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4) 가족들의 수난
6·25전쟁 때 호남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는 그 해(1950년)7월 16일부터 7월 26일에 이르는 불과 10일간이었다.
그런데 당시 호남지구로 침공했던 그 북한군(5사단)은 다른 점령지역에서 빚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특히 경찰관 가족이나 군인가족 또는 그 지방 우익계 인사나 그 가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천인공노할 그 양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은 이른바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분자를 처단한다고 한 그 인민재판의 형식을 빌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 회고록을 통해 남겨 두고자 하는 얘기는 나의 혈친과 어린 내 동생들이 전전 긍긍했던 그 통한의 적치(敵治)하에서 어떤 일을 겪었고, 또 어떻게 하여 파리 목숨 같던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한 결코 잊혀져선 안 될 증언이다.
그 당시 나의 가친께선 고향인 영암(靈崙) 회문리에서 정미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 때 일본(大阪)에서 기계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목포 시내에서 철공소를 경영하고 있었으나 일제 말기 때 미군기의 폭격이 감행되는 바람에 가족들의 보호와 소개(疏開)를 위해알단 철공소의 문을 닫고 고향인 영암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차려서 운영해 온 것이었고, 철공소를 그만둘 때 철공소의 기계는 분해를 해서 영암으로 운반하여 창고 속에 보관해 두었었다.
북한군이 영암을 점령했을 당시 회문리의 나의 집에는 나의 양친과 상남(商南·당시 16세) 대오(大午·당시 14세)등 두 남동생과 춘회(春花) 춘매(春梅) 춘실(春實)등 세 여동생이 살고 있었으며, 첫째아우 남주(南柱)와 둘째 아우 화엽(化燁)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내가 복무하고 있는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진해로 와서 대기 중에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들어온 후 창고 속에 넣어 둔 철공소의 기자재를 몽땅 빼앗기고 말았던 나의 양친께선 장남인 내가 해군장교(당시 소령)라는 이유 때문에 혹 무슨 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내심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그 초기에는 우리 집 혈육에 대한 직접적인 살상은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그 집을 때려 부숴 버리고 그 인근 부락에 있는 나의 백부 집은 불질러 없애 버리고 말았는데, 나의 혈육들이 살고 있던 그 집을 불살라 없애 버리지 않고 부숴 버런 까닭은 그 집에 불을 지를 경우 바로 그 옆에 있는 비각(碑閣)과 또 다른 민가에 불이 번질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9월 중순경이 되자 내무서에서는 나의 가친을 출두시켜 정미소를 가동시킬 기름을 숨겨 둔 것이 없느냐며 캐묻기에 그런 기름이 전혀 없다고 하자 그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나의 가친께선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즉 그들이 내렸던 명령은 영암에 있는 영암정미소(정부미 도정공장)를 가동하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나의 가친께선 죽어도 협조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하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다가 그 길로 내무서(영암경찰서)를 탈출하여 수일간 황천술(정종) 양조장의 대형 술통 속에 숨어 있기도 했고, 또 며칠간은 들판의 노적가리 속에 파고들어 몸을 숨기는 등 연합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쫓겨갈 때까지 그야말로 눈물겨운 도피 행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연합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이 쫓겨 달아나기 시작했을 때 나의 어머니께서는 놈들이 마지막으로 학살을 자행한 비각 앞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는데, 그들이 나의 어머니를 처형하려 했던 것은 내가 군에 가 있었는데다 나의 가친이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을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각 앞으로 끌려 나간 나의 어머니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즉 처형을 하려던 순간 '아지'라는 별명을 지닌 처형 하수인의 아버지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준, 세상에 착한 그 마님을 죽여선 안 된다."며 소리쳤는데, 그 소리가 그 아지의 마음뿐 아니라 아지와 함께 있던 다른 적색분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됨으로써 나의 어머니를 그 형장에서 빼내 준 것이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너무나도 극적이고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그러한 장면이 아니었던가 싶다.
한편 나의 고향이 적 치하에 놓여 있는 동안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진해에 와 있던 나의 동생들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시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특히 나는 내가 해군장교라는 그 이유 때문에 혹시 그 어떤 변이라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의 처지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 속히 때가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해(1950년) 9월 15일에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하여 유엔군과 국군이 반격작전을 전개하게 되자 드디어 그러한 시기가 도래했구나 하고 마음을 조이고 있던 중 마침 해군본부에서 목포시의 치안회복과 패잔병 소탕을 위해 1개 대대의 병력(백남표 부대)을 출동시킬 때 당시 군번 없는 학도병의 신분으로 통제부 정보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의 둘째 동생 화엽이가(첫째 동생 남주는 당시 해군18기 신병으로 가입대 중에 있었음) 그 부대에 종군하게 됨으로써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었던지 살아 남은 사람들끼리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아군이 진격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부모형제를 구출하여 그 길로 목포로 피난시킬 수가 있었고, 또 그 후 다시금 정세가 악화되었을 때는(유엔군과 국군의 북한지역 철수 시)역시 나의 둘째 동생 화엽이가 교통부의 등대보급선(燈坮補給船)에 부모님들과 어린 동생들을 편승시켜 홍도와 흑산도, 거문도 등을 거쳐 그 해 12월 말경 그 보급선의 종착항인 부산항에 도착한 후 내가 근무하고 있던 진해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나의 부모형제들은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던 그 수난의 여로를 마칠 수가 있었고, 나는 나대로 부모형제들에 대한 근심 걱정을 떨치고 오로지 군무에만 정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회문리 사람들은 이심전심 이런 말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고 한다. 즉 아지 아버지가 아무개(나의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일제 때부터 정미업을 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던 그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적선을 많이 한 때문이라고들 했는데, 그러한 말을 전해 듣게 되었던 나는, 명심보감(明心寶濫)에 나오는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그 값진 글귀를 나의 가훈으로 삼아 자자손손 전해 내리는 가운데 조상들께서 자손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 그 깊은 은덕을 기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한편, 북한군이 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한 직후 영암군 신북면의 시가에서 피난을 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던 나의 사촌 누이동생은 그 고을을 수복한 경찰관들이 인민군들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 내어 총살하는 곳으로 끌려갔으나 총살을 당하기 직전 "나의 오빠가 해군 소령인데..."라고 했던 그 한 마디 말이 구원의 손길이 되어 자신의 죽을 목숨을 구원받게 되었는데, 구명에 읽힌 기적과도 같은 그 얘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남편과 시아버지 등 남자들은 모두 피난을 가 버리고 시어머니를 비롯한 2~3명의 여자 식구들과 같이 집을 지키고 있던 나의 사촌 누이동생은 7월 말경 그 마을로 쳐들어온 북한군이 집도 넓고 농사도 많이 짓는 그 집으로 들어와선 잠잘 곳도 제공하고 밥도 지어 내라면서 강박하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능한 협력을 해 준 것이 화근이 되어 부역자로 끌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장소에서 함께 포박을 당해 끌려갔던 시어머니가 먼저 총살을 당하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공포에 질려 있던 나의 누이는 그 현장에서 계급이 제일 높아 보이는 한 경찰관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지 그래" 하는 소리에 불현듯이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라 "지 오빠가 해군 소령인데 어찌 지가 마음에 내켜서 그런 짓 했겠시요‥‥‥“하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더니 뜻밖에도 그 경찰관은 오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고, 나의 누이는 강기천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 석 자를 대자마자 그 경찰관은 깜짝 놀라며 그게 정말이냐고 하더니만 잠시 들고 있던 장부를 들쳐본 후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즉석에서 내 누이를 석방시켜 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경찰관은 어떤 연유로 내 이름 석 자를 듣고 내 누이를 살려 준 것이었을까?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즉 내가 신병교육대의 대장으로 있던 어느 날 내가 알 만한 고향의 한 경찰관으로부터 보내 온 편지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슨 해군 신병교육대에 입대해 있던 자기 동생이 도망을 와서 자기가 피난해 있는 곳에 와 있는데, 설득을 해서 데려갈테니 선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전시 도망자이긴 했지마는 자발적으로 귀대한 그 도망병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고 잘 처리해서 무사히 훈련을 받고 실무에 배치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었는데, 우연히도 그 날 그 곳에서 내 누이를 살려 준 그 경찰관이 나로부터 그런 신세를 졌던 그 경찰관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구명을 받게 되었던 내 사촌 누이동생은 그 경찰관의 말대로 진작 그런 말을 했었더라면 시어머니의 목숨도 구할 수가 있었을 텐데... 하고 죽은 시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한없이 통곡을 했다고 하는데, 이승에 태어나서 나와 더불어 그러한 인연을 맺었던 그 추억 속의 인간 가족들이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새삼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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