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7)B -29의 추락사건
1951년도의 늦가을 어느 날의 새벽 3시경이었다.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느닷없이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에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살폈더니 무서운 폭음을 동반한 거대한 비행기 한 대가 땅 위를 덮치듯이 기우뚱거리며 선회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필시 고장을 일으켰거나 적지에서 피격을 당한 상태에서 백령도의 천연 비행장(용기포 비행장)에 불시착을 하고 있는 비행기란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 불안한 비행을 지속하고 있던 그 거대한 기체는 잠시 후 무서운 굉음을 터뜨리며 추락을 하고 말았는데 그 기체가 떨어졌던 곳은 용기포 해변에서 면 소재지 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비행기가 추락한 직후 나는 미군 기지사령관(동키부대 사령관)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비로소 그 비행기가 B-29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 낙하산으로 기체를 탈출한 승무원들의 구조를 위해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즉시 해군 주둔부대의 작전장교에게 지시하여 백령도의 직할 유격부대(동키1)와 해병중대 및 지서와 각 면의 여러 기관에 그러한 사실을 알리는 한편 실종된 승무원들에 대한 수색과 구조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약 1시간이 경과되자 해변가 일대에는 수색을 벌이는 횟불이 등장하여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각부터 계속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가 날이 밝은 다음 현장으로 가 보았는데, 그 곳에서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는 거대한 비행기의 동체와 날개, 프로필러와 바퀴 등을 목격했던 나는 2차 대전 때부터 소문만으로 듣고 있던 그 B-29가 얼마나 거대한 비행기인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대전 때 「하늘의 요새」라는 무서운 별명을 지니고 있었고, 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그 B -29기는 길이가 30.2미터, 너비가 43.1미터나 되는 거대한 비행기인데, 비록 박살은 나 있어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던 것은 조종사가 기체를 탈출할 때까지 우정 유류를 외부로 유출시켜 버린 건지 아니면 저절로 다 소모가 돼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유류가 바닥이 난 상태에서 추락됨으로 해서 폭발을 면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고, 또 폭발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기체에 부착되어 있는 여러 가지 과학기재나 쓸모 있는 다른 자재들을 회수할 수가 있었다.
한편 그 날 새벽부터 시작된 승무원들에 대한 수색작업은 날이 밝은 후 거도적(擧島的)인 수색작업으로 확대가 되었는데, 그 결과 오전 8시경까지 12명의 승무원 가운데 11명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고, 그 나머지 1명은 동키부대 사령부로부터 지원받은 쾌속정 한 척과 민간 어선을 동원하여 섬을 일주하며 해변가와 해상을 빈틈없이 수색 했으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일 후 나는 추락된 그 B-29기의 기체를 나에게 준다는 서류 한 장을 건네 받고 뜻밖의 횡재(?)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오파드기지 사령관이 사인한 그 서류의 수신자는 영자로 표기된 '중령 강기천'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라는 부대명이 생략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처리해야 할 그 비행기의 잔해를 나 개인에게 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서류에는 실종된 승무원들의 구조를 위해 애써 준 각별한 협조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는 말과 함께 추락된 비행기의 기체 일체를 귀하의 소유물로 이양하니 임의 처리해도 좋다는 내용의 글이 담겨져 있었다.
결국 파괴된 그 기체에 대한 처리 및 처분권이 나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러한 권한을 갖게 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즉 저 거대한 기체의 알루미늄을 이용하여 엄청난 양의 취사기구와 식기 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인데, 생각이 거기에 미친 나는 일단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기체를 운반해 갈 LST한척과 추락현장에서 부두까지 운반하는 데 소요될 운반비 40만 환과 항공기술자인 조경연(趙敬衍) 소령(당시 해군 공창과학기술연구소장)을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더니 그 요청이 즉각 받아들여져 2~3일 후 조 소령과 LST한척이 와서 그 기체를 운반해 가기에 이르렀다.
그 때 내가 40만 환의 운반비를 계상했던 까닭은 추락 현장에서 용기포 부두까지 파손된 기체의 토막들을 실어다 나를 수 있는 운반 수단이란 것이 전적으로 고용해야 할 인부들과 달구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고용이 된 인부들은 조 소령의 작업 지휘하에 해체작업이 끝난 비행기의 동체나 떨어져 나간 프로펠러(4개),그리고 바퀴와 꼬리부분 등 토막난 모든 부품들을 달구지에 실어 나르거나 4명씩 조를 짜서 목도를 해서 메고 가기도 했는데, 워낙 무게가 나가는 것들이었으므로 약간 덩치가 큰 물체를 달구지에 실을 때는 인부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다음은 LST에 실려 간 그 B-29의 행방과 관련된 후일담이다. 1952년 1월 하순경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직을 하직한 뒤 인사차 해군본부에 들렀던 나는 그 동안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B-29기체 처리결과를 관계관에게 알아보았더니 그 기체에 부착되어 있던 과학기재는 해군 과학기술연구소로 가지고 간 것이라고 했지마는 취사기구나 식기 제작을 건의했던 그 알루미늄은 그러한 목적에 쓰여지지 않고 해군 휼병감실에서 휼병사업 기금 마련을 위해 매각처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었다.
이 밖에 그 B-29의 추락사건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일은 그 날 새벽 무서운 폭음을 일으키며 백령도의 하늘을 덮쳤을 때, 그리고 그 비행기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일으키며 추락하자 도민들 사이에는 "소련제 폭격기가 백령도를 덮쳤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백령도에 상륙을 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전파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그러한 소문이 나돌자 나는 도민들의 민심 안정을 위해 B-29 추락사고의 진상을 발표하는 등 주둔부대장으로서의 세심한 배려를 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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