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3회)
“66년 8월에 발생한 ‘8·8사건’은 당시 군 당국뿐만 아니라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한참동안 회자됐다. 이미 언급했듯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전도봉 장군이 있었다.
그해 8월 전 장군(당시 소위) 등 ‘7인의 해병대 소위’들은 무더위만큼이나 의협심이 뜨거웠다. ‘8·8사건’의 발로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해병대소위들은 교육을 받을 때 ‘우리 위에는 없다’는 의식으로 무장한다. 여기에의협심까지 가세해 ‘8·8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작품(?)을 연출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원래 8·8사건의 근원적 배경에는 사건발생 2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소위가 부산 주먹계의 대부와 석양의 대결투를 벌인 일이었다. 그로 인해 부산 바닥에는 소문이 쫙 퍼져 해병대 소위들이 부산에만 나타났다 하면 술과 음식 등을 공짜로 제공받을 정도로 간단치 않은 ‘대접’을 받았다.
‘석양의 결투’는 이러했다. 주말을 맞아 전 소위는 부산으로 외박을 나갔다. 전 소위는 친구와 만나기 위해 부산 광복동에 있는 별다방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2층 계단으로 몇 발자국 옮기자 뒤에서 누군가가 “야 별이 떴다. 길을 비켜 줘라”고 소리쳤다. 소위한테 별(장군)이라고 호칭했으니 듣기에 따라 좋을 수도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상당히 기분 나쁜 비아냥으로 들려왔다.
전 소위가 반사적으로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별다방 건너편쪽에 낯선 사람 7,8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등치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이었다. 평소 겁이 없고 의협심으로 무장된 전 소위는 “너희들은 뭐야!”하면서 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군복을 입고 있던 터라 해병대의 자존심이 전 소위의 발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전 소위의 돌발 행동에 7,8명의 주먹들은 “어쭈, 저게 여기가 어디라고”하더니 누군가 한 명이 전 소위에게 달려들었다. 이와 동시에 전 소위의 주먹에 맞아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두번째 달려온 다른 한 명도 전 소위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우르르 몰려들었다. 별다방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 소위도 뒤질세라 주변에 있는 몽둥이랑 깨진 병조각 같은 것을 들고 닥치는 대로 맞붙었다. 전 소위한테 쉴 새 없이 주먹도 날아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판단한 전 소위는 그 중 한 사람을 붙잡고 막다른 골목길로 끌고 갔다.
싸움은 1대1 상황으로 변했다. 서로 치고박고 한참동안 대혈투가 벌어졌다. 그러더니 상대편에서 “이제 싸움 그만하자”고 제의했다. 전 소위 손에는 깨진 유리병이 들려져 있었다. 전 소위는 “그렇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했다.
결국 이날의 결투는 전 소위의 승리로 끝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막다른골목에서 전 소위와 격투를 벌였던 사람은 다름 아닌 부산 주먹계의 대부인 ‘칠성파’의 두목 황인기씨였다. 황씨는 ‘황우’라는 이름으로 광복동을 중심으로 부산 주먹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둘은 서로 주민등록증을 대조해 보며 ‘형 아우’를 정했다. 전 소위는 25살이고 황우는 31살이었다. 이렇게 해서 칠성파 멤버들은 전소위를 두번째 ‘형님’으로 모시게 됐다. 따라서 전 소위 등 7인의 해병 소위들은 부산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8·8사건 이틀전에도 부산에 함께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 소위는 이들과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분개한 것이 하나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나 군 헌병대들이 황우를 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굽신굽신하는 것이었다. 전 소위는 이 광경을 보자 더욱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헌병대장에게 “이게 무슨 꼴이냐, 헌병대장이 무슨 깡패두목한테 굽신거리느냐”고 항의하며 헌병대 사무실을 방망이로 죄다 때려 부쉈다. 헌병대장의 계급이 소령이었으니 전 소위의 행동은 하극상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전 소위는 어린 시절부터 자라면서 불의를 보면 물불 안가리고 덤비는 스타일이었다. 큰형이 일본군인 생활을 했고 4살 때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9살 때 6·25전쟁을 겪었다. 이때 거제포로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마산 김주열 학생 변사사건 때 맨앞에 나가 데모를 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전 소위는 시대적 아픔과 충격의 현장을 몸소 겪으면서 스스로 의협심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결국 전 소위는 부산 칠성파와 싸우는 과정에서 군의 부패를 경험했고 이에 항거하다가 헌병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8·8사건’의 주동자가 돼 또 한번 헌병대에 붙잡히는 상황이 됐으니 전 소위는 이래저래 ‘사고뭉치’에다 눈엣가시로 취급받는 신세가 됐다. 오죽했으면 소위 임관을 두번씩 했고 한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을까.
전 소위가 베트남전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다.
67년 12월말 전 소위는 국내의 복잡했던 모든 ‘사건’을 뒤로 한 채 부산발 베트남행 군함을 탔다. 전장으로 향하는 군인의 마음을 어디 쉽사리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얼마전 결혼, 임신한 부인과 이별하는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그렇게 전 소위는 망망 바다에서 해를 넘겨 68년 1월초 베트남에 도착했다. 이 무렵 청룡부대는 최전방인 북위 17도선을 따라 위치이동을 하고 있었다. 66년 9월19일 투이호아 지구로부터 추라이 지구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67년 12월까지 30여회의 여단규모의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적 사살 1천327명,포로획득 130여명 등 실로 놀랄만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청룡부대의 용맹성은 미 해병대를 깜짝 놀라게 했고 세계 전사에도 기록될 만큼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68년 1월말 청룡부대는 호이안 지구로 옮겼다. 청룡부대의 이동은 베트남의 제2의 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도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베트남에 도착한 전 소위는 그해 1월22일 새로운 작전지역에서 2대대 5중대 1소대장에 보임됐다. 당시 5중대는 월맹군에 ‘공포의 중대’로 소문나 있었다. 전 소위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규모의 전투를 겪었다. 그 유명한 ‘구정공세’다.
1월30일 새벽 2시를 기해 월맹군측은 연합군측과 맺은 구정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어기고 베트남 전역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당시 청룡부대를 공격했던 월맹군은 2사단 예하의 3개연대를 비롯, 지방군의 대대병력 등이 참가한 대규모 공세였다.
이에 따라 청룡부대는 대규모의 반격작전을 감행했다. 이른바 ‘괴룡작전’이었다. 1개월이 넘게 전개된 반격작전에서 청룡부대는 미 해병대의 공중지원에 힘입어 620여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23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그만큼 구정공세와 반격작전은 베트남전 사상 가장 치열했다.
부대배치를 받은 전 소위는 전장의 지형지물을 채 숙지하기도 전에 소대원들과 함께 바로 이 대규모의 반격 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호이안 지구 인근의 월맹군 진지에 대한 공중 공격에 이어 전 소위가 이끄는 1소대가 첨병으로 공격 최일선에서 앞장섰다. 공격 소식을 미리 알아차렸는지 월맹군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그래도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적군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적 진지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목표 진지는 월맹군 대대 CP로 임시 사용했던 곳이었다.
전 소위는 소대원들과 정글을 헤치며 적 지역으로 막 들어섰다. 이때였다. 짐을 실은 트럭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전 소위는 잽싸게 트럭 주위를 포위했다. 그런데 트럭 위에는 짐이 잔뜩 실려 있었고 그 위에 하얀 아오자이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겁에 질린 채 잔뜩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단검으로 짐을 쑤셔보니 마대자루 안에는 돈다발이 가득했다.
“아니 이게 뭐지?” 전 소위가 물었다.
“그건 돈입니다 돈! 그것만 있으면 여기서 뭐든지 살 수 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미 달러였다. 베트남 지폐도 일부 있었지만 달러가 대부분이었다. 정확히 셈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수 만 달러 정도 될 것 같았다. 아군의 집중 공격으로 돈주인이 피해 있다가 숨겨놓은 돈을 가지러 누군가를 보낸 것 같았다.
전 소위가 소대원들의 표정을 보더니 “딴 맘 절대 먹지 말라”고 하면서 트럭을 안전한 곳까지 보호해 주라고 명령했다. 일부 분대장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전 소위는 단호했다.
“너희들 말야. 살아나갈 자신 있어? 전장에서 물욕에 눈이 어두우면 반드시죽게 돼 있어. 절대 딴 마음 먹어서는 안된다. 알았지!”
만약 명령을 어기면 총살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렇게 해서 1소대원들은 견물생심의 마음을 꾹 누르고 달러를 실은 트럭을 여자가 원하는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줬다. 여자는 해병대원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사시나무 떨듯 내내 불안해 했지만 결국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 가는 해병대원들을 향해 몇 번이고 땅에 엎드려 감사의 절을 했다.
전 소위는 얼마 후 월맹군 중위 부인을 생포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전소위는 소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후방으로 후송시켰다.
전 장군의 회고.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호이안 인근 시가지에 팬텀기를 이용한 공격이 감행된 후 우리 소대가 후속 출동했다. 가서 보니 보석가게들이 많이 파손돼 있었다. 곳곳에 보석들이 굴러 다녔다. 그러자 병사들이 서로 보석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의 심리상 충분히 이해는 됐지만 전투를 치르는 군인이 한 눈 팔면 절대 안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일부 병사는 부대귀환 후 몰래 숨겨 들어왔다. 나는 그걸 곧바로 회수해 모두 돌려줬다. 전장에서의 물욕은 곧 죽음을 자초하고 또 살아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처지에 욕심을 부린들 무엇하느냐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서 그런지 베트남전에서 우리 소대원은 전원 무사고를 기록했다. 항상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모두가 살아났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김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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