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5) 전시하의 3형제 해군
6·25전쟁 때 나와 나의 두 아우들은 모두가 해군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3형제를 가리켜 「전시하의 3형제 해군」이라며 부러워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나로서는 지금도 자랑스러웠던 일로 여기고 있다.
전쟁을 겪고 있던 그 시대에 한 가정에서 두 형제가 군에 입대했던 예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3형제나 4형제가, 그것도 같은 군에 몸담고 있었던 일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원래 나의 부모님들께선 슬하에 8남매를 두셨고, 그 가운데 아들이 5형제였는데 그 당시 나의 첫째, 둘째 아우 이외의 나머지 아우들은 16세 이하의 어린 나이들이었으므로 군에 입대할 적령기에 있던 두 아우만 나의 뒤를 따라 해군에 입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내가 해군신병훈련소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 입대하여 직접 나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 교육대를 수료했었는데, 1950년 10월 1일 해군 신병 18기로 입대했던 나의 첫째 아우 남주(南柱)는 신병훈련소를 수료한 후 기호사(암호사)의 병과를 택해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자신의 원에 따라 함정근무를 하게 되고, 둘째 아우 화엽(化燁)은 신병훈련소를 수료한 후 훈련소의 병기 조수로 근무하다가 해군 목포경비부와 부산경비부, 해군본부 작전국 및 전투함 승조원으로 근무하다가 휴전이 되던 1953년 7월 병장의 계급으로 전역을 했다.
그런데 나의 첫째 아우 남주는 내가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1951년 12월 26일 새벽, 그가 승조하고 있던 우리 해군의 PC-704함이 원산만(元山灣)근해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기뢰에 접촉되어 침몰을 하게 된 그 끔찍한 참화로 인해 애석하게도 21세의 그 꽃다운 나이로 자신의 목숨을 나라에 바쳤다.
당시 백령도에서 그 충격적인 사고 소식에 접했던 나는 특히 사고 당일 새벽 심한 풍설(風雪)과 한파 때문에 단 한 사람의 승조원도 구조된 사람이 없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비통한 심정 가눌 길이 없었다. 그리고 704함의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약 10일이 경과된 어느 날, 나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또 한 차례 비통한 슬픔에 잠겼다.
왜냐 하면 당시 해병대의 독립43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청진(淸津)앞바다의 양도(洋島)에서 강남주 하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어부의 제보로 발견을 하게 된 그 남주의 시신은 반은 물속에 잠긴 해변가의 바위를 끌어안은 채 동사(凍死)한 시신이었다고 하는데 704함의 침몰현장(확실한 위치 불명)에서 양도까지 결코 가까울 리가 없던 그 먼 거리를 어떻게 헤엄쳐 간 건지 나로서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로 알고 있지만 그 먼 곳까지 가서 그런 최후를 마치게 되고 보니 조금이라도 운이 가세해 주었더라면 살아날 수도 있었던 사람이 죽은 것만 같아 나의 마음이 더욱 슬프고 아팠다.
고인의 유해는 현지 부대에 의해 화장이 되어 진해 해군 장충단(獎忠壇)묘지에 안장이 되었다가 휴전 후에 건립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이 되었다.
올해로써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45주년, 그러니까 금년 12월이면 1951년 12월 말경에 전사한 나의 첫째 아우 강남주 해군 중사(전사 후 1계급특진)의 44주기(周忌)를 맞게 된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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