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2) 서해지구의 피난민들

머린코341(mc341) 2015. 2. 4. 22:04

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2)서해지구의 피난민들

 

내가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서해지구의 피난민이 가장 많이 집결해 있던 전방지대의 도서는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및 웅도(熊島)등이었고, 나의 재임기간 중 이들 도서로부터 후방지역으로 이송이 되었던 피난민들의 수는 6~7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50년 10월 하순경, 한·만(韓滿)국경지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그 때 이미 압록강을 건너 적유령(狄踰嶺)산맥 일대에 잠복해 있다가 11월 25일을 기해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한 중공군 대병단(大兵團)의 참전으로 부득불 철수를 단행, 서부전선에서는 12월4일 육로로 평양에서 철수를 하고, 동부전선에서는 12월 하순경 흥남(興南)과 함흥, 원산 등지에서 선박과 항공기로 철수를 했는데, 그때 12월 5일 대동강(大同江)을 도하한 중공군이 그로부터 며칠 후 해주(海州)를 거쳐 연안(延安)과 백천(白川)방면으로 침입하게 되자 육로로 피난할 길을 차단당한 북한지역의 피난민들은 부득불 해상(海上)으로의 탈출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특히 수많은 황해도지구 피난민들은 은율(殷栗)과 송화(松禾), 장연(長淵)지구에 집결한 다음 우리 해군과 유엔군 해군부대 함정의 지원하에 황해도 연안에 산재한 피도, 취라도, 웅도, 청양도, 석도, 초도, 백령도, 월내도, 육도, 대청도, 소청도, 마합도, 기린도, 창린도, 어화도, 용호도, 순위도, 접도 등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또한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할 때 패주하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여 향토사수를 다짐하고 있던 수많은 반공의용대(反共義勇隊)들도 세(勢)가 불리하여 일부 대원들을 내륙기지에 남겨둔 채 후방 지원기지(支援基地)가 될 연안도서로 철수하여 내륙기지의 유격활동을 뒷받침했다.

 

한편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상당수의 무장의용대 대원들을 백령도로 이송하여 훈련을 시킨 다음 황해도 여러 해안에 상륙시켜 유격활동과 양민구출 및 양곡(糧穀)반출작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지원했는데, 이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는 「동키부대의 내력과 기여」에서 언급이 된다.

 

그 당시 피난민들이 가장 많이 집결해 있던 초도에는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에서 상주(常駐)시킨 민정관(民政官)이 피난민들에 대한 구호물자 공급과 피난민들의 수용과 후송 및 유격대와 그 가족들에 대한 각종 지원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행정이 미치지 않고 있는 백령도 북방 여러 도서에 대한 행정을 관장하고 있었다.

 

초도와 석도에 집결해 있던 피난민들의 행색과 몰골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 당시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그 시절의 참담했던 그 영상들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수송선이 선착장에 도착할 때마다 행여 자리가 비좁아 타고 가지 못할세라 결사적으로 배에 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던 그 피난민들의 군상(群像)속에는, 남루한 치마나 '몸빼바지'가 모양 사납게 찢어지거나 떨어져 나가 허연 허벅지와 엉덩이의 한 부분이 아무렇게나 드러나 있는 다 큰 처녀들과 젊은 아낙들의 모습이 예사롭게 목격되었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부지하려는 번민과 집착이 있을 뿐 그따위 수치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피난민들의 탑재항(塔載港)인 초도(椒島)나 백령도로부터 후방지역으로 이송된 피난민들이 정착을 했던 곳은 인천(仁川), 군산(群山),목포(木浦), 여수(麗水), 장흥(長興), 삼천포(三千浦) 등지였다.

 

이러한 지역으로 분산되어 피난살이를 한 황해도지구 피난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휴전(休戰)이 된 후에도 계속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었고, 또 그들 중에는 그들이 정착한 그 지역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들이 초도와 백령도로부터 후송될 당시 자신들에 대한 구호와 후송업무를 관장해 주고 있던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와 그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전쟁이 끝난 후 나를 황해도의 명예도민(名譽道民)으로 추대한 적도 있었고, 또 9대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된 1973년 내가 공화당 목포(木浦)·신안(新安)·무안(務安) 지구의 지구당 위원장으로서 출마를 했을 때는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수많은 황해도민들이 나의 당선을 위해 뜨거운 성원을 베풀어 주었다.

 

또한 그 무렵 나의 고향인 영암지구에도 황해도 도민회(道民會)가 조직되어 있어 내가 귀향을 할 때면, 그 도민회의 이름으로 제작한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나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는데, 그 모든분들이 나를 성원해 준 그 뜨거운 성원을 나는 일생을 통해 잊을 수가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6.25때 나와 그러한 인연을 맺었던 그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진심으로 기원해 마지 않는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