자리를 통해 육전대 용사들이 대한민국 해군의 명예를 걸고 사력을 다해 분전했던 그 날의 그 격전지에 그 날의 전적(戰蹟)을 기념하고 결연한 호국의지를 불태운 그 육전대 용사들의 빛나는 투혼을 기리기 위한 해군육전대의 전적비가 하루 속히 건립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아쉬움과 소망을 함께 피력해 둔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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