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3.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
(8)11월 29일과 30일
1951년 11월 29일과 바로 그 다음 날인 30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11월 29일은 내가 동키부대 사령관 에거트 중령과 함께 서해안 최북단유격기지인 그 대화도(평북 정주군)를 방문하여 적지 깊숙한 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백마부대용사들을 격려하고 돌아온 날이었고, 11월 30일은 그 대화도의 백마부대가 육해공군으로 편성된 북한군과 중공군대부대의 합동작전에 의해 그 주력이 거의 전멸을 당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백령도에서 대화도까지의 거리는 약 40마일 정도, 시속 45노트의 쾌속정으로 약 2시간 남짓한 시간이 걸릴 만한 거리였으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렀다. 그 당시 벽령도에서 석도까지는 별다른 위험성이 개재되지 않았지만 석도 북방, 특히 대화도 부근에 이르러선 유엔군의 제공권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야간을 택하다 보니 적의 부류기뢰(浮流機雷)에 대한 위험성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쾌속정이 백령도를 떠난 시각은 29일 밤 9시경이었고, 대화도에 도착한 시각은 그 발 밤 11시 30분경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백마부대(동키15연대)의 김응수 부대장과 이도순 참모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간부들과 3명의 미군 고문관(중위-2,하사관-1)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도착하는 즉시 부대본부 상황실에서 간략한 브리핑을 청취했던 동키부대 사령관과 나는 김응수 부대장의 안내로 유격대원들이 도열해 있는 연병장으로 가서 부대를 사열한 데 이어 차례로 단상(壇上)으로 올라가 위로와 격려의 뜻이 담긴 훈시를 했다. 그런 다음 에거트 사령관과 나는 김응수 부대장의 안내로 유격대원들과 그들의 가족이 거처하고 있는 가옥과 부대의 방어시설물을 둘러보곤 곧장 선착장으로 향했는데, 부대본부에서 선착장에 이르는 길가에는 우리를 배웅해 주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편 쾌속정으로 돌아온 나와 에거트 사령관은 약 2시간 배 안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새벽 4시 30분경 그 선착장을 떠나 아침 7시경 백령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오후 3시경이었다. 백마부대로부터 12대의 적 폭격기가 나타나 맹폭격을 하고 있다는 긴급 상황보고가 있었다. 그러한 보고에 접하게 된 나는 내심 큰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대의 폭격기가 동원된 것이 사실이라면 필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상황보고는 밤 9시경에 있었는데, 그 시각에는 약 2개연대의 적이 무수한 배를 타고 대화도에 상륙을 하고 있다는 절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40년 만에 만나 보게 된 그 왕년의 백마부대장 김응수 씨(1920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 날 12대의 폭격기와 약 1개 사단으로 추정되는 적이 대규모의 합동작전을 벌이는 바람에 약 500명의 대원이 죽음을 당했고, 구사일생 그 끔찍한 도살장으로부터 탈출한 인원은 부대장 이하 약6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약 1,500명의 피난민과 유격대의 가족들이 유엔군의 지시에 따라 그 때 이미 인천으로 철수한 뒤였었기 망정이지, 만약 그들까지 대화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나게 더 컸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 날 밤 대화도를 탈출했던 사람들은 목선에 의지하여 초도와 백령도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백령도로 향한 김응수 부대장을 비롯한 약 10명의 간부들이 백령도에 도착하자 나는 구사일생 사지(死地)를 탈출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마리의 큰 황소를 잡는 등 정성껏 주연을 베풀었다.
진촌리의 어느 큰 민가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베풀었던 그 주연에는 동키부대 사령관과 그 막료들, 대화도에 파견되어 있던 미군 고문관들과 연락업무차 백령도에 와 있던 여러 명의 유격부대장과 주요 참모들 및 백령면의 면장과 어업 조합장을 비롯한 기관장과 유지들도 함께 참석을 했었다.
그리고 그 주연 석상에서 김응수 부대장은 나에게 소련제 권총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 권총은 현재 해병대 기념관에 보존되고 있다. 백마부대에 관한 얘기는 이것으로 끝나지를 않는다.
서울특별시 양재동(서초구) 시민의 숲 공원에 건립되어 있는 백마유격부대의 충혼탑 그 날 밤 초도와 백령도로 탈출한 대원들과 대화도 부근에 있는 12개의 연안도서를 점령하고 있던 200여 명의 대원들을 수습하여 부대를 재편했던 김응수 부대장은 1951년 4월 초 원한이 사무쳐 있는 그 대화도의 현황을 파악하기위해 수색대를 상륙시켜 보았으나 초토화된 그 섬은 황량한 무인도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그 무인도에서 수색대원들은 피격당한 비행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로 보이는 원시인 같은 외국인 한 사람을 발견하여 구출해 왔는데, 소련 군인인 줄 알고 사로잡고 보니 그는 미군 조종사였다.
실종된 상태에서 38일간을 그 고립무원의 사지(死地)에서 기적적인 연명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던 그 화제의 주인공은 미 5공군 소속 슐츠 대령이었는데 그의 생존이 확인되자 외신에선 (한국의 로빈슨크로스)란 표제하에 그의 생존소식을 대서 특필했다.
백령도 주둔부대장 시절에 나는 또 이런 일도 겪었다.
1951년도의 크리스마스 때였다. 유격대가 대치되어 있는 연안도서기지에서는 검소하게나마 크리스마스 추리를 만들어 성탄절을 자축하며 실지 회복과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과는 달리 그 연안도서의 유격기지에서는 이런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날만 새면 누군가가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는 나뭇가지에 공작삐라를 걸어 놓거나 특정인에게 보내는 서신이 적힌 쪽지를 걸어 놓기도 했는데, 피난민들 속에 숨어든 적 공작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그 삐라의 내용은 대개 미 제국주의를 혹독하게 매도하고 인민군의 해방전쟁의 승리를 장담하는 내용과 국방군(한국군)의 투항을 선동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군 백령도사령관 앞」 또는 특정 유격부대장의 이름이나 직함이 적혀 있는 쪽지에는 보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다.
이를테면 해군 백령도사령관 앞으로 된 한통의 쪽지에는 "미 제국주의의 시녀노릇을 즉각 중지하고 위대한 김일성 원수님께 투항하여 영광된 인민 해방군의 동무가 되시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심리전은 즉각적인 대응전(對應戰)으로 전개되기 마련이었으므로 특히 연말이 되면 심리전이 상설적인 전쟁터와도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친애하는 인민군 여러분! 자유없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예처럼 배곯으며 살지 말고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여 사람대접 받으며 배불리 먹고 사시오."
위의 글은 그 당시 내가 그들에게 적어 보낸 한 장의 쪽지 내용이었는데 그 글 서두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민군 장병여러분1"이라고 썼고, 글 아래쪽에는 그들이 했던 것처럼 「해군 백령도사령관」또는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장」이란 직함을 적어 놓곤 했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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