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3)동키부대의 편성 배경
1·4후퇴 때 황해도 내륙지역과 연안도서에 작전기지를 두고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무장유격대의 지원을 위해 맨 먼저 관심을 표명했던 것은 서해 해상에서 작전 중에 있던 PC703함(함장 李成浩 중령)이었다.
1951년 1월 16일자부로 해군본부에 타전된 아래와 같은 보고문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1. 한국군 김 대위가 지휘하는 연풍부대는 우리(제703호)함포사격의 협조하에 15일 야간의 월사리(XC 7873)전투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이들은 많은 수의 적군을 사살하였으며 많은 수의 무기를 노획하고 포로를 생포하였다고 보고해 왔다.
2. 적은 새로운 부대를 투입할 것으로 판단된다.
3. 피난민들은 주로 애국청년들과 내륙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이다. 이들 약 1,500명은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4. 우리(제703호)는 내륙에 남아 있는 식량들을 수송할 예정이다.
5. 연풍부대는 그들이 게릴라부대로서 내륙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남쪽으로 철수 중인 애국청년들과 함께 단양호(BM 8501)를 타고
철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시를 내려 달라고 요구해왔다. 연풍 의용군은 철수하여 한국군과 합류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한다.
6. 우리(제703호)는 전투임무를 한국함정 제704호에 완전히 넘겨주었다.
7. 우리는 본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1951년 1월 하순경에 설치된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에서는 1.4후퇴 직후부터 백령도로 철수한 황해도지구 피난민들 중에서 약 1,000명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장연(長淵),신천(信川)및 기타 지역으로 구분된 3개 대대의 무장의용대를 편성한 다음 그들에게 기초훈련까지 실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령도의 수비와 적지(敵地)에 있는 난민(難民)구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유격대 편성지원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고, 또한 바로 그러한 시기에 서해지구에 대한 정보 수집차 백령도에 들린 미 8군 정보처 소속 정보장교 버크 대위는 서해지구 내륙기지와 연안도서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간인 유격대의 이용가치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끝에 그 뜻을 상부에 건의하게 됨으로써, 미 8군에선 그 민간인 유격대를 지원하여 유엔군의 정규전(正規戰)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강력한 부대로 발전시키고자 미 8군 작전참모부「기타 업무처」예하에 최초로 유격전을 전담하는 부서(지구전과)를 편성하여 지휘 및 지원체제를 수립하게 하는 한편 게릴라전의 교리개념에 입각한 적절한 작전계획을 세우게 했다.
그리하여 그 해 2월 중순 백령도에는 「월리엄 에이블(WILLIAM ABLE)기지」, 부산에는 공수훈련 및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베이커(BAKER)기지」, 그리고 석도에 정보 및 특공작전 임무를 수행할 「레드윙(RED WING)기지 (한국군 해병중대의 기동타격대)」 등 3개 유격기지가 창설되고, 유격대 본부(기타 업무처)는 대구(大邱)에 있는 미 8군의 메인CP에, 보급담당 부서는 부산(釜山)에 있는 미 8군 후방지휘소에 각각 설치되었다.
그리고 월리엄 에이블 서해안기지는 「레오파드(LEOPARD)」 또는「표(豹)부대」로 공식 호칭되면서 버크(William A. Berke)소령이 초대 기지사령관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유격대의 작전지역은 평안북도 연안도서인 신미도(身彌島)파 대화도(大和島)를 북단으로 하고, 그 남단은 옹진군 여순반도의 등산곶(登山串)에 이르는 약 1,000마일에 달하는 광역이었다.
한편 취임과 동시 버크 사령관은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李熙晶 중령)의 협조를 받아 1951년 3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해당지역에 있는 황해도 출신 각 시·군 무장대의 책임자들과 인사권, 작전구역, 보급지원, 작전지휘권 등 제반문제에 대한 협의를 한 끝에 북한 반공청년들로 구성된 이른바 그 「레오파드기지 사령부」 휘하의 동키부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렸던 것이며, 동키부대의 작전을 총괄하게 된 미 8군의 관련 편제는 아래와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 최초의 편성표에는 동키<1>에서 <21>까지로 망라가 되어 있으나 어떠한 까닭때문인지 그 번호 가운데는 9, 12, 14, 16, 17, 18, 19등이 빠진 14개 부대로 되어 있는데, 동키1은 신천부대, 동키2는 연풍→구월부대, 동키3은 장연부대, 동키4도 장연부대, 동키5는 신천부대, 동키6은 송림부대, 동키7은 은율부대, 동키8은 송림부대, 동키10은 안악부대, 동키13은 신천부대, 동키15는 백마부대, 동키20은 연풍→구월부대, 동키21은 송림부대로 각각 편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격대를 「동키(Donkey)부대」로 명명(命名)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두어야 하겠는데, 그 유래(由來)에 관해서는 미군이 각 유격대에 공급해 준 AN/GRC-9무전기의 발전기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당나귀에 걸터앉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억세고 충실하며 참을성이 있으면서도 재빠르고 싸움질하기를 좋아하는 당나귀의 천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미 8군에서 작성했던 도표<1>과 같은 편제는 1951년 4월 말 동해안에 커크랜드부대(대부분이 원산 출신)가 편성되고, 그 해 5월에는 광범위한 유격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지구전과를 해체하고 제8086부대인 기타 업무단으로 재편성하면서 도표<2>와 같이 그 편제가 보강이 되었다가 1951년 12월 10일 유격대의 작전통제권이 미 8군로부터 미 극동군사령부로 이관됨에 따라 도표<3>과 같이 또 한 차례, 그리고 내가 백령도를 떠난 후인 1952년 12월 말에는 도표<4>와같은 편제상의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1951년 12월에 이루어진 2, 3차 편제 개편 시에는 각 동키부대를 연대로 호칭하게 되었다.
한편 동키부대가 편성되자 백령도의 레오파드기지 사령부에서는 각 부대별로 20~30명씩의 교육요원을 차출받아 1주간에 걸쳐 독도법과 폭발물 취급법, 무전기 조작법 등을 가르친 다음 그 교육요원들이 원대로 돌아가서 자체교육을 하도록 했는데, 동키부대들이 수행했던 주요임무는 동조자(同調者)의 규합과 지하조직의 구축, 첩보수집과 태업활동의 전개, 적 해안경비대 및 내륙주둔부대 습격, 적 수송수단 및 시설물 공격(우마차, 차량, 도로, 교량 등),보급 및 저장시설 공격(주부식과 탄약저장소 등),적 해안선 봉쇄, 정보 및 심리전 활동 등이다.
다음은 주요 부대의 내력과 활동에 관한 사항이다.
동키 1연대(신천부대)
신천부대는 백령도의 레오파드기지 사령부로부터 맨 면저 동키<1>이란 호출부호를 받고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의 직할연대가 된 부대이다.
유엔군의 북진 소식이 들리던 1950년 10월 13일 신천군 내무서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결사적인 반공폭동(反共爆動)을 일으킨 다음 해주(海州)로부터 후퇴해 오는 적의 트럭행렬을 공격하여 상당량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던 신천부대는 그 때부터 향토에 대한 적극적인 자체치안에 임하고 있던 중, 중공군의 개입과 유엔군과 국군의 철수로 퇴로를 차단당하게 되자 옹진(甕津)을 거쳐 용호도(龍湖島)로 철수했고, 그 곳에서 다시 백령도로 철수하게 되었던 주력부대는 2월 15일 레오파드기지 사령부와 접촉을 한 끝에 동 사령부의 직할연대인 동키<1>이 되고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던 내륙기지 대원들은 동키<5>, 그리고 여순반도에 근접한 순위도(巡威島)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부 신천부대는 동키<13>으로 독립을 했다.
김장성(金長成), 박승덕(朴承德), 장재화(張在華) 등 부대장들에 의해 지휘된 이들 신천부대는 그 병력 수가 1,000명을 넘었고, 서해지구 유격전의 요충인 백령도와 순위도의 방어임무와 내륙 침투작전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동키 2연대(구월부대)
처음에는 장연(長淵)의 옛 고을 이름(연풍)을 딴 연풍부대로 조직이 되었다가 구월부대로 개칭이 된 이 부대는 육군 정보장교 김종벽(金宗璧) 대위의 지휘하에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할 시에는 구월산으로 들어간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에는 진남포(鎭南浦)에서 안악군(安岳郡) 서하면 복두나루로 도강해 오는 북한군 26연대를 공격하는 등 장연, 안악, 은율, 송화 등 여러 지역에서 용명을 떨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하순경 웅도(熊島)로 철수한 후에는 그 곳에서 백마(白馬),수월 부대 등과 합류하여 총병력 2,600여 명을 헤아리는 막강한 부대로 발전했다. 그 당시 7개 대대로 편성된 상태에서 동키<2>로 개편이 되었던 이 구월부대는 1951년 3월 21일 월사리반도의 적을 공격하여 239명의 적을 사살하고 54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대는 현역장교인 김종벽 대위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레오파드기지 사령관의 끈질긴 공작으로 인해 1951년 4월 중순 김 대위가 육군본부로 송환되어 정일권 참모총장으로부터 전속명령을 받고 연천(漣川)지구의 일선 부대로 간 후 부대의 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웅도를 강습(强襲)한 적군에 의해 500여 명의 대원을 상실하는 불운이 닥쳤고, 그 해 7월 중순경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석도를 방문했던 김종벽 소령이 옛 부하들의 눈물겨운 호소를 뿌리칠 수가 없어 다시금 구월부대에서 머물게 되자 구월부대를 반란부대로 선언한 동키부대 사령관의 응징조처로 인해 그들이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북상(北上) 기착했던 대화도(大和島)의 우군 유격대(백마부대)에 의해 전 대원이 무장해제를 당한 후 포박이 된 상태에서 두 척의 배에 실려 압송을 당하던 중 1척의 배가 거센 풍랑 속에서 침몰하여 171명의 대원이 수장을 당하고, 김종벽 소령과 구월산의 여대장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던 그의 부관 이정숙을 제외한 전 대원은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등 눈물겨운 종말을 고하고 말았는데, 이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별도로 언급이 된다.
한편 이와 같은 수난사건으로 구월부대는 해체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나 박동호(朴東浩), 임종득(林鍾得)등 잔존간부들이 부대를 재편함으로써 동키<20>으로 개편되어 석도, 취라도, 피도 등을 작전기지로 삼고 구월산 서쪽 해안지대에 대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동키 3·4연대(장연 백호부대)
장연(長淵) 무장치안대가 불타산과 박석산에 입산한 의혈청년(義血靑年)들과 백령도, 월내도, 육도 등으로 탈출한 청장년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이 부대는 월내도, 육도, 박석산, 장산곶 빨치굴 등을 거점으로 장산반도 남부지역과 북부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여 오다가 1951년 1월 중순 북한군의 압력을 감당할 수가 없어 덕동포에서 백령도를 비롯한 월내도, 육도 등으로 철수한 뒤 그 해 3월 동키4연대로 발족하여 불타산과 박석산 등에 내륙기지를 확보하는 가운데 유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550명의 대원으로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동키3연대가 되었던 이 부대는 초도에 기지를 두게 됨으로써 그 조직이 두 개로 분할되었다.
동키 4연대의 초대 부대장은 장석린(張錫璘) 씨였고, 동키 3연대장은 1952년 1월 1일 장석린 부대장의 살해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장 부대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한편 불타산과 박석산에 내륙기지를 둔 3연대는 특히 정보수집활동과 귀순공작 및 적 관공서의 습격 등 많은 활동실적을 남겼는데, 특히 박석산과 어두니산, 칠봉산 등에 기지를 둔 3대대는 1951년10월 3일 우리 해군 소해정 505호 507호 등의 지원하에 사기리에 기습상륙하여 북한군을 소탕하고 1,200명의 반공청년을 구출하고 농우 50두, 양곡 800가마를 노획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키 6·8연대(송림부대)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할 때 황주(黃州) 서북방의 송림(松林)에서 조직이 된 이 부대는 아군의 북진기간 중 대장 안태섭(安泰燮)의 지휘하에 향토치안에 임하다가 아군이 철수하자 12월 초 약 700명의 대원이 광양만을 거쳐 장연군(長淵郡)으로 철수하여 그 곳에 기지를 확보하고 있던 연풍부대와 함께 약 1개월간 유격활동을 벌이다가 핵령도로 이동, 동키 6연대로 발족하게 되었다.
그 후 이 부대는 초도를 거쳐 청양도에 거점을 확보한 다음 구월부대와 합동으로 월사리 반도에 상륙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1951년 4월에는 대청도, 소청도에 집결한 송림청년들로 동키8연대를 조직하여 연고지에 대한 첩보수집과 파괴활동 및 반공인사 구출작전을 벌였다.
동키 7연대(수월부대)
은율면을 중심으로 그 서남부 일대에서 조직이 된 이 부대는 1951년 6월 중순경 초도로 철수하여 동키7연대로 재발족할 때까지 장연·연풍부대와 합류하여 서해지구 경비사령부를 조직, 구월산 공비 및 남하해 오는 북한군 26여단 성봉부대와 혈전을 벌였다.
동키7연대로 발족한 후에는 초도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적지기습 및 첩보수집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38˚선 이북 해역에 있는 여러 도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초도에는 수월부대뿐 아니라 동키 3·4연대와 9·10·21연대 등의 전방지휘소 또는 후방 CP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월(水月)이란 부대명은 은율읍의 수다리개울(水月川)의 수월을 따서 만든 것이다.
동키 10연대(안악부대)
1950년 10월 13일, 퇴각하는 적 패잔병을 공격하기 위해 봉기했던 신천지구의 무장봉기에 호응을 했던 안악(安岳)지구 반공청년 학생들의 자체 치안대가 모체가 된 이 부대는 1951년 3월 동키10연대로 재발족할 때까지 구월산의 공비소탕전과 향토 사수를 위해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남부 안악지방의 무장대는 해주를 점령한 적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하게 됨으로써 일단 옹진으로 철수하여 옹진 청년방위군 및 옹진 학도의용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200여 명의 인원으로 부대를 재편하게 되었고, 동키10연대가 된 후에는 작전지역을 구월산 북동쪽인 안악군과 재령군 및 신천군 북부로 정하게 됨으로써 4월 초순에는 석도와 피라도로 북상했고, 5월에는 구월산 오봉에 본부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구월산에는 연풍부대 6대대로 있던 북부 안악 무장청년들과 상당수의 안악군 청년들이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대원수는 60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있다.
그리하여 1951년 7월 24일 이 구월부대는 구월산 기지의 내륙부대와 피도의 대기부대가 긴밀히 합동해서 대행면 광풍리의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기관을 기습공격하여 10여 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고 10여 명의 반공인사를 구출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으나 그 해 10월 24일 구월산을 동과 서, 북 3면으로 에워싸고 포위공격을 감행한 북한군과 중공군 및 내무서원, 민청원 등 약 2개 연대 규모의 토벌작전으로 수십 명의 주력부대 대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가운데 그 구월산의 반공유격 아성(牙城)이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당시 석도의 후방 CP에 위치하고 있던 김유성 부대장과 원용서 참모장 등은 내가 백령도를 떠난 지 약 3개월 뒤인 1952년 5월 초 녹음기의 적지 침투작전을 위해 인천으로 가서 범선(帆船)을 모터선으로 개조하여 초도로 향하고 있던 중 태풍을 만나 그 모터선이 적지 해안으로 밀려가는 바람에 그 해변을 경비하고 있던 북한군에 체포되어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해주로 압송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한편 그런 일이 있은 후(1952년 4월 하순경)낙하산 훈련을 받은 특공대원 6명이 다시 구월산 동북부에 잠입하여 40여 명의 현지 반공청년을 규합해서 그 해 말까지 유격활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고 하나 안악부대의 명맥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동키 11연대(옹진 학도의용군)
1951년 1월 하순경 창린도에서 약 4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했던 이 학도의용군부대(부대장 이종학)는 1, 2, 3지대(支隊)로 편성하여 창린도와 기린도 및 마합도에 대원들을 분산 주둔시켜 적지에 대한 유격활동을 전개하다가 3월 하순경 백령도의 동키부대 사령부와 접촉이 되어 동키11연대로 재발족이 되었다.
그 후 이 부대에는 그 해 7월 초 을지병단26연대가 합류되어 총인원이 1,700여 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6개 대대로 편성이 되었으나 그 해 9월 말경 부양가족이나 전투경험 등을 고려하여 선발한 600여 명으로 동(東)대대와 서(酉)대대로 호칭된 2개 대대로 재편되어어 화도, 창린도, 기린도, 마합도 등을 작전기지로 하여 적지에 대한유격활동을 벌였고, 내가 백령도 주둔부대장으로 부임했던 그 해 7월 중순경에는 영국함대와 미국함대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기습상륙으로 철수했던 창린도에 역상륙(逆上陸)을 하여 38명의 적을 생포하고 소총 80여 정과 중기관총 3정, 무전기 1대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 바 있었다.
동키 15연대(백마부대)
이 부대는 다른 어떤 부대보다도 편성, 또는 활동과정에 변화가 많았던 부대로 알려지고 있다.
아군이 북진할 때 향토치안에 임하고 있던 정주군(평안북도) 내각면 치안대원들이 유엔군이 철수한 후 청천강(淸川江) 하구(河口)에 있는 번좌리란 마을에 집결하여 오산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그 지방 애국청년들과 제휴하여 때마침 다른 2명의 동지들과 그 마을에 낙오되어 있던 육군정보국 소속 특수공작원 김응수(金應洙 -신의주 출신)씨를 대장으로 옹립하여 조직했던 것이 곧 이 백마부대였다.
부대원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투혼을 고무하기 위해 「백마(白馬)」라는 부대명으로 신의주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상징케 했던 이 부대는 그 후 애도(愛島)와 초도로 전전하며 유격활동을 벌이다가 초도에서 만나게 된 연풍부대의 제3대대로 편입이 되었다.
그런 다음 그 해 4월 중순경 백령도의 동키부대 사령부와 접촉이 되어 동키15연대로 재발족을 하게 되었고, 그 해 5월 말경에는 정주군의 연안도서인 대화도(大和島)에 상륙하여 그 남쪽에 있는 신미도(身彌島) 적진을 기습 공격하여 중공군 60여 명을 사살하고 양곡 5,000여 가마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1년 7월 하순경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 현역장교 김종벽 소령이 지휘하는 구월부대가 대화도에 기착했다가 비극적인 말로를 걷게 되었고, 또한 그러한 사건이 있은 지 약 3개월 후, 동키부대 사령관과 내가 대화도를 방문했던 바로 그 다음 날인 11월 30일에는 해·공군의 지원하에 감행된 중공군 대부대(약 2개연대)의 상륙작전으로 백마부대의 주력이 궤멸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 당시 백마부대에는 2명의 미군 고문관 (중위1,하사관1)이 파견되어 있었다. 나의 대화도 방문 얘기와 백마부대의 그 뒷얘기는 별도로 언급이 된다.
동키 21연대(송화부대)
이 부대의 전신(前身)은 1·4후퇴를 전후하여 은율의 연풍부대와 손을 잡고 구월산의 공비와 북한군 26여단의 전봉대와 교전타가 웅도와 청양도를 거쳐 초도로 철수했던 송화(松禾)치안대이며, 초도에서 동키사령부와 접촉하여 동키21연대로 발족하게 되었는데,그 당시의 대원 수는 약 500명이었다.
초도에 본부를 둔 이 부대는 바로 그 정면의 대안(對岸)이 송화군이었으므로 지형과 지리에도 밝고, 또 적지에 잔류한 반공청년들이 많아 적지에 대한 유격활동을 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내가 백령도 주둔부대장으로 부임한 뒤 이 부대에서는 풍천읍에 대한 기습작전을 비롯해서 월사리반도 침투작전, 적 해안포대 파괴작전, 반공양민들의 구출작전 등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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