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5회)

머린코341(mc341) 2015. 1. 26. 15:06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5회)

 

 

“27년전 서해상에서 발생한 옹진호 습격사건을 아시나요?”

전도봉 장군이 중대장을 마치고 새로운 부임지로 떠날 때 생긴 일이다.

당시 이 사건의주인공이 전 장군이었다는 점에서 또한번 군 안팎에서 관심을 모았다.

왜냐하면 전 장군은 66년 8월에 발생한 김해비행장 습격사건 때 주동자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전 장군의 중대장 시절을 잠깐 언급하고 옹진호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자.

전 장군은 74년 9월 도서부대(연평도) 21중대장을 마치게 된다.

다음 근무지는 해군본부 정보참모부(예산담당관).전 장군은 중대장 시절

‘81계획’에 따라 내내 공사현장에서 살다시피했다.

이미 언급했듯 81계획은 백령도 연평도 등 서해 5개도서를 완전히 요새화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병형 합참본부장 등 군 고위 장성들을 태운 함정(81함)이 북한군 고속정 10여척에 포위당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겪으며서해 5개 도서를 돌아본 뒤 나온 계획이었다.

전 장군은 81계획 시행 첫해에 중대장을 맡게 됐다.

그래서인지 중대장 시절의 사진이 왜 없느냐고 묻자

전 장군은 “흙만 파다가 중대장을 끝냈다. 공사판에 살았는데 무슨 사진을 찍었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또 이 대목에서 어렵게 중대장직을 인수인계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73년말 연평도에는 해병대 연평중대가 방어 및 경비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대장은 소령급. 전 장군이 중대장으로 부임할 때 약간의 부대개편이 이루어진다.

부대명칭이 연평중대에서 21중대로 바뀌었고 중대장은 대위급으로 하향조정됐다.

이때 전 장군이 대위계급을 달고 21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선임 중대장은 유현태 소령(해사15기)이었다.

전 장군(당시 대위)은 유 소령과 인수인계 과정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군내부에는 각종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해병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연평중대는 도서부대라는 동떨어진 위치로 인해 비리가 더욱 심한 편이었다.

병사들의 치약·치솔에서부터 판초우의 모포 등 각종 보급품들이 태부족한 상황이었다.

넉넉지 못한 보급품이었지만 그나마 말단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일이 드물었다.

중간에 어디론가 자꾸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는 53년 연평도에 처음 주둔한 이래 20년 동안 굳어진 관행이었다.

역대 중대장들은 으레 그런 상황이려니 해서 아무렇지 않게 인수인계하곤했다.

그러나 전 대위는 중대장 부임 첫날부터 선임 중대장인 유 소령과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며

인수인계를 쉽게 하지 않았다.

“유 소령님, 부대 재산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 상태에선 중대를 인수하지 못 하겠습니다.

부족한 물품을 다 채워 주십시오.”

“이봐 전 대위, 이런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인가. 다음 중대장한테도 부족한 상태로 인계를 해주면 될 게 아닌가.

빨리 인계 확인서에 도장을 찍게.”

“유 소령님,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진 그런 식으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저와 유 소령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비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재산 부족분을 모두 채워 주십시오.

그러기 전에는 절대 중대를 인수할 수 없습니다.”

전 대위의 고집은 완강했다.

유 소령은 처음에는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계속된 전 대위의 주장에 결국 뜻을 굽혔다.

할 수 없이 유 소령은 집에 가서 현금 400만원(재산부족분을 현금으로 환산한 액수)을 갖고 온 다음

중대 보급관에게 건네주었다.

보급관은 또 이 돈으로 인천에 가서 부족한 물품을 모두 사 왔다.

결국 유 소령과 전 장군의 인수인계는 일주일만에 이루어졌다.

전 장군의 회고.

“그때 유 소령님이 무척 고마웠다.

비록 선배였지만 기꺼이 후배의 뜻을 이해해 줬다.

당시 400만원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유 소령은 흔쾌히 부족분을 모두 채워주었다.

유 소령은 연평중대장이 마지막 보직이었다.

해병대가 해체되자 유 소령은 더 이상 근무할 의욕이 없다면서 전역 지원서를 낸 상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유 소령은 군복을 벗은 뒤 곧장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전역한 뒤 시카고에 들렀을 때 유 소령을 찾아가 옛날 얘기를 잠시 나눈적이 있었다.

아무튼 그때 인수인계 이후 적어도 21중대만큼은 보급품과 관련된 비리사건이 거의 없어졌다.”

전 대위는 약 10개월 뒤인 74년 9월15일 중대장 보직을 마쳤다. 해군본부로 전출명령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천으로 향하는 배편이 안좋아 열흘 동안 대기하게 됐다.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인해 배가 제때에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약 한달 동안 더 머물게 됐다.

당시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은 ‘옹진호’가 유일했다.

그런데 조금만 기상조건이 나빠도 옹진호는 출항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옹진호는 해군 고속정의 호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출항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태풍이 끝나고 파도가 잠잠해지자 옹진호는 출발하게 됐다.

출항이 지체되다 보니 부두에는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휴가병력도 꽤 많았다. 특히 전 대위를 환송하기 위해 나온 장병들도 많았다.

떠날 사람은 줄잡아 300여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전 대위는 이들을 다 승선시킬 수 있을까하는 걱정때문에 선장을 먼저 만났다.

“선장님, 다 태울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전 대위는 또 옹진호의 치안책임자인 경찰관을 만나 똑같은 질문을 했고 역시

“전부 태울 수 있으니 걱정말라”는 대답을 들었다.

옹진호의 승선정원은 300명이었다.

안심한 전 대위는 해병대 휴가병사들에게 “민간인이 다 타고 나면 맨 나중에 차례로 승선하라”고 명령했다.

휴가병사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요새화 작업에 시달려온 터라

한시라도 빨리 고향에 가고픈 마음으로 들뜬 상태였다.

그렇지만 전 대위의 명령에 따라 맨 뒤에 타기로 했다.

전 대위도 순서를 기다렸다.

이윽고 200여명의 민간인이 옹진호에 먼저 승선했다.

뒤이어 50여명의 해병대원들이 배에 승선하려고 막 준비하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옹진호는 묶어두었던 밧줄을 확 풀더니 잽싸게 떠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전 대위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태풍으로 전출 신고를 하지 못한 터였고 병사들은 어렵게 받은 휴가가 망쳐지는 순간이었다.

이배를 놓치면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하는 처지여서 병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배는 떠나고 해병대원들은 발발 동동 구를 수밖에.

옹진호는항구를 빠져나가 먼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옹진호가 약 2㎞ 정도 항해했을 때였다.

갑자기 해군 고속정 한 대가 나타나 옹진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고속정은 옹진호 선장에게 다시 부두로 돌아가라고 했다.

부두에 대기중인 해병대원들을 모두 태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호위를 해줄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할 수 없이 옹진호는 선수를 돌려 부두로 돌아왔다.

옹진호가 부두 방파제에 채 닿기도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병대 병사들이 배에 뛰어들었다.

휴가병사들은 물론이고 환송나온 해병대원들도 우르르 배에 뛰어올랐다.

그 다음 광경은 어떠했을까.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옹진호 선장 등 직원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관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해병대원들을 배에 안 태우려고 둘이 짰다는 것이었다.

옹진호 선장은 행동이 거친 해병대원들을 승선시키는 것을 썩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야 다시 잠잠해졌다.

전 대위는 선장에게 “인천까지 안전하게 모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전 대위는 또 해병대원들에게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배안의 분위기는 살벌하기만 했다.

수모를 당한 해병대원들이 분노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 큰 사고 없이 옹진호는 7시간만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옹진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자마자 부둣가에는 헌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헌병 백차 여러 대가 대기해 있었다.

그러면서 헌병들은 배에서 내리는 족족 병사들을 모두 연행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던 전 대위가 헌병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헌병 책임자가 나오더니 “선상 난동사건 때문에 연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대위는 다시 헌병 책임자에게 야단을 쳤다.

“이보게. 휴가나온 병사들을 연행한다는 게 말이나 돼.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고향가는 병사들을 잡아다 놓으면 어떻게 하나? 그 대신 나를 잡아가면 될 것 아니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테니 병사들은 그냥 놔두게.”

계속된 전 대위의 호통에 헌병 책임자는 해병대 병사들을 풀어줬다.

대신 전 대위가 헌병대에 연행됐고 그날 밤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서울지구 헌병대 구치소로 압송됐다.

이게 바로 ‘옹진호 습격사건’의 진상이다.

결국 전 대위는 이 사건으로인해 두번째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66년 8월에 발생한 ‘김해비행장 습격사건’의 주동자로,

두번째는 옹진호 습격사건의 책임을 지고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특히 옹진호 습격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전 대위의 수감생활은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해병대에서도 이 사건이 어떻게 매듭될지 관심이 매우 컸다.

동정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황정연 해군참모총장도 빨리 수습하고 싶었지만 청와대 눈치 때문에 쉽게 결론을 못내리고 있었다.

전 대위가 감옥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동료 장교들의 호응이었다.

해병대 동료 장교들은 전 대위에게 면회를 가서 위로도 하고

영치금도 넣어주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전 대위는 한 달 여를 감옥에서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는 김기덕 기자가 면회를 왔다.

그는 KBS 정치부 소속이었다.

“이봐 전 대위,

우리 집 뒤쪽편에 오두창 대령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말야.

그 시람이 청와대 실력자인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 양반에게 얘기하면 일이 잘 풀릴 거라고 하네.

전 대위 자네가 직접 찾아가서 부탁을 한번해보게.”

“김 기자, 내가 이렇게 갇혀 있는 몸인데 어떻게 나가서 얘기를 하는가 이 사람아.”

오두창 대령(예비역 소장, 포병간부 5기)은 국방부에서 파견된 청와대 상황실장이었다.

전 대위도 그 정도의 직책이면 충분히 힘을 써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감옥에서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궁리끝에 전 대위는 헌병대장에게 찾아가 비밀협상을 했다.

몇 시간만 눈 감아주면 일을 해결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헌병대장도 전 대위가 갇혀 있는 것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터여서

묘수가 생겼다는 전 대위의 말에 선뜻 응해주었다.

당시 오 대령은 서울 진관외동의 기자촌에 살고 있었다.

전 대위는 헌병대장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녁무렵 감옥을 몰래 빠져 나왔다.

먼저 김 기자를 만난 다음 오 대령 집으로 곧장 찾아갔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김 기자는 오 대령과 평소 안면이 있는 터여서 전 대위를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오 대령님, 제 친구 전 대위입니다. 의협심이 매우 강한 친구입니다.”

그러면서 옹진호 습격사건을 쭉 설명하면서 혼자 책임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있으니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설명을 다 들은 오 대령은 “해군총장에게 얘기를 해놓을 테니 직접 찾아가라”고 대답했다.

“오 대령님, 전 대위는 지금 수감중입니다. 오 대령님을 만나기 위해 감옥을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만약 총장이 이 사실을 알면 보고도 없이 무단이탈했다고 역정을 낼 게 분명합니다

.또 헌병대장 등 몇 사람이 문책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전 대위가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모른척하고 직접 얘기만해주십시오.”

오 대령은 한바탕 웃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총장님, 청와대 오 실장입니다.

헌병대에 갇혀 있는 전도봉 대위 건인데 말입니다.

청와대 눈치 볼 것 없이 총장님 소신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전 대위는 이튿날 석방됐다.

전 대위는 전출명령을 받은 지 한달 보름만에야 감옥에서 풀려났고 근무지로 복귀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 대위는 훗날 자신이 수감됐던 헌병대에서,

즉 84년 4월부터 1년동안 본부기지 헌병대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