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1) 주둔부대의 임무

머린코341(mc341) 2015. 1. 29. 02:27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1)주둔부대의 임무

 

1950년 8월 하순경, 해군 육전대로부터 신병훈련소장으로 복귀하여 신병교육에 매진하고 있던 나는 1951년 4월 1일부로 해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해군고등군사반(제1기) 입교발령을 받고 3개월간에 걸친 교육을 이수했으며 수료일인 6월 27일부로 해군 백령도(白翎島) 주둔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황해도 장산곶(長山串) 남쪽 38˚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백령도에 우리 해군의 전진기지(해군 백령도 주둔부대)가 설치된 것은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하순경이었고, 그 당시 제3대 주둔부대장으로 취임했던 나의 계급은 임시중령이었다.

 

그 날 오후 LST가 용기포(龍機浦)선착장에 당도했을 때, 그 곳 부두에는 나와 교체발령을 받은 부대장 문기섭 소령을 비롯한 각급 참모장교들과 해병중대장(李元坰 중위) 및 백령면(옹진군)의 면장, 어업조합장과 지서장 등 여러 기관장과 유지들, 그리고 미 8군 소속 동키부대 사령관 버크 소령과 주둔부대의 직할연대장(김장성 씨)등 많은 인사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 용기포란 부두는 나로서는 처음 상륙을 해 본 곳이었다. 그리고 백령도에 대한 나의 선입관은 이 섬이 적지(敵地)에 근접되어 있는 섬인 만큼 그 첫인상과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고 위협적인 면모를 띠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막상 심청전(沈淸傳)의 전설이 깃든 장산곶과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적지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그 용기포 부두에 내려서고 보니 적지에 인접한 최전방 도서 같지 않게 느껴지는 평온함과 나를 맞이해 준 분들의 따뜻한 환영때문인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진촌 국민학교에서 거행한 해군창립 6주년 기념식(1951. 11. 11)

 

한편, 출영해 준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나는 그 길로 미 8군 휘하의 레오파드기지 사령부를 예방하여 레오파드기지 사령부의 유격대 현황을 청취했는데, 그 브리핑 석상에서 처음으로 동키부대의 편성과 활약상을 전해 듣게 되었던 나는 백령도 북방에 산재하고 있는 그 숱한 연안도서(沿岸島嶼)와 내륙기지에서 실지회복(失地恢復)과 승공통일(勝共統一)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그 수많은 반공청년들의 구국적인 투쟁에 대해 말할 수 없이 깊은 감동을 받았고, 또한 그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오파드기지 사령부에서 브리핑을 청취했던 나는 그 길로 해군주둔부대 상황실로 안내되어 부대 현황을 청취했는데 주둔부대의 내력과 임무와 관련된 주요 현황은 다음과 같았다.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하순경 해군본부에서는 서해의 요충지인 백령도에 해군부대를 주둔시켜 그 부대로 하여금 백령도에 대한 경비임무와 서해연안 각 도서에 대한 첩보 수집과 경비, 피난민의 구호와 후송, 동키부대에 대한 작전 협조, 서해에서 작전 중인 우리 해군 함정과의 연락 유지 및 작전 지원, 행정이 미치지 않는 도서에 대한 민정활동(民政活勳)등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고, 또한 그 당시로서는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던 진남포(鎭南浦)에 대한 우리 해군의 전진기지 역할도 아울러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일은 퇴로(退路)를 차단당해 황해도(黃海道)연안지구로 몰려와 있는 피난민들을 일단 가까운 연안도서로 철수시키는 일과 그들에 대한 구호 및 후송, 그리고 그들의 자위(自衛)와 향토 사수(死守)를 위해 조직한 무장의용대(武裝義勇隊)에 대한 활동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사항, 즉 「서해지구의 피난민들」과 「유격부대의 내력」에 관한 얘기를 차례로 언급하기로 한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