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제2부 신병훈련소
정문을 통과하여 임시로 병력이 구분 편성되었는데 그것은 응시지역별로 구성되었다.
즉, 서울지역, 부산 대구지역, 광주 지역의 3개 지역으로 나누고 기타 인근지역병력은 3개 지역에 편입하여 가 입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중에는 진해통제부 해군병원의 최종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해병이 될 수 있는 선서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탈락하여 귀향조치를 당한 사람이 237기에서는 50 여명이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 가운데 나의 중학동창인 N도 포함되었는데 N은 훈련소에 입소하여 재회하였는데 그는 해병대 지원응시를 세 번했으나 불합격되어 네 번째만에 합격되어 이번에 진해까지 왔는데 귀향조치를 당했다며 매우 실망하고 있었다.
N를 비롯한 귀향대상자를 위로하고 없는 돈에서 조금씩 거두어 이들에게 차비를 보태준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 후 하사임관 특별휴가 시 고향인 부여의 N집을 찾았는데 그는 진해에서 돌아온 후 육군에 입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제부 해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통제부영내에는 마침 벚꽃축제가 끝나고 떨어진 꽃잎이 황량하고 어지럽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는데 우울한 나의 마음과 너무 조화를 이루었다
가 입소기간 중 예비해병으로 힘든 훈련이 시작되었다.
첫 기합은 원산폭격 이었으며, 암기 과목 중에서는 지금은 없어진 "해병의 맹세"가 있었다.
해병의 맹세는 그 내용이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해병의 자긍심, 전우애, 애국심, 국민에게 사랑 받는 해병 상 정립과 그 당시 해병대에 대한 국민들의 편견을 해소하는 내용 즉, 과도한 음주금지, 무임승차 금지, 부녀자 희롱금지 등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정하여 이를 숙지하고 행동을 구속하였다.
나에게 제일 힘든 것은 처음 몇 일간의 식사시간이었다.
훈련소 식당의 음식 적응이 않되어 계속되는 설사로 나는 무척 고생하였다.
설사는 그치지 않고 심지어 이동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것을 안 구대장이 소화제를 주고 환자열외를 시켜주어 바로 회복이 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이 나면 자상하고 고마웠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구대장 얼굴이 생각난다.
<신병들의 식사시간>
지금은 없어진 진해 신병훈련소는 항상 2개 기수가 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기간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은 식사, 취침과 화장실 이용시간이었다.
그런데 화장실이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2개 기수가 공동으로 사용하니 선임기수를 화장실에서 조우하면 그야말로 고양이 앞에 쥐였다.
어느 날 저녁자유시간에 화장실에서 어느 236기선임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인 김원준 이었다.
그 는 나의 손을 굳게 잡고 배고프지 하면서 PX빵을 주고 힘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PX이용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 빵 하나는 배고픈 신병에게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그 후 종종 화장실에서 만나 그 는 나에게 따뜻한 격려와 먹을 것을 같이 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얼마 후 그는 상남훈련대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났는데 그것이 나와 그와의 마지막 재회이었다.
그것은 서울 현병대에서 근무하던 나의 동창생 236기 김원준이 72년 한남동 공관근무 시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는 소식을 3연대 근무 중 알게 되었다.
꽃다운 나이에 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김원준은 헌칠한 키에 명랑하고 하얀 이빨의 웃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훈련소에서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인 237기 동기인 박영규와 재회하였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브라스 밴드부에서 색스폰 연주를 한 경력으로 군악대원으로 입소하여 나 와 같이 포항사단에서 전역할 때까지 근무를 하였으며 현재는 공구류 사업을 성공리에 영위하고 있다
입대식과 동시에 나의 군번이 나왔다. 9375XXX 237기에서 매우 빠른 선임 군번이었으며 첫 번째 해병군번 이었다.
왜냐하면 두 번째 군번은 하사 임관을 하면서 받은 하사관 군번이 있기 때문이다.
<신병훈련소 순검>
신병 가 입소기간 7일을 끝내고 237기는 71년 5월 5일 입대식을 거행하였다.
본격적인 신병훈련이 막 시작되던 날 저녁식사 후 석별과업 중 갑자기 237기 전원이 집합되었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 당시 훈련소장, 주임 상사를 포함한 간부진들이 대거 단기하사관 차출에 대하여 설명이 있었다.
순간 연병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시 해병하사는 전역이 어려웠으며 월남파병에서 분대장들의 많은 희생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60년대 말 김포 여단에서 발생한 G 하사사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상황은 전역 원을 여러 번 제출하였으나, 전역을 못한 G 하사가 부대에서 총기 시위를 벌여 큰 문제를 일으킨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선뜻 지원할 의사가 없어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해병하사관으로서 숙명적인 운명을 타고나서인지 나를 포함한 90여명은 말이 차출이지 강제로 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인지 당시 훈련소장의 훈시에서 귀관들의 단기하사 복무기간은 일반 병들과 똑 같다는 말로 우리를 안심시키고 설득하였다.
237기 동기생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나의 하교90기 고난의 하후생 생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신병훈련을 감내하기도 힘든데 7개월의 하후생 훈련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 보다도 전역은 정말 병들과 같이 되는 건가?'
하교90기 동기생들의 공통된 생각과 근심 특히, 전역에 대한 걱정은 포항사단에서 근무하는 동안 내내 이어지다가 하교80기 즉,227기와 같이 입소하여 단기하사 첫 기수로 차출된 선임들의 전역명령이 하달된 73년 6월에야 해소되었다.
1. 명령에 복종하며 모든 규율을 충실히 지킨다
2. 언제나 전투에 앞장서며 결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3. 교육훈련을 즐거이 받으며 총기 오발로 인명을 상해하지 않는다
4. 급여와 단량을 정확히 지급받아 아끼고 값있게 사용한다
5. 뜨거운 전우애로 단결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여 모든 고난을 이기고 책임을 완수한다
6. 복장을 단정히 하며 야비한 말을 쓰지않는다
7. 남의 돈이나 물건을 탐내지 않으며 빌려쓴 것은 바로 돌려준다
8. 웃어른을 존경하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며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9. 도박 행위나 지나친 음주 난폭한 언행은 스스로 금하며 건전한 오락을 즐긴다
10. 승차승선할 때는 무임승차를 하지 않으며 노약자게게는 자리를 양보한다
11. 공동생활에서는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키며 출입금지 구역에는 가지않는다
12. 남을 헐뜯지않으며 어떠한 파벌도 만들지않는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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