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2)

머린코341(mc341) 2015. 1. 24. 01:44

나의 人生旅路 - 2. 6·25전쟁

 

(2) 해군 육전대-(2)

 

7월 20일 해군 육전대는 영덕지구에 배치되어 있는 육군 3사단본부의 요청에 따라 1개 소대의 병력을 강구(江口)로 파견하여 3사단의 작전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2중대장 윤석근 소위는 그 병력을 직접 인솔하여 선편(소해정 304, 506호)으로 강구까지 가서 3사단에 배속시킨 다음 본대로 귀대했다.

 

한편 그 날 안강읍 서방 도덕산(道德山)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옥산동(玉山洞)으로 출동하여 적정을 탐색하고 있던 1중대의 장실완 병조장이 지취하는 정찰소대는 그 이튿날 새벽 그 마을에 있는 큰 농가집 마당에서 총기 손질과 조반을 먹고 있는 1개 소대 가량의 적 게릴라와 부역자들을 발견하고 경기관총 1정을 요소에 배치하는 가운데 그들을 포위 공격하여 거의 전멸을 시켜 버렸고, 그 현장에서 생포한 옥산동 인민위원장(60대 노인)과 그 노인의 며느리뻘 되는 여성동맹위원장을 본대로 연행해 왔는데, 30대 중반의 그 여성동맹위원장이라는 여자는 빨갱이 사상에 미친 여자같이 독기어린 욕설을 퍼부어 대며 대원들을 매도하고 있었다. 그 노인과 그 여자는그 날 흥해(興海)까지 연행되어 현지 경찰지서에 인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날 정찰소대가 기계에 도착하자 나는 기계에 집결해 있던 전병력을 지휘하여 신광면(神光面)을 거쳐 도보로 흥해로 빠져 나갔다. 흥해로 빠져 나가게 된 이유는 강구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3사단의 요청으로 그 지역에 대한 적정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경우 영덕지구에서 어렵게 버티고 있는 육군 3사단은 포항으로 철수할 수 있는 육로상의 퇴로를 차단당하게 됨으로써 큰 위기를 맞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육전대가 흥해에 당도한 시각은 그 날 오후 2시경이었다. 흥해에 도착하는 즉시 나는 정보수집과 포항기지로부터 전달된 연락사항이 없는가 해서 경찰지서를 찾았더니 마침 기지사령부로 돌아오라는 전갈이 와 있었기에 그 날 오후 4시경 포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포항에 도착하고 보니 마치 포항에 큰 변이 일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공에서는 고막을 찢는 금속성 비행음이 쉴 새 없이 들리고 있었고, 해변에서 시가지를 거쳐 효자동으로 내려가는 도로상에는 유엔군을 실은 트럭행렬과 전차와 야포부대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룬 채 서서히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항 앞바다에는 병력과 장비를 싣고 온 수송선단과 호위함정 등이 빽빽이 깔려있고, 수많은 군수물자가 양육되고 있는 해변가에는 군수물자의 양육과 운반에 동원되고 있는 소형 주정과 각종 공병장비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 당시 포항에 상륙을 했던 유엔군 부대는 미 육군 제1기갑사단이었다. 7월 18일에 상륙을 개시했던 그 기갑사단은 그로부터 3일째가 되던 그 날 지휘제대를 비롯한 마지막 제대의 상륙이 이루어진것 같았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 미군들의 이동제대의 후미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전투복 차림에 철모에 두 개의 별이 반짝거리는 장군 한 사람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 육군 24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도착했던 그 제1기갑사단은 포항에 상륵하는 즉시 왜관지구 전선에 투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포항 기지로 돌아왔던 나는 그 다음 날 아침 약 1개 대대의 적이 영덕-강구 간에서 아군(육군 3사단)과 교전을 하는 가운데 약2,000명의 적이 강구-포항 간의 요소인 남정면(南亭面)에 침입하고 있다는 급보에 접한 기지사령관 남상휘 중령의 명령에 따라 제1중대를 현지에 급파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게 했는데, 그 날 오후 8시경 5대의 트럭(기지사령부에서 징발한 일산 도요다차)에 분승하여 장사동에 도착했던 1중대는 남정 전방1킬로 지점에서 약200명의 적이 잠복해 있다는 적정을 탐지하고 중대장 정창룡 대위의 진두지휘하에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장사동 북방 길목에 3개 소대의 병력을 3개 방향에 매복시켜 경계에 임하고 있던 중 그 이틀날 새벽 3시경 규모 미상의 적이 아군이 매복해 있는 줄을 모르고 매복지점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오자 그들을 3면에서 포위공격하여 23명의 적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한 것 외에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날 새벽 1중대장이 현지 경찰지서의 전화를 이웅해서 그러한 전황을 보고해 왔을 때 나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자고 한 기지사령관과 함께 지프차에 승차하여 경기관총을 거치한 4분의 3트럭을 앞세우고 현지로 떠났다.

 

포항에서 장사동까지의 거리는 약 30킬로, 한 시간쯤 차를 달려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뿌옇게 샌 뒤였다. 그런데 격전이 벌어졌던 그 현장에 당도하기 전 나와 기지사령관은 약 400~500미터 떨어진 도로 좌측 산기슭에 시체를 끌고 가고 있는 적병들이 있는 것을 멀리서 목격하고 과연 큰 전과를 거둔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지프차가 현장에 도착하자 1중대장 정창룡 대위를 비롯한 2~3명의 1중대 간부들이 피로를 무릅쓰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1중대장의 안내로 둘러본 새벽녘의 격전장에는 20여 구의 적 시체가 너절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현장 부근 국민학교 강당에는 아식(俄式)소총과 체코식 기관총 및 박격포를 비롯한 상당량의 노획무기가 수집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양이 1개 중대는 무장할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많은 무기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구 동성 "저렇게 많은 무기를 노획하다니..."하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무기는 1중대가 3사단에 작전상 배속이 돼 있었으므로 그 무기와 2명의 포로는 3사단에서 인수해 갔었다.

 

그 날 새벽 1중대가 그처럼 큰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은 적병들이 아군이 쳐 놓은 함정 속에 빠져든 결과였겠지만 적을 섬멸할 때 육전대 대원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식별이 용이하도록 둘러놓은 전투모의 흰 띠였다.

 

그 흰 띠는 7월 10일 육전대가 편성된 후 해군육전대의 표지(標識)를 하기 위해 3 ~ 4센티 너비의 흰 띠를 미싱으로 박아서 둘러놓은 것이었다. 그 날 1중대는 전사자 2명을 내었다.

 

그 후 1중대는 적이 도주한 동대산(東大山)일대와 송라면 북방에 있는 보경사(寶鏡寺) 일대로 적을 추격하다가 장사동에 집결한 뒤 24일 명령에 따라 포항기지로 복귀하고 강구에 파견된 2중대의 일부 병력은 계속 육군 23연대에 배속되어 23연대 좌측방에 대한 수색과 정찰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7월 25일 현재 적은 영해(寧海)의 축산(丑山)고지에 사단(5사단)본부를 두고 그 예하의 2개 연대(7·10연대)를 강구방면의 화산동(花山洞) 뒷산 고지와 금호동 서쪽고지 일대에 집결시키고 있어 영덕지구에 결전이 임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1중대가 기지에 돌아오자 나는 재출동에 대비하예 기지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대원들에 대한 정신교육과 분대·소대의 전술훈련 및 실탄사격훈련 등을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짬을 내어 작전상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영일비행장과 영일만에 정박해있는 미 해군함정 및 강구의 육군 3사단본부와 23연대 CP등을 방문했는데, 특히 영일비행장에서 만나게 되었던 제40전투비행대대 조종사 존 글렌 미 해병 대위와는 먼 훗날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그가 예편 후 상원의원으로 활약하고 있을 때 여러 차례 그를 방문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눈 적이 있었지만 그 날 나와 인사를 나눈 후부터 그는, 간혹 출격비행을 할 때 나와 인사를 교환하려는듯이 비행기의 양쪽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육전대본부 상공을 한두 차례씩 선회한 적도 있었고, 또 우리 육전대를 위해 근접지원을 해 줄 때에도 더욱 악착같이 해 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었다.

 

먼 훗날에 재회를 했던 그 재회에 읽힌 감개무량한 후일담은 뒤에 언급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