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4) 구월부대의 최후

머린코341(mc341) 2015. 2. 4. 22:11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4)구월부대의 최후

 

여기에 소개하는 얘기는 동키2연대(구월부대)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 김종벽 대위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그 구월부대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다.

 

8·15 직후 한동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통역관으로 활약한 적이 있는 김종벽 씨는 그 후 남으로 탈출, 육사 8기(특별2반)로 입대하여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할 그 당시에는 육군 정보국 소속 정보장교로서 평양 북방까지 나갔다가 고향(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소식이 궁금해서 고향으로 달려간 것이 운명적인 계기가 되어 고향 사수를 다짐하고 있던 반공치안대원들을 규합하여 연풍(장연의 옛 고을 이름)부대를 조직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 유격부대는 북한군 26여단의 참모장을 사살하는 등 신화적인 항전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자신의 휘하에 참집하는 대원들이 날로 늘어나자 연풍부대를 구월부대로 개칭하게 되었던 그는,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능률적인 유격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1951년 2월 1,000여 명의 대원들과 300여 명의 피난민을 이끌고 작전상의 후방기지가 될 석도(席島)로 탈출하여 그 곳에서 백령도의 동키부대 사령부와 접촉을 한 끝에 동키2연대로 발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그의 신분이 현역장교란 점에서 지휘계통에 혼선이 빚어질 것을 우려했던 동키부대 사령관의 끈덕지고도 단호한 추방공작 때문에 결국 그가 지휘한 그 구월부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었다. 김 대위를 축출하기 위한 버크 사령관의 1차적인 공작은 이러한 형해로 추진되었다.

 

즉, 1951년 4월 중순 버크 사령관은 동키부대 사령부(레오파드기지 사령부)에서 작전회의가 있다면서 김 대위를 부른 다음 그가 백마부대 김응수 부대장과 그의 부관 이정숙(일명 여대장)과 함께 나타나자 그에게 육군본부에서 정보장교 회의가 있으니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편으로 다녀오라고 했고, 사령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김 대위는 김응수 부대장과 이정숙 부관을 대동하고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大邱)로 가게 되었는데, 막상 대구로 가서 육본에 들리고 보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정일권 참모총장이었고, 정 총장으로부터 그간의 공적을 치하하는 표창장과 연천지구의 일선부대로 부임하라는 전속명령서를 받게 되었던 그는, 결국 참모총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 그 길로 연천지구로 직행하여 일선 대대의 부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런데 약 반 년간 일선에서 근무했던 그는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몽매간에도 잊을 수가 없던 구월부대의 일이 염려되어 육본에서 연천으로 갈 때 그를 수행하여 동거생활을 해 왔던 이정숙과 함께 구월부대가 있는 석도로 가게 되었는데, 결국 그 석도 방문길이 화근이 되어 그는 또다시 원대복귀를 단념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버크 사령관으로부터 반란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끝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었다.

 

그 사이 소령으로 승진이 돼 있던 그가 석도를 방문했던 날은 1951년 7월 10일이었다. 한데 그가 석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접하게 된 버크 사령관은 석도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해병대의 고문관과 육군본부의 헌병대에 요청하여 그를 축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원대로 복귀하려고 했던 김 소령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세주가 왔다면서 그의 숙소를 에워싼 채 한사코 그를 보호하는 대원들의 눈물겨운 방해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구월부대 대원들이 그를 구세주로 받든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4월 중순 김 대위가 구월부대를 떠난 후 연전연승을 해 왔던 구월부대의 전방기지인 웅도(熊島)가 공산군의 강습을 받아 약 500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냄으로써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방에서 모여든 간부들과 평대원들의 호소를 뿌리칠 수가 없었던 김 소령은 결국 그가 석도를 떠나 원대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구월부대를 반란부대(叛亂部隊)로 낙인찍고 식량과 탄약, 의약품 등의 보급을 일체 중단하겠다는 동키부대 사령관의 최후통첩에 따라 결국 자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끝에 7월 22일 밤 부대를 이끌고 석도를 탈출, 하취라도를 거쳐 백마부대가 있는 서해 최북단의 대화도로 향했는데, 석도를 떠날 때의 승선인원 800명 중 470명은 도중에 기착하여 1박한 후방기지 하취라도에 잔류시켜 두고 대화도에는 330명의 정예요원만이 상륙했다.

 

그러나 문제는 몰래 석도를 빠져 나간 구월부대의 행방을 추적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백마부대마저 반란부대로 인정하고 함께 폭격을 해 버리겠다는 동키부대 사령관의 분노에 찬 엄명 때문에 김종벽 소령 이하 전 대원이 동족 우군인 백마부대 대원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후 포박까지 당해 구금이 되고 말았는데, 당시 구월부대가 보유하고 있던 장비목록은 권총 5정, 아식(俄式)소총 129, 소련제따발총 37, 소련제경기관총 6, 99식소총 6, 38식소총 4, 24식소총 2, 03식소총 2, Ml소총 9, 칼빈소총 6, 미제경기관총 2, BAR5, SCR3 무전기 2, 군악악기 1식, 수류탄 500발, 각종 실탄 5만6,000발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1951.7.29) 아침 구월부대의 전 대원은 대화도의 선착장에 당도한 동키사령부에서 보낸 2척의 중형 범선(帆船)에 실려 그 배들을 끌고 가기 위해 급파된 한 척의 발동선에 예인되어 가던 중, 그 날 밤 석도 북방 해상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173명이 탄 한 척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173명 중 171명이 수장을 당하는 비극이 초래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밤 김종벽 소령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은 그 2척의 배를 끌고 온 모터선에 실려 왔는데, 그들 가운데 처벌을 면하게 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부대장 김종벽 소령뿐이었고, 대구 여자경찰서에 이침 수감된 부관 이정숙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과 그 날 밤 구사일생 석도에 도착했던 다른 한 척의 배에 실려 왔던 150여 명의 대원들은 전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이 되고 말았으니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러한 일로 줄줄이 포승줄에 묶인 채 수장을 당한 그 수중고혼들의 혼을 달랠 그 어떤 말도 찾을 길이 없었고, 또 비록 1952년 8월 석방이 되긴 했으나 그러한 이유로 포로 아닌 포로의 신세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이 되기까지 했던 그 구월부대 유격대용사들을 어떠한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정말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 후일담이 되겠지만 휴전 후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그 왕년의 구월부대장 김종벽 씨는 한때는 정계에 진출할 뜻을 두고 경기(京畿)지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었으나 고배를 마시게 되었고, 지금은 벽제(경기도 고양시)에서 노약한 몸을 정양하며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구월산의 여대장으로 불리고 있던 그 이정숙(李貞淑) 씨는 휴전 후 실의 낙담하여 모종의 중독환자로 전락한 끝에 영어(囹圄)의 몸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는데 그 때 나이 38세였다. 이정숙 씨의 출생배경과 그녀가 김종벽 대위와 만나게 된 인연과 관련된 얘기는 별도로 언급이 된다.

 

한편 이 회고록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왕년의 구월부대장 김종벽(1914년생) 씨와 백마부대장 김응수 씨, 그리고 동키5연대(신천부대)를 지휘했던 박승덕(朴承德) 씨 등 지난날 서해지구에서 인연을 맺었던 몇몇 생존인사들을 개별적으로 초대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 지난날에 대한 회포도 풀고 아울러 필요한 증언도 청취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감회 깊은 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지난날 군번 없는 유격대용사들이 되어 구국전선에서 용전분투했던 그 모든 분들의 충성된 기여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