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4회)

머린코341(mc341) 2015. 1. 26. 15:04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4회)

 

 

우리나라 해군 함정이 북한군 고속정에 포위됐었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부터 28년전인 1973년 11월27일에 발생한 일이다.

전도봉 장군이 백령도에 근무할 때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1973년 10월10일.이 날은 해병대 역사에서 어쩌면 치욕적인 날로 기록된다.

다름 아닌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날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해병대사령관이 사라지고 대신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이 해병대를 지휘케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형식적이었고 해군참모총장이 인사 작전 등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해병대사령부의 해체는 전도봉 장군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근무지가 바뀌었다.

해병대사령부 행정관 및 기획통제관으로 있다가 도서경비대(백령도) 정보참모로 발령받았다.

계급은 대위 때였다. 정보참모가 할 일은 백령도 인근의 적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백령도는 위치상으로 북한땅 해주와는 지척간이다.

특히 북한군 해군기지가 있는 월내도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따라서 정보참모는 이들의 움직임을 일거수 일투족 추적하고 분석하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백령도로 발령을 받은 지 약 한달쯤 지난 11월28일 아침이었다.

이날도 전 대위는 백령도 관측초소에서 망원경을 통해 섬 주변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북한땅 주변을 살핀 뒤 대청도쪽으로 망원경을 돌렸다.

그러자 문득 아군 함정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망원경의 렌즈를 클로즈업 시키자 함정 머리쪽에 씌어진 ‘81’자가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우리나라 APD(고속수송함) ‘81함’이었다.

전 대위는 81함의 출현을 일단 보고했다.

81함에는 백령도를 방문하는 이병형 중장(합참본부장)이 타고 있었다.

전 대위 역시 합참본부장의 방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 대위는 보고를 마친 뒤 다시 망원경을 들어 대청도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방금전에 보이던 81함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고속정 5척이 갑자기 나타나

대청도 인근에서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선회 항해를 하는 것이었다.

전 대위는 깜짝 놀라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천천히 살폈다.

그러자 조금전에 보였던 81함이 고속정 물보라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고속정 5척이 81함 주위를 고속으로 항해하며 맴돌고 있었다.

고속정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아군일까 적군일까.

우리나라 고속정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전 대위는 북한군 소속 고속정이라고 얼른 판단했다.

전 대위는 일단 정체불명의 고속정 5척이 출현, 81함을 에워싸고 있다고 상황보고를 했다.

그러자 백령도와 대청도 일대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백령도에 설치된 각종 포문도 동시에 열렸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81함 주위를 빙빙 돌던 고속정 5척은 잠시후 약 올리기라도 하듯 북쪽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해주 앞바다를 지나더니 월내도쪽으로 얼른 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군이 아군함정을 포위했다는 것이 아닌가.

또한 81함에는 합참본부장 등 고위 장성들이 타고 있지 않은가.

상상만 해도 정말 아찔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런 북한군의 고속정 출현에 놀랐던지 81함은 함수를 대청도 뒤쪽으로 한바퀴 돌아나왔다.

원래의 항로를 바꿔 남쪽으로 우회 항해를 했던 것이다.

항구도 옹포항을 비껴 장춘항으로 선택했다.

81함이 백령도에 도착하자 이병형 합참본부장 등 10여명의 합참 장성들이 내렸다.

이날 오후 이들 일행은 다시 81함편으로 돌아갔다.

서울로 온 이병형 본부장은 곧장 청와대로 가

백령도와 대청도 일대를 완전히 요새화해야 한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 승낙을 받았다.

이게 바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등 서해 5개도서를 요새화한다는 이른바 ‘81계획’이다.

아울러 서해 5개도서 인근 해역에 91함(충무함) 96함(전북함) 등 구축함 2척이 증강 배치됐다.

그렇다면 왜 북한군 고속정이 갑자기 나타나 81함을 포위했을까.

이같은 긴박한 상황은 당시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 81함에는 합참본부장등 국방부·합참의 고위 장성들이 승선해 있었다는 점에서 예삿일이 아니었다.

만약 총격적이 벌어졌다면?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해 5개도서는 북한의 영토”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북한 군부는 한국군 고위 장성인 합참본부장 일행의 백령도 방문 사실을 미리 알고

기습적으로 고속정을 발진시켜 서해 5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전 장군의 회고.

“당시 백령도 관측 OP에서 북한군 고속정을 발견했을 때 정말 섬뜩했다.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81함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한군 고속정이 남측 영해로 깊숙이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충분히 응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81함 주위를 맴돌며 무력시위를 벌였다는 것은 엄연한 도발행위였다.

아마 그때 함장은 81함에 합참본부장이 타고 있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전쟁은 나지 않았고 서해 5개도서의 요새화 작전은 실시됐다.”

이와 관련, 해군 기록에 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술하고있다.

“1973년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이병형 합참본부장외 장성 10명이 서해 도서지역을 시찰하다가

북한 경비정 수 척과 조우했다. 81함은 2천130t이며 정현경 대령(전 해군참모차장)이 함장이었다.

81함은 2000년 12월 폐함됐다….”

28년만에 밝혀진 아찔한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이병형 전 합참본부장의 증언.

“당시 북한은 NLL을 처음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 방송은 북쪽지역을 항해하는 선박은 미리 통보하지 않을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도 남쪽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서해 5개도서를 돌아보기로 했다.

당시 81함에는 합참 소속 장교외에 국방부 장교들도 함께 승선해 있었다.

연평도를 맨먼저 들른 뒤 27일 오후 백령도로 향했다.”

이날 밤 10쯤 이 본부장은 함장실에서 자고 있을 때였다.

레이더실에 있던 정현경 함장(대령)이 이 본부장한테 오더니 황급히 깨웠다.

“본부장님, 잠시만 일어나십시오.”

“아니 함장,무슨 일이요?”

“본부장님,잠시만 레이더실로 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북한 경비정이 출현했습니다.”

“그래?” 이 본부장은 서둘러 옷을 입고 레이더실로 갔다.

어선 출입금지 구역인 NLL 바로 밑에 북한 경비정 10척이 출현해 있었다.

5척은 81함 우측에, 다른 5척은 81함 좌측에 포진해 있었다.

동행했던 다른 장교 10명도 함께 있었다.

“본부장님,북한 경비정들이 공격태세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잠자코 설명을 듣고 있던 이 본부장이 함장에게 물었다.

“함장의 생각은 뭐요?”

“본부장님, 우리의 임무는 본부장님 일행을 백령도에 안전하게 모시는 일입니다.

사태 발생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니까 다른 방법으로 백령도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함장이 알아서 판단을 하시오.”

대청도 뒤쪽으로 돌아 백령도로 가는 우회 항로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 본부장은 다시 함장실로 돌아와 마저 눈을 붙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함장이 다시 이 본부장을 깨웠다.

“본부장님, 한번 더 레이더실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 본부장은 다시 레이더실로 갔다. 날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다.

“본부장님, 적 경비정들이 우리가 들어갈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레이더를 살펴보니 적 경비정 5척이 옹포항 입구쪽에서 기동행진을 하며 진을 치고 있었다.

분명 우리측 영해였다.

“이봐요 함장, 우리측 다른 군함은 지금 어디 있소?”

“본부장님, 우리 구축함이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요? 함장 생각은 어때요?”

“본부장님, 비상시 사용하는 임시 부두가 있습니다. 그리로 돌아가면 경비정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함장이 알아서 판단하시오.”

결국 81함은 옹포항을 뒤로 하고 백령도 남쪽에 위치한 장춘항으로 함수를 돌렸다.

이윽고 이 본부장 일행이 조심스럽게 내렸다.

함장 보고에 의하면 북한 경비정이 방금전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이 본부장이 장춘항에 내리자 백령도 경비대장이 마중을 나왔다.

경비대장의 첫마디가 걸작이었다.

“본부장님, 휴전 이후 첫 공습경보가 내려져 있습니다.”

“아니 경비대장,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적기 4∼5대가 백령도 상공에 출현했습니다. 1, 2초 간격으로 선회비행하고 돌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조치했소?”

“오산 공군기지에 통보됐고 우리 측 공군기들도 가까이에 출격해 있습니다.”

이병형 장군의 증언.

“당시 백령도 주변에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날 오전 10시쯤 됐을 때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

국민들이 걱정할까봐 언론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돌아오자마자 박 대통령을 만나 백령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도 흔쾌히 81계획을 승낙했고 곧바로 국회 보고를 통해 관련 예산을 확정했다.”

휴전 이후 백령도 일대에서 북한 해·공군이 우리의 영공과 영해를 침범,

최대의 무력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해군의 고속정이 변변치 못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북한 군부가

함참본부장 일행을 태운 81함 길목을 가로막으며

백령도 일대를 안방 드나들 듯이 기동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81계획’은 대강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중대병력 증강

△전 해안 콘크리트 방어벽 설치

△철도 레일로 해안 바리케이드 설치

△전 해안에 해안포 배치 등이었다.

이른바 요새화 작업이었다.

이 공사에는 40억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그러나 예산은 어디로 갔는지 작업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전적으로 병력들의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지뢰대를 이용해 바위를 운반하고, 망치와 정 삽 쇠파이프 등으로 구멍을 내고 바위를 부쉈다.

병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먹는 것까지 부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 전도봉 장군은 백령도 경비부대 정보참모에서 연평도에 주둔한 해병부대 21중대장으로 발령받았다.

81계획이 한창 진행되는 터라 전 장군은 발령받자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업현장에 곧장 뛰어들었다.

작업 자체가 워낙 위험한 일이라 중대장이 현장에서 직접 지휘해야 모든 것이 안전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열악한 작업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일을 못하겠다는 병사들도 늘어났다.

전 장군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부식차를 기다렸다.

선탑자인 보급관이 부식차에서 내리자마자 화가 난 전 장군은 보급관한테 달려가 야구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팼다.

“야 이 새끼야, 병사들이 배가 고파 죽겠는데 부식을 어디 다 팔아먹는거야? 빨리 내놔!”

이렇게 세번씩을 팼더니 다음부터는 아예 보급관이 나타나지 않고 보급계 병사만 오는 것이었다.

전 장군은 또 아침 참모회의 때 정식으로 문제삼았다.

“부대장님, 더 이상 일을 못하겠습니다.

병사들이 배가 고파 힘을 쓰지 못합니다.

책정된 예산은 다 어디가고 병사들만 죽어라 일을 합니까?

빨리 내놓으시죠?”

 

부대장에 대한 사실상 정면 도전인 셈이었다.

다른 참모나 중대장들도 부대장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감히 입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전 장군의 한마디는 주위를 바짝 긴장시켰다.

이튿날 회의 때 전 장군은 부대장으로부터 보직 해임통보를 받았다.

“21중대장은 이 시간부로 보직해임이니 그리 알라!” 그러자 전 장군이 벌떡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럼 구두로 하지 말고 문서로 해주십시오.”

또 한번의 도전이었다.

보안부대와 헌병대에서 전 장군의 뒤를 조사했으나 아무런 혐의점이 없었다.

오히려 전 장군을 보직해임 시켰다간 부대비리만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보직해임은 일주일 후 무효로 처리됐다.

전 장군의 회고.

“내가 보직해임된 이유는 군수물자 불애용죄였다.

부대 냇가에서 미역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보급 부식으로 미역을 받았다.

그런데 소금이며 양념을 통 주지 않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취사병이 와서 어떻게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럼 바닷물로 간을 맞추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결국 배급받은 미역은 바닷물로 끓여졌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미역국을 버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벼르던 부대장이 그걸 증거로 내세워

군수물자 불애용죄라는 군법에도 없는 죄목을 들이대며 보직해임을 통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