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부사관 글/하교90기 김종훈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 제1부 비내리는 경부선 야간열차

머린코341(mc341) 2015. 1. 27. 14:31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


이 말, 아니 이 구호는 내가 하교90기 하후생 시절 식사시간에 구대장이 "식사개시!!"하면 큰소리 높이 부르던 말이다.


신병237기로 입소하여 71. 5. 5 입대 선서 후 바로 며칠 지나 하후생으로 차출(말이 차출이지 강제) 되어 하교에서 병과교육 8주간을 제외하고 20주 기본훈련기간 중 소리 높여 부르던 이 구호는 정말로 수료 후 실무에서 복무하는 기간 중 나의 생각과 행동을 준거하는 말이기도 하였으며 전역 후 사회생활 적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최근 많은 선, 후배 님들이 해병대 현역시절의 체험담을 수필, 일기형식으로 글을 올리는 것을 보고 나도 어느 분 말 대로 더 늦기 전에 30여년 전의 흐릿한 옛 추억이 생각나는 지금의 시간을 놓치면 영영 기억이 상실될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자랑스런 해병하사 시절을 회상하여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글 순서는
①비 내리는 경부선 야간열차
②신병 훈련소
③하사관학교
④덕산 통신교육대
⑤임관 특별휴가
⑥3연대 1대대
⑦3연대 5대대
⑧신설 7연대 2대대
⑨전역
⑩아!! 해병대

두서없고 자료가 없어, 특히 기억이 나는 부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난 일들을 정확히 서술할 수 있을 지 겁도 나고 자신도 없지만 용기를 갖고 최대한 노력하여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오니 많은 이해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제1부 비 내리는 경부선 야간열차

1971년 4월27일 밤11시경으로 기억된다.

 

그날 오후 늦게 나의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조 부모님, 큰 고모님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부여에서 직행버스로 대전에 도착하여 목적교 부근의 식당에서 혼자서 쓸쓸히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었다.


열차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인근 극장의 마지막 프로를 감상하고 대전 역에 도착하여 진해로 가는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 따라 왜 그리 무정한 봄비는 오후부터 궂은비로 시작하여 허전한 마음을 더욱 울려주는 건지 야속하기가 그지없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우시던 할머님, 꼬깃꼬깃한 돈 몇 푼을 허리춤에서 꺼내 다시는 볼 수 없는 조카 손에 쥐어주고 몸 성히 잘 다녀오라고 눈물을 흘리시던 큰 고모님 생각에 젖어 있는 나를 자꾸만 가슴 아프게 하고 차창을 때리는 빗물은 그런 나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그때 큰 고모님은 간암 말기로 서울 원자력병원의 마지막 수술을 끝내고 상도동 우리 집에 머물며 통원치료를 하였는 데 치료기간 중 내가 후암동 사령부에서 해병대 지원입대 시험을 마치고 입소통지서를 받을 때까지 고모님의 통원치료를 돌보고 있었다

결국 큰 고모님은 그해 8월 운명하셨는데 그 소식을 접한 것은 하교 훈련 중 상남훈련을 끝내고 마산 벽암지 유격훈련 중 편지를 받고 알았으며 흐르는 눈물이 편지를 적시었다


내가 큰 고모님과 각별한 정을 갖은 것은 조 부모님이 1남 2여를 두셨는데 위로 두 분이 고모님이고 아버님이 독자이며 금광업에 종사하여 부모님이 어린 동생들과 객지생활을 하다보니 나와 형은 집에서 조 부모님, 고모님들로부터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조 부모님은 79년, 86년, 아버님은 01년에 돌아가셨으며 둘째 고모님만 생존하시며 큰 고모님의 산소는 그해 11월말 하사임관 특별휴가 시 그 분이 살아생전 좋아하시던 포도주를 영전에 바치고 뜨거운 눈물로 찾아보았다

내가 해병대에 지원하게 된 것은 69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를 재수학원 거리인 종로거리를 방황하고 70년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아버님의 사업인 금광업의 사양으로 71년 등록이 어려워 군복무를 빨리 마치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 하고싶어서였다.

후암동 사령부에서, 지금은 국방부 조달본부가 자리하고 있다하며, 입대시험은 71년 2월 중순이었는데 날씨도 매우 춥고 연병장에는 눈도 쌓여있었는데 달리기 팔굽혀펴기 적성검사 등 경쟁률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용산구 후암동 해병대 사령부 건물>

 

진해신병훈련소 입소통지서를 받고 어머님께 보여 드리니 어머니는 아무 말을 않고 쓸쓸히 뒤로 얼굴을 돌리셨다.


그 당시 해병대는 월남 (지금은 베트남이지만)에 파병하여 육군보다 위험지역에 투입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형 친구도 청룡부대로 참전하여 두 다리 절단이라는 큰 상처를 않고 귀국하였다.

형 친구이자 나의 해병선배가 우리 집을 찾아와 인사드릴 때 어머님이 형 친구를 끌어않고 크게 우시던 모습에서 아들의 안위도 걱정되고 경제사정이 어려워 등록을 못하고 위험하고 힘든 해병대에 입대한다하니 어머님의 마음이 오죽 괴로웠을까...


서울상도동에서 하직 인사를 드리고 조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떠나올 때 어머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몸 성히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하면서―

경부선야간열차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서울에서 먼저 탑승한 경인지역 입소장병, 대전에서 승차한 충청지역 병력 대구에서 또 한차례 경상도 입소장병들이 대거 탑승하니 열차 내는 시장바닥 같이 소란스럽고 그야말로 사투리 경연장 같았다

입소장병을 실은 열차가 삼랑진에 도착하여 모두가 진해행 열차로 환승하기 위하여 내렸다.
이때부터 해병헌병들이 나타나 입소장병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랑진 역에서 수많은 입소장병들에게 해병대의 이미지를 각인 시켰다.

오와 열을 맞추고 앉은 번호를 수없이 되풀이시키고 그 많은 병력의 승차차량을 지정 탑승시켜 길들이지 않은 예비 해병들을 서서히 훈련시켜 나갔다.


진해행 열차는 모두가 입소장병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때 237기는 입소인원이 1,200명을 훨씬 넘는 것으로 기억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 당시 월남전 참전에서 청룡부대의 희생이 제일 많아 지속적인 병력충원이 필요하여 많은 인원이 전국에서 입소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부산지역으로 출장 시 새마을 열차를 자주 이용하는데 삼랑진 역을 통과할 때마다 차창 너머로 71년 4월28일 새벽 역내에서 혼란스럽고 초조히 진해행 열차를 기다리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우리를 태운 열차는 삼랑진을 새벽에 출발하여 진영, 창원을 경유하여 당시 상남훈련연대 자리인 지금의 경남도청, 창원시청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차창 너머로 상남훈련대 뒷산인 불모산에 크게 새겨진 “무적해병”네 글자가 시야에 나타나 전 입소장병들을 압도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탑승한 해병헌병이 "무적!!해병!!" 구호를 선창하여 모두 소리 높여 따라하며 모두가 벌써 해병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은 무적해병 네 글자와 상남 훈련연대 자리는 볼 수가 없고 도청, 시청, 아파트 숲이 되어버렸으니 상전벽해(桑田壁海)라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것인가?

무적해병 구호가 계속되는 동안 열차는 71년 4월28일 이른 아침 마침내 우리의 종착역인 경화역에 도착하였다.


대전에서 시작된 열차이동이 끝나고 이제 정말 해병훈련소에 입소해야할 시간이 다 되었다.


경화 역에서 하차하여 훈련소 정문까지 이동하는 짧은 시간 중에도 열차 내에서 사귄 예비 동기들과 끼리끼리 몰려 아침 시장기를 달래고 해장 막걸리라도 한 잔 하자는 권유에 경화 역 주변의 술집들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으며 예비해병들에게 마지막 휴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해장국과 한 잔 술에 마지막 휴식을 끝낸 나와 예비 해병들은 서서히 훈련소 정문으로 향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행렬에 섞이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얼마를 가다보니 정문 앞 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우리를 받기는 사람은 위병소 근무 헌병들이었다.

이들의 통제하에 드디어 가슴 조이며 해병훈련소 정문을 통과하니
나의 36개월 해병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