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2회)

머린코341(mc341) 2015. 1. 25. 07:06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2회)

 


공군장교와 해병대원들간에 대판 싸운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어떤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해병대원들이 공군부대를 습격하면서 생겨난 집단 난투극이었다. 이른바 ‘8·8습격사건’이다.

지금부터 35년전인 66년 8월6일. 때마침 주말을 맞아 부산에서 외박을 마친 전도봉 장군(당시 소위)을 비롯한 7명의 해병학교(35기) 기초반 소위들이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부산시내를 빠져나와 구포다리 건너 첫번째 정류장에 막 정차했다. 일요일 저녁 막차여서 그런지 버스안에는 승객들이 많았다. 또한 구포 정거장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많았다. 10여명의 공군 장교들도 함께 있었다. 때문에 구포 정거장 버스의 앞문으로 승차하기가 어렵게 된 빨간 ‘마후라’를 두른 공군소위들(김해 공군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이 주먹으로 버스의 후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때 후문쪽 좌석에 윗저고리를 벗은 채 앉아 있던 35기 소위 한 명이 창문을 열고 “앞문으로 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공군소위 한 명이 “저 새끼들 개병대놈들 아냐”하며 앞문쪽으로 갔다. 이와 동시에 버스 안에 있던해병소위 한 명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라고 하며 앞문쪽으로 달려가 버스를 타려는 공군소위 멱살을 잡고 내렸다. 이를 본 나머지 해병대원들도 잽싸게 뒤따라 내렸다. 해병대원 7명과 공군 소위 11명.‘후다닥 퍽퍽’ 하더니 공군 소위들이 큰 대자로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눈깜짝 할 사이에 영화의한 장면이 연출됐다. 버스의 승객들도 멈춘 채 이 광경을 바라봤다. 버스에 다시 오른 해병대원들은 운전사한테 “빨리 갑시다!”고 했다.

그로부터 30분 뒤 버스가 급정거했다. 2대의 공군 트럭이 버스 앞뒤로 막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트럭에서 공군 장교 30여명이 내렸다.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공군 장교들은 버스 후문쪽으로 달려오더니 몽둥이로 유리창을 깨며 문을 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해병대 소위 2명이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또 진해여고 학생 1명이 다쳤다. 상황이 심각함을 안 해병대 소위들은 운전사로 하여금 앞에 가로막은 트럭을 피해 무조건 달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버스는 겨우 빠져나왔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부대로 돌아온 35기 기초반 장교 학생회에서는 취침 점호를 마친 뒤 긴급 회의를 가졌다. 공군 장교들의 몽둥이에 맞은 해병대 장교 1명이 중상을 입어 진해병원으로 후송됐기 때문이다. 회의 참석자는 김도삼 중대장, 김무일 부중대장, 전도봉 군기부장 등을 비롯, 소대장 13명이었다. 회의 화두는 “해병대가 공군한테 맞아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망가진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무장을 하지 않고 정모(팔각모)와 카키색 근무복을 입기로 했다. 작전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전체인원 142명 중 입원환자 등을 제외한 129명이 8일(월요일) 새벽 2시를 기해 은밀히 부대 철조망을 몰래 빠져나간 다음 경화역에 집결한다. 두번째 새벽 4시에 출발하는 첫 열차를 탄다. 세번째 역장에게는 독도법 훈련을 위해 진영까지 간다고 한다. 네번째 차비 대신 손목시계 30개를 모아 진영역에서 내린다. 다섯번째 역전 도로변에서 3개 제대로 나누어 시계나 돈을 주고 화물트럭을 빌려 타고 공군기지 정문 앞에 도착한다.

이윽고 새벽 2시 내무반에서 조용히 잠을 차는 척하고 기다리던 해병대 129명은 3개 제대로 나눠 작전 개시에 들어갔다. 철조망을 넘고 경화역에 집결한 이들은 새벽 4시에 출발하는 첫 차를 탔다. 계획대로 역장에게는 독도법훈련차 진영으로 향한다고 말했다. 경화역에서 진영역까지는 20여분. 진영역에도착한 이들은 트럭(1,2제대)과 버스(3제대)에 각 각 나눠타고 김해 공군기지로 향했다. 열차가 김해까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진영역에서 다른 교통편으로 갈아탔다. 이렇게 해서 김해 공군기지 앞에 도착한 시각이 아침 5시50분. 여름이어서 그런지 날은 훤하게 밝았다. 1,2제대가 먼저 도착했다. 이들은 3열종대로 대오를 정렬한 뒤 공군기지 정문쪽으로 무조건 걸어갔다.

“잠깐 정지!” 낌새를 챈 공군 위병근무자 2명이 해병대원들을 제지했다. 당직 사령부의 허락없이는 절대 출입할 수 없다며 가로막았다. 당시 공군부대의 당직 사령관은 최만석 중령(69년 KAL기 납북사건 당시 조종사)이었고 당직 사관은 이양호 대위(전 국방장관)였다.

이때였다. 독이 오른 해병대 소위 한 명이 대열에서 뛰쳐나왔다.

“이 새끼, 군인이 말이 많아!”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위병 한 명이 나동그라졌고 해병대 소위는 순식간에 권총을 빼앗아 다른 한 명도 제압했다. 해병대 소위는 또 “야,임마 앞장서!”하면서 비행학교 조종반 중대막사까지 길을 안내하게 했다. 이때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다. 해병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보로 달려 약 2㎞ 정도 떨어진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윽고 공군 장교 내무반 안. 기상나팔 소리에 막 일어난 50여명의 공군 장교들은 침상 정돈을 하거나 일부는 세수를 하고 있었다. 새벽 6시에 해병대원들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꿈엔들 알았으랴. 내무반에 도착한 해병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휙휙 날리더니 손과 발로 무차별 타격을 가했다. 3분여 뒤에는 버스를 타고 늦게 도착한 다른 해병대원들(3제대)까지 가세했다. 내무반에 있다가 졸지에 손님을 맞은 공군 장교 50여명은 다시 침상위로 꼬꾸라졌다. 상황은 불과 10분도 채 안 걸렸다.

해병대원들이 손을 툴툴 털고 막 나가려는 순간 어디에선가 연막탄이 날아와 터졌다. 이어 비상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부대 전 장병들은 지금즉시 연병장에 집합하라!”였다. 정문에는 어느새 무장병력이 추가됐다. 해병대원들에게 위기의 순간이 닥쳤다. 간부 장교 몇 명이 아이디어를 냈다. 당직실로 가서 당직 장교와 더 이상의 확전을 막자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다른 장교들도 동의했다. 이들은 열을 지어 당직 사령실 앞에 집결한 다음 이양호 대위에게 자신들의 뜻을 말했다.

그러자 이 대위는 “부대장이 7시에 출근하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해병대원들은 또 다시 행동을 취했다. 한 손을 허리춤에 갖다대고 다른 한손을 흔들어대며 군가를 불렀다 .‘나가자 해병대’와 ‘청룡은 간다’였다. 공군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무차별 습격사건을 벌인 뒤호랑이굴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였다. “저 새끼들 죽여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연병장에 모인 공군장병들(200여명)이 해병대원쪽으로 달려왔다. 이들의 손에는 갈고리와 쇠스랑이 각각 들려 있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여기저기서 막 날아왔다. 해병대 장교 한 명이 “격납고쪽으로 가자”고 외쳤다. 비행기 근처로 가야 돌멩이가 안 날아온다는 것이었다. 해병대원들은 우르르 몰려 격납고로 달려갔다. 그러나 돌멩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후퇴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정문에는 무장 병력이 지키고 있고 퇴로까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한 장교가 “저쪽 철조망이다!”고 외쳤다. 이와 동시에 해병대원들은 활주로 끝에 위치한 철조망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철조망이 워낙 견고해 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새 공군 장병들이 코앞에까지 쫓아왔다. 해병대원들은 “무조건 넘자”는 소리와 함께 각자 철조망을 기어 올라갔다. 손과 발이 찢겨지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더욱이 철조망 건너 아래쪽에는 늪지대였다. 그래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철조망을 넘은 해병대원들은 늪지대를 헤엄쳐 건넜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해병대 소위 한 명이 늪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장교들 3명이 뛰어들어가 구출한 뒤 인공호흡을 시켰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결국 사망자는 뒤늦게 달려온 앰뷸런스에 실려 공군부대 의무중대로 갔다. 다른 부상자들도 함께 실려갔다.  의무중대에는 부상을 입은 공군 장교들과 해병대 장교들로 만원이었다.

사건이 커진 것은 다음이었다. 해병대 진해기지 사령부에서는 주동자 6명을 구속하고 35기 기초반 중대의 지휘관 등 3명을 함께 구속했다. 그러나 당시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자존심 싸움에서 벌어진 사건을 엄히 다스렸다가는 35기 소위들과 후배들의 사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 사령관은 묘안을 하나 짜냈다. 35기 장교들과 비행학교 장교들 간에 자매결연을 하는 것이었다. 강 사령관은 당시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에게 동의를 얻어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김 장관은 청와대로 달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자매결연 문제를 건의했다.

결국 강 사령관과 장 총장은 각각 서로의 부대를 방문, 젊은 장교들에게 유감표명을 했다. 나중에는 자매결연까지 하게 됐다. 남은 것은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들. 강 사령관은 진해기지 사령관인 박성철 준장에게 선고유예를 지시했다. 그러자 박 사령관은 자신이 임명한 재판관 강복구 대령을 불렀다.

“강 대령,주동자들에게 2년만 선고하면 어떻소? 그러면 강 사령관이 감형할 것이오.”

주동자들은 이미 검찰로부터 5년 구형을 받은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강 대령은 아예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며칠 뒤 재판이 열렸다.

“지금부터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 대령은 벽쪽으로 휙 돌아앉아 버렸다. 선고유예를 하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의자를 돌려앉는 해프닝은 우리나라 재판 역사상 처음이었다.

재판이 계속 연기됐다. 일이 이쯤되자 해병대 법무감 이양우 대위(87년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가 진해로 직접 내려와 주동자들과 대면했다. 이 과정에서 이양우 대위는 전도봉 소위를 만났다. 전 소위가 사실상 핵심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이봐 전 소위, 젊은 혈기에 자존심 문제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뭔가 결론을 내려야 하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총대’를메줘야 하겠네. 대신 군필을 보장해주겠네.”

“다른 장교들은 어떻게 됩니까?”

“모두 풀려날 수 있네. 전 소위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면 사건은 깨끗이 마무리할 수 있네.”

전 소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군필 면제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이 대위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렇게 해서 진해 해군헌병대 영창에 수감돼 재판을 받아왔던 10명의 장교들 전원이 풀려났다. 대신 전 소위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고향인 거제도로 낙향했다.

그런데 한 달 뒤 전 소위한테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전 소위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다시 이 대위를 만났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게 군필 약속을 했잖습니까? 이 대위는 전 소위가 내미는 입영통지서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일을 잘못 처리했네. 대단히 미안하네. 대신 방법이 하나 있네.”

이 대위는 전 소위에게 국방부에 소청심사위를 제기하면 자신이 적극 나서 돕겠다고 말했다.

전 소위는 곧바로 국방부에 소청을 제기했다. 자신의 해직이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전 소위는 66년 11월 다시 소위 계급장을 달고 복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가 또 하나 생겼다. 해병대 부대에서 전 소위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잘못 받아들였다가 사고를 치면 지휘관의 입장만 곤란해진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 소위는 4개월여 동안 대기상태에 있다가 가까스로 보직을 받았다. 1사단 5연대 2대대 1소대장이었다. 그런데 2대대장은 날마다 전 소위의 동향을 보고해야 했다. 매일 아침 기상과 함께 전 소위를 대대장실로 불러 이상유무를 확인한 뒤 연대장한테 ‘이상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대대장이 전 소위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전 소위는 아침마다 대대장한테 불려가 미운 오리새끼처럼 꾸중을 들어야 했다.

전 소위도 근무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전 소위는 최종선택을 했다. 하루는 대대장한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대장님,저 제발 월남 보내주십시오.”

대대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음 알았네”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