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5)구월산의 여대장
화제의 여주인공인 이정숙(李貞淑)이란 이름은 (동키2연대와 구월부대의 최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었다. 여기서는 그녀의 출신성분과 그녀가 김종벽 대위와 만나게 된 배경, 그리고 특설 영창에 관한 얘기 등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에 관해 적어 두고자 한다.
29세 때 6·25전쟁을 맞이했던 이정숙 여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었다.
일제 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그녀는 8·15해방을 맞을 당시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 하나를 둔 유부녀였으나 해방과 함께 공산당 천하로 뒤바뀌는 바람에 반동지주계급으로 몰려 양친과 남편은 학살을 당하고 그녀 자신은 겸이포(兼二浦)의 제철회사로 이송되어 3년간 광주리 구월산의 여대장 李貞淑 씨에 석탄을 담아 나르는 중노동형에 처해졌다가 황해도 안악군 서하면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했던 그 해 10월 중순경 전쟁을 도발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던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으로 패퇴해오자 공산당에 한이 맺혀 있던 그녀는 서하면 무장치안대를 조직하여 구월산(九月山)으로 잠입한 북한군의 위협 속에 향토방위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있다가 바로 그 무렵 은율에 나타난 김종벽 대위가 구월부대의 전신(前身)인 연풍부대를 조직하자 그 산하로 들어가 김종벽 부대장의 부관으로 임명된 것이 만남의 기연이 되어 그로부터 그 유격대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히 그녀는 1·4후퇴 때 연풍부대가 진남포에서 안악군 서하면의 복두나루로 도강해 오는 북한군 26여단을 공격할 때 진두에 서서 맹활약을 함으로써 구월산의 여대장이란 애칭을 받게 된것이라고 하며, 맺혀 있던 그 한만큼이나 적개심이 강하고 반공정신에 투철한 남승여걸(男勝女傑)이었기에 적전에서 기율을 해치거나 비겁하게 달아나는 대원들이 발견될 경우 차고 있던 쌍권총을 뽑아 들고 가차없이 처형을 했을 정도로 기율을 중히 여기고 패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는지 비극적인 말로를 걸은 그 구월부대의 운명을 통탄하며 비분장개하다 끝내는 앞날이 창창했던 그 38세의 젊은 나이로, 더구나 스스로가 택했다고 하는 그 철장 속에서 저주스런 일생을 마쳤다고 하니 너무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편 171명의 수장사건이 발생했던 그 마(覽)의 날이었던 7월 29일 백령도의 레오파드기지 사령부에서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쾌속정 한 척을 급파하여 두 척의 배를 끌고 오고 있던 모터선에 실려 있던 김종벽 부대장과 이정숙 부관을 포함한 9명의 간부들을 백령도로 압송해 오도록 하여 그들을 동키부대 사령부 숙소 앞에 설치한 특설 영창에 수감하여 후송시킬 때까지 2~3일간 가두어 놓았었는데, 그 때 나는 그 영창에 수감되어 있는 간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을 해 보려고 했으나 일절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동키부대 사령관의 제지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를 못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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