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6) 디엔반 군청의 결사대
낮에는 한가 밤이면 사투를 벌려야 했던 방어전.
우리는 사수 아니면 죽음이라는 선택의 길 밖에는 없었다. 1분대장과 함께.
적들은 구정을 가운데 둔 3일간의 휴전약속을 위반하고 모든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 뒤 계속 그 여세를 몰아 좌충우돌 아군의 약점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기습을 감행했다.
월남의 젖줄인 1번 국도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 우리 청룡부대가 있는 꽝남 성의 모든 군청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하여 디엔반 군청을 제외한 전 군청을 전부 장악하다 시피 했다.
물론 디엔반 군청도 일시적으로나마 월맹군 일개 중대로부터 기습을 당해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 동안은 잠시 그들의 세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월맹정규군들이 그 곳에 더 머무르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바로 인접 해 버티고 있는 우리 포병 6중대 때문일 것으로 생각 되었다.
그리고 원래 군청마다 경비를 하고 있던 월남 정규군과 민병대들은 대부분 구정휴가를 떠났던 터라 불시에 들어 닥친 적들의 공격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 군청마다의 사정이기도 했다.
때마침 디엔반 군청의 미 고문단실에 포병연락장교로 나와 있던 내 동기생 최 중위는 캄캄한 밤중에 육박전을 거듭하다 운 좋게도 월남군 보안대 병사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비밀 통로를 따라 급히 피할 수 있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휴가를 가지 못했던 월남 정규군과 민병대 대원 그리고 업무 연락으로 파견되어 있던 6명의 미 해병대 대원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전원 전사를 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구정공세의 여파는 벌써 한달이 지난 지금도 회복이 되지 못한 채 1번 국도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실정이라 우리 해병대 청룡부대가 필요로 한 탄약과 군수물자도 하는 수 없이 미 해병대의 헬리콥터나 수송기에서 떨어뜨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다낭항구로부터 월남의 젖줄인 1번 국도를 통해 불과 30여분이면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의 디엔반 군청은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그리고 이 곳은 그 주위에서도 가장 큰 군청 소재지일 뿐 아니라 이곳에서 좌회전을 해야만 538번 도로로 진입을 해 우리 청룡부대가 있는 곳은 물론 호이안 시로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그 중요성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이전처럼 아군들이 1번 국도를 되찾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정보에 의하면 오히려 꽝남성 내의 모든 군청 중 유일하게 디엔반 군청만 완전한 점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기의 공격 목표는 바로 디엔반 군청이 될 것이라는 소문만 난무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결국 청룡부대 본부는 디엔반 군청을 사수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증원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고 마침내 그 임무는 내가 맡고 있는 27중대 1소대의 2개분대가 맡기로 낙착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매일 같이 낮이면 수색 작전에 투입 되었고 밤이면 3일에 한번씩 소대 병력을 이끌고 적진 가까이에 매복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사투를 벌리는 한이 있더라도 디엔반 군청에 나가 우선 사람 사는 구경이라도 하고 낮 시간만큼은 자유스러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된 것으로 여겼다.
디엔반 군청의 북쪽 외곽은 2.5m 정도 높이의 제방이 동서쪽으로 120m 정도의 길이로 펼쳐저 있었고 그 앞에는 7m정도 너비의 해자가 둑을 따라 있은 다음 그 너머에는 몇 그루의 나무들과 몇 채의 집들만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집들의 앞은 바로 538번 도로가 우리들이 있는 군청의 외곽 제방과 평행을 달리듯 역시 동서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실은 적들이 우리를 근거리에서 공격을 한 후 뒤로 몰러나기가 더 없이 용이해 보였다.
나는 만약 그와 유사한 전투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차후의 추격 공격은 적들이 다소 긴 개활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포를 유도해 퍼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걱정은 우리가 배치되어 있는 군청의 외곽 문제 보다는 바로 우리 뒤의 내곽 문제였다.
왜냐하면 제방 위에 참호를 파고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는 우리 후방 약 50m 뒤의 평지에는 군청 내곽을 쉽게 들어 올 수 없도록 철조망이 겹겹으로 쳐져 있었는데 그 것을 따라 줄을 지어 있는 참호 속에는 월남의 민병대가 배치되어 항상 우리 뒤를 바라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져 적들과 백병전이라도 붙었다 치면 우리는 위치상 조금이라도 후퇴를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고 또 혹시라도 전투 중 민병대가 지레 겁을 먹고 미리 자신들의 전방을 향해 총을 난사하게 된다면 역시 우리는 민병대로부터도 뒤통수를 얻어맞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자칫 잘못 했다간 전후방으로부터 공격을 함께 당할 수가 있어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결국 적이 대대적인 공격을 해 올 경우 모두가 방어선에서 산화할 수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분대장들을 통해 병사들에게 누누이 후퇴는 없다는 말을 강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20여명의 대원들 역시 하나 같은 마음으로 이에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첫째 날 내가 대원들의 배치를 모두 끝내고 있을 무렵 해병학교의 내 동기생이며 군청의 고문단실에 배속 된 포병연락 장교 최 중위가 포타블 전축과 한국의 대중가요가 실린 LP판을 몇 장 가지고 나를 찾아주었다.
이럴 때의 동기생이란 형제보다 더 반가운 존재일 뿐 아니라 더욱이 우리는 임관 후 처음 만났기 때문에 더욱 서로를 반겼다.
“구 중위, 너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나?”
“응, 그러고 보니 딱 한달하고 며칠이 지났네.”
“응. 이곳에 오면 한 달 되었을 때가 제일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지”
나는 이 친구가 마치 내 마음 속을 헤집어 본 것처럼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일부러 크게 맞장구를 치지는 않았다.
“난 한달 전에 이미 내 제삿날이 지났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육박전을 할 때 이미 죽었던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마침 그 와중에서도 월남 보안대 대원들이 급히 따라오라고 해 자기들이 몰래 파 놓은 비밀 통로로 들어 가 겨우 살았던 거야”
“장가도 안간 놈이 무슨 제사는 제사야. 너나 나나 죽으면 똑 같이 몽다리 귀신이 되고 마는 거지...”
우리는 내 말에 함께 깔깔거리고는 화제를 바꾸어 가며 한 낮의 뜨거움을 잊어 갔다.
최 중위가 가지고 온 포타블 전축에서는 정훈희가 부르는 ‘안개’가 가슴 깊숙이 젖어 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이 세상에서 정훈희가 제일 훌륭한 가수로 느껴졌고 노래로는 안개라는 노래 이상 심금을 울리는 노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밤이 지난 이른 새벽, 우리는 적들이 우리를 향해 쏘는 총소리에 한동안 응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로의 사격이 잠시 멎자 나는 또 다음에는 적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까? 하고 매우 긴장된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산발적인 공세로 끝을 낼 것인가? 아니면 이러다 주력부대가 쳐들어 올 것인가? 실로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새벽에 동이 트는 것은 마치 구세주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야간에 매복을 나가서도 그러했고 야간 전투를 했을 때도 항상 그랬다.
다행이 첫날밤을 무사히 보낸 우리는 그 후에도 밤이면 밤마다 오늘이 바로 적들이 총 공격을 하는 디데이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그리고 죽음으로 이 자리를 지켜야지 하는 각오를 항상 번갈아 가며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총격전의 밤을 결코 피할 수는 없었다.
6.25 사변 때도 참전을 했던 선임하사관 방 중사 그리고 칼날 같은 1분대장 추 하사와 차분히 자기 임무에만 충실한 2분대장 홍 하사는 대원들을 지휘하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는 사람들이라 서로가 믿고 의지하는 데 아무른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모두가 무사히 밤을 지세우고 안도의 한숨 속에서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 병기를 다시 챙기고 낮잠을 미리 자두는 일 외는 모두가 별로 할 일이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돌아가는 정황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 매일처럼 우리 연락장교 최 중위와 군청의 월남군 작전 장교 뚜이 땀을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우리 포병 6중대를 잠시 기웃거려 동기생을 만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인원 세 명으로 군청에 파견을 나와 있는 헌병 파견대를 방문해 파견 대장인 최 상사와 잠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모기약을 얻어 오기도 하고 식사를 혼자 제공 받기도 했다.
특히 최 상사는 내가 비록 지금은 말단 소총 소대를 지휘하는 보병 소대장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는 한 헌병대 수사과장으로 원대복귀를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한번은 어떤 보병 중대가 지난밤에 나도 모르게 군청에 붙어 있다 시피 한 포병 6중대를 방어하기 위해 야영을 했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을 얼른 먹은 후 혹시라도 아는 장교가 있는가 싶기도 한데다 거의 같은 바운다리에서 밤새 방어를 하면서 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는지 따지고 싶기도 해 매우 빠른 걸음으로 포병 6중대로 찾아 가 보았다.
내가 소대장을 두 명이나 만났는데도 모두가 모르는 후배들이라 별로 할 말도 없는데다 병력들이 막 이동을 하려는 참이라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 서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진해 하사관학교에서 구 대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 삼오 중사를 만나 그나마 잠시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 되었다.
“교육과 실전을 함께 비교 해 보니 그래 어떻소?”
강한 인상을 주는 김 중사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지으며
“역시 훈련을 받을 때 땀을 많이 흘려야 피를 적게 흘린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하고는 끝내 웃음을 껄껄 웃어 보였다.
디엔반 군청의 고문단실에는 아오자이를 입고 늘 상 출근하는 월남 처녀가 둘이나 있었다.
키가 약간 작게 보이는 흰 아오자이의 처녀는 여느 월남의 처녀들과는 달리 뽀얀 피부를 가져 마치 불란서 튀기 같은 느낌을 주었고 검은 아오자이 같은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처녀는 키가 늘씬한데다 역시 서양적인 얼굴 모습을 갖추어 누가 보아도 한 눈에 딱 들어오는 미인이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으레 웃음을 띠우며 목례로 인사를 했고 정열이 넘치는 20대 후반의 나는 그 짜릿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나는 결국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는 그 늘씬한 차우라는 아가씨와 며칠 사이 마음이 통했고 그도 그 후로는 시간이 나면 자주 내 벙커에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벙커는 제방 아래 맨땅에다 모래자루를 쌓아 조그만 출입문만을 하나 낸 직육면체의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겨우 기어 들어가 잠자리만 할 수 있을 정도였고 더욱이 낮에는 마치 한증막 같아 들어가기 조차 힘 드는 곳이었다.
차우가 나를 찾아 올 때면 내 전령은 으레 빈 씨레이션의 박스를 접어 벙커 앞 땅바닥에 앉으라고 깔아 놓곤 했다.
그러나 그늘도 없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야만 했던 우리는 볕이 뜨거워 별로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내가 학생 시절 읽었던 폴란드 작가의 “벽”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그 내용은 젊은 두 남녀가 바깥의 어떤 공지에서 서로 포옹을 하며 자신들의 뜨거운 애정을 가려줄 어떤 공간조차도 없다는 사실로 당시의 절망과 좌절뿐이었던 폴란드의 공산사회를 고발한 소설이었다.
물론 처지야 다르지마는 불꽃보다 더 뜨거운 열정의 나이에 나와 차우는 더 이상 서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한 없이 서로 안타까워했던 것 또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디엔반 군청으로 이동을 한지 열흘 쯤 지나자 드디어 1번 국도가 뚫렸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1번 국도에서 좌회전을 하여 538번 도로를 타고 청룡부대로 들어가는 미 해병대 포탄 수송 차량들이 줄을 지어 우리 진지 앞으로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가 제방에 올라 가 미 해병대 대원들과 서로 고함을 치며 손을 흔들었고 마치 모두가 해방이나 된 듯한 기분을 느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은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핑”도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거의 매일이다 시피 밤이면 피아간에 총격전을 했고 어둠이 깔리면 항상 적의 대대적인 공격에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해야만 했던 시간들과 또 날이 밝으면 하룻밤을 무사히 보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던 나날들도 이제는 멀리 물러날 것만 같은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중대장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다낭지역 미 해병대의 협조 요청이라는 말로 시작을 한 명령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임무였다.
내일 아침부터는 미리 도로정찰을 끝낸 후에라야 아군의 모든 차량들이 1번 국도를 통행 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내가 직접 1개 분대 정도의 병력을 인솔 해 다낭에서 출발하는 미 해병대 정찰조와 디엔반에서 합류를 한 다음 계속 남진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 우리 2대대 본부로 향하는 초입의 지점까지 먼저 정찰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전 도로 정찰이라니? 간밤에 적들이 묻은 지뢰나 부비트랩도 있을 수 있고 아군들의 차량이 전연 못 다니는 시각이라 적의 매복 기습도 있을 수 있는데 그래 고작 아홉 명을 데리고 마치 실험실의 모리모토처럼 먼저 길을 다녀 보라는 말이지?” 나는 차마 불평을 할 수는 없었으나 긴장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1개 분대 중 분대장을 포함하여 9명을 차출하고 다낭에서 출발한 미 해병대 대원들과 합류를 하여 도로 정찰에 나섰다.
원래 해병대는 육군의 1개 분대 9명과는 달리 분대장 포함 13명이었으나 내가 중대 본부를 떠날 때 명령에 따라 2개 분대만을 인솔 해 나왔고 또 1개 분대의 인원을 분대장 포함 10명씩만 차출해 왔기 때문에 실은 말이 좋아 결사대지 디엔반 군청에 나와 있는 총인원은 소대 선임 하사관과 나까지 모두 합쳐봐야 22명에 불과 했다.
그런데다 또 여기서 1개 분대를 교대로 매일 차출을 해 정찰을 나가자니 10명 중 1명은 자기 분대의 진지를 지켜야 하는 처지라 결국 9명의 분대 인원을 내가 직접 지휘해 미 해병대의 도로 순찰에 합류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미 해병대 지엠씨 트럭 세대에는 각기 운전병을 제외한 2명씩의 미 해병대 대원들이 운전석 뒤편 화물칸에서 모두 바깥으로 총을 겨누며 타고 있었고 나는 우리의 합류 지점에서부터 우리 병력을 실은 후 도로 정찰의 총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다.
총지휘를 하게 된 나는 가운데 차량에 위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맨 앞의 차량에 승차를 했다.
대신 미 해병대 선임자에게는 두 번째 차량을 타도록 지시하고 마침내 출발을 하게 하자 육중한 지엠씨 트럭은 시속 10km 정도의 속력으로 엉금엉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무리하게 선두 차를 탔던 것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내가 즉사를 하지 않는 한 즉각 상황에 대처하는 명령을 우리말과 영어로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두 차의 미 해병대 대원들도 바로 영어로 나와 의사소통을 해 후미에 있는 대원들에게 즉시 대처하게 할 수가 있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인원을 인솔 해 미 해병대와의 합류 지점을 가기 위해 군청을 빠져 나갈 때도 매일 정문과 후문을 번갈아 가며 이용을 했고 도로 정찰을 마치고 들어 올 때도 역시 출입문을 바꾸어가며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 미 해병대 트럭을 탈 때나 내릴 때도 그 장소를 일정하게 정하지는 않았다.
즉 하루는 100m정도 북쪽으로 하루는 100m정도 남쪽으로 늘 상 변동을 하도록 지시를 해 혹시라도 사전에 계획적으로 노리고 있을 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정찰을 하면서도 혹시나 저 숲 속에 있는 적들의 집중 사격이나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련제 로켓의 세례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과 불시에 트럭이 지뢰나 부비트렙을 잘못 건드려 가루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 시 잠시 해 보기도 했던 위험천만한 우리의 임무는 5일 만에 무사히 끝이 났다.
결국 우리는 중대 본부로부터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디엔반 군청으로부터 거의 2주일 만에야 27중대의 진지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처음 죽음의 결전을 각오하고 떠났던 디엔반 군청의 결사대 임무도 예상과는 달리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되돌아 올 수 있었고 모든 전황도 차츰 아군들에게 유리해져 이제는 1번 국도도, 디엔반 군청도 마치 평화를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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