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1회)

머린코341(mc341) 2015. 1. 25. 06:51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1회)

 

전도봉 장군은 해병대 역사에서 몇 가지 기록을 가진 영원한 해병대 사나이다. 해병대 소위 임관을 두번씩이나 했다. 또 아군끼리의 집단폭행 사건,즉 66년 8월 해병대와 공군장교들간의 집단싸움의 주동자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청룡부대 사상 처음으로 ‘전소대원 무사기록’을 세웠다.

해병대 출신들은 그를 가리켜 “해병대 해체 이후(73년)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고 치켜 세우는데 인색하지 않을 정도다.

경남 거제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해방과 6·25전쟁을 겪었고, 거제포로수용소의 참혹상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또한 청년시절에는 마산에서 고 김주열 사건 때문에, 연세대 재학시절에는 ‘김종필-오히라’간에 맺어진 한일국교정상회담 때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군필을 위해 사관후보생 35기로 입대한 것이 훗날 해병대사령관까지 올라가게 된다.

‘캡(CAP)부대’를 아시나요?

베트남전 때 전과자로만 편성된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공개됐다. 일명 ‘캡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청룡부대 2여단 소속으로 베트남전 초기인 68년부터 운용됐다.

원래 병역법상 전과자의 군입대를 가급적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캡부대’의 운용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전과자 특수부대로는 68년 1·21사건 이후 공군에서 사형수들을 불러다 비밀리에 훈련시킨 ‘실미도 부대’가 대표적이다. 또한 육군 특수부대(HID)에서 전과자들을 일부 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캡부대는 일반 전과자들로 구성됐다는 점과 베트남이라는 정글지대에 실전배치됐다는 점에서 이들과 사뭇 다르다.

전도봉 장군은 68년 12월부터 3개월동안 캡부대를 직접 지휘했던 장본인이다. 베트남 파병 36년만에 처음 밝혀진 ‘캡부대’의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전도봉 장군은 68년 1월 베트남에 자원 파병됐다. 그는 청룡부대(2여단) 2대대 5중대 1소대장 임무를 마칠 무렵인 68년 12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캡부대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캡부대의 탄생 배경은 이러했다.

청룡부대는 65년 9월 베트남에 처음 파병됐다. 2년뒤에는 전과자들 중 일부가 청룡부대원에 포함됐다. 탈영병이나 교도소 수감자중 현역 대상자들을 모아 해병대에서 훈련시킨 뒤 파병시켰던 것이다. 당시 징모법에는 ‘3년 이하의 실형자는 현역 대상자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일부 예외규정을 두고 있었다. 또한 사회정화 차원에서 일부 폭력배들을 본보기로 해병대에 입대시켜 강도높은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기초훈련을 받은 뒤 베트남 호이안 주둔지 2여단 예하 4개 대대에 각각 배치됐다. 처음에는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근무시켰으나 난동을 자주 벌여 부대관리가 영 엉망이었다. 그래서 전과자 출신들로 구성된 별도의 부대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캡부대’였다. 시기는 68년초였으며 당시 청룡부대장은 김연상 준장(76 전해병대사령관)이었다. 김 장군은 이에 대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도 사고뭉치들이 많아서 별도로 관리했던 것 같다”고만 말했다.

다시 말해 청룡부대내의 전과자들로만 새로이 만들어진 특수부대가 바로‘캡부대’였다. 대대별로 적게는 50∼60명,많게는 100여명 규모였다. 청룡1개 여단이 4개 대대였다는 점에서 당시 캡부대 소속의 전체 인원은 약 3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말이 특별부대이지 ‘막가파 부대’나 다름 없었다. 전투참여는 커녕 하루종일 ‘개기는’ 것이 일과였다. 부대장 등 현역 장교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았다. 부대내에서 자기네들끼리 정한 ‘별숫자’(전과경력)가 사실상 부대통솔을 장악했다. 별 아홉, 즉 전과 9범(최명식)이 부대장이었다. 최명식의 계급은 사병이었지만 실제 부대장인 대위보다 훨씬 높은 대우를 받았다.

또 캡부대원들은 외출외박이 이들 마음대로였다. 마을 술집에 가서 행패 부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민간인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마을 술집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큰 인명사고를 저지르기도 했다. 술집 주인이 자주 찾아와 외상 술값을 달라고 재촉하자 캡부대원들이 밤중에 몰래 나가 부비트랩을 설치했고 이를 모르고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던 주인 등이 무참히 살해됐던 것이다.

이같은 말썽에도 불구하고 캡부대를 섣불리 해체하지 못한 이유는 ‘정족수’ 채우기 작전 때문이었다. 인원이 많을수록 미국측으로부터 더 많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해병대 전력상 1개 여단 이상을 파병시킨다는것은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머리숫자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었다.

전도봉 장군은 소대장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낼 무렵인 68년 12월 어느날 대대장(정순한 중령)에게 불려갔다.이때 전 장군은 중위계급장을 달고 중대부중대장까지 맡고 있었다.

“이봐 전 중위, 부탁이 하나 있네. 캡부대를 맡아 주게.”

전 중위는 깜짝 놀랐다. 당시 ‘청룡부대 소대장’하면 정글에서 죽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전 중위는 수많은 작전에 참가하면서도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제 지옥의 소대장을 마치고 귀국할 때가 되자 다시 말썽많은 캡부대를 맡으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니, 대대장님. 전투에 참가하고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다시 캡부대장을 맡으라는 겁니까?”

“자네밖에 없네. 저 골칫덩어리들을 누가 교육시키겠나? 제발 부탁이네. 자네만이 저들을 인간으로 만들 수 있어.”

전 중위는 대대장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전 중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대장님,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5명 정도 시범케이스로 병원에 후송시키겠습니다. 별숫자가 많은 순서로 5명만 골라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전 중위는 캡부대를 맡았다. 전 중위는 부임 첫날부터 캡부대원들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전 중위가 지나가도 경례는 커녕,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 등 안하무인으로 전 중위를 빤히 쳐다봤다.

전 중위로서는 이미 예상했던 일. ‘그래 오날밤 한번 보자, 누가 이기나’하며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전 중위는 비상종을 치는 방망이를 빼들었다. 당시 비상종은 포탄탄피로 만들었는데 적공격 등 비상시에는 방망이로 종을 쳤다. 지금의 데모 진압봉과 비슷했다.

전 중위는 미리 작성된 5명의 리스트에서 최고참(최광식) 한 명을 우선 불러들였다. 그의 손가락을 봤더니 이미 손가락 세개가 없었다. 전 중위는 아무말없이 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캡부대원들의 귀를 자극했다. 방망이의 위력은 채 5분도 되지 않아 나타났다. 앰뷸런스가 오고 최광식은 거의 초주검이 된 채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자 반란이 일어났다. 부대원 전원이 양쪽 손에 수류탄 한 발씩 들고 부대막사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운동장에 줄지어 앉더니 수류탄의 안전핀을 모두 뽑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수류탄을 든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우우’하는 괴상한 소리까지 질러댔다. 만약 후송 간 두목이 죽을 경우 전 중위를 죽이겠다는 위협신호였다.

전 중위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들에게 다가가 비장한 각오로 한마디했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죽으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래 어디 나하고 한번 죽어보자. 죽고 싶은 놈 한 놈씩 수류탄을 들고 내 벙커로 와.”

전 중위는 이들에게 최후 통첩을 하고 모래포대로 쌓아 만든 벙커에서 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전 중위는 또 만약의 사태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장치를 했다. 우선 오른손에 M16 소총을 들었다. 연발장치도 풀었다. 여차하면 ‘드르륵’ 갈길 생각이었다. 또 왼쪽손에는 서치라이트용 랜턴을 들었다. 이 랜턴의 불빛은 정면으로 마추치면 상대방의 눈을 실명시킬 정도로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렇게 부대장과 부대원은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3시간여. 밤 12시가 막 지날 무렵이었다. 부대원들은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수류탄을 쥐고 있었다. 저러다간 손에 힘이 빠져 모두 자폭하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 중위는 또 이들에게 반격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전 중위는 다시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놈들 왜 안오느냐. 너희들이 존경하는 두목(최광식)은 절대 죽지 않는다. 여기서 결판을 내자. 죽을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너희 두목을 만날 것인지 분명히 해라.”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꼭 쥐고 있느라 지쳐 있는 탓도 있었지만 부대원들은 전 중위의 말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눈치였다. 또 이들은 전 중위의 전력(주먹실력)을 알게 되면서 강경자세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전 중위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수류탄에 안전핀을 집어 넣겠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라.”

다행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 중위는 한 사람씩 그들 앞으로 다가가 옆에 떨어져 있는 안전핀을 주워 수류탄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전 장군의 회고.

“전투에 처음 나가면 팔다리가 떨려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피비린내와 죽어가는 시체들을 보면서 그런 떨림이 없어진다. 이때쯤이면 사실상 제정신이 아니다. 또 당시 정글에서 살아 남는다는 것을 기적이라고 여겼다. 나도 정말이지 숱한 사선을 넘어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런데 수류탄의 안전핀을 끼워 넣을 때 손이 너무 떨렸다. 식은땀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이렇게 해서 캡부대는 어느 정도 군기가 잡히면서 군인다운 면모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들끼리 선임자를 뽑아 자율적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원래 이들은 계급이 있었지만 한번도 계급장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부대가 어느 정도 돌아가자 전 중위는 부대원들에게 금지된 외출을 허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랜만에 외출을 나간 캡부대원들이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마을에서 미 해병대 장교들이 외출나온 캡부대원들을 보자 “너희들은 외출금지인데 왜 나왔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화가 난 캡부대원들은 “너희들이 뭔데 참견하느냐”며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순간 미 해병대 장교들은 허리춤에 찼던 단검을 빼들고 맞섰다.

일이 커진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캡부대원들 중 몇 몇이 500m 정도 떨어진 부대막사로 달려가 M16 소총을 들고 나와 미 해병대 장교들의 목에다 바짝 들이댔다. 장교한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상 총살감이었다. 이 광경을 본 미 해병장교들은 다시 부대로 들어가 아예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고 나왔다.

이때 전 중위는 대대본부에서 쉬고 있었다. 대대본부 막사는 미 해병대와 공용이었다. 미군 장교들이 중무장하고 나가는 것을 본 전 중위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건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전 중위는 미 해병대 선임장교를 우선적으로 만나 협상을 벌였다. 전장에서 병사가 장교한테 총부리를 겨누면 장교는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군측은 바로 이런 규정을 내세워 한국의 캡부대원들을 휩쓸어 버리겠다고 ‘씩씩’거리며 다녔다. 전 중위는 우선 법으로 처리하자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면서 대대장을 통해 여단장에게 신속히 보고했다. 사고원인이 △문화적 차이 △민족의 이질감 등에서 비롯된 만큼 순리적으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보고했다. 아울러 미 해병대 당사자들에게 뭔가 만족스러운 조치를 취해줘야 할 것이라는 건의까지 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캡부대원들 가운데 주동자 몇 명을 여단본부로 압송한 뒤 다른 곳에서 근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부임 첫날 전 중위한테 시범케이스로 걸려들었던 문제의 최광식이었다. 전 중위는 최광식을 불러 사건의 전개과정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 해병대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동자를 압송하는 광경을 연출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광식은 막무가내였다. 교도소를 여러번 다녀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자신은 최소한 사형이거나 평생 교도소에서 썩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전 중위는 “여단본부까지만 압송하는 광경만 연출하면 된다. 그 다음에는 모든 상황이 원위치로 돌아온다”고 거듭 설득했다. 그러나 최광식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전 중위는 밤새 같이 잠을자면서 얘기를 했지만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여단본부에서 헬기가 도착했다. 헌병 3명이 내리더니 최광식을 포박한 뒤 헬기에 태웠다. 이 광경을 캡부대원과 미 해병대 장교들이 쭉 지켜봤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 헬기가 여단본부에 도착하자 최광식은 화장실에 다녀온다면서 포승줄을 잠깐 풀어달라고 했다. 헌병이 포승줄을 풀어주자 최광식은 화장실쪽으로 걸어가더니 사타구니에 숨긴 수류탄을 꺼내 자폭하고 말았다. 옆에 있던 헌병들은 크게 다쳤다.

전 장군의 회고.

“캡부대를 지휘하면서 느낀 점이 딱 하나 있다. 전과 경력 등 사회에서 주먹깨나 쓰는 친구들은 전장에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총알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대신 사회에서 바보취급 받았던 친구들이 전장터에서는 오히려 순수해진다. 주어진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총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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