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8) 어느 소대장의 죽음
메드백 환자 수송 헬리콥터
1968년 1월말에 있었던 적들의 구정공세가 한달이 조금 더 지나자 그 기세가 한풀 꺾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여세를 몰아 한층 작전을 강화해 우리지역의 적들을 완전소탕 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추라이지역에서 호이안지역으로 이동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현지의 사정에 어두워 그런지 청룡(여단)본부의 작전부서나 대대본부의 작전부서에서는 항상 수색지점을 너무 무리하게 많이 잡아 우리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대들이 건성으로 수색을 하고 지나가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사실 동굴의 입구를 발견하면 우리가 사과탄이라고 부르는 마치 둥근 사과모양의 최루탄을 그 속에 집어넣고 터뜨린 후 “라이! 라이!(나와)”라는 말을 하고는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을 경우 수류탄으로 동굴 입구를 폭파 시켜야 하는 데도 우리는 당초부터 수류탄만 두어 개 집어넣어 터뜨리고는 그만 그것으로 끝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최루탄을 터뜨리게 되면 시간도 많이 지체 될뿐더러 그 더운 날씨에 방독면도 써야하고 또 방독면을 쓰게 되면 누가 누군지 분간이 힘들어 지휘도 잘 되지 않았다.
또 가스가 상의 칼라에 묻으면 움직일 때마다 항상 땀에 젖어있는 목이 쓰리고 따가워 하루 종일 참아야 하는 것도 신경에 매우 거슬렸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최루탄을 사용하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이날따라 설상가상으로 중대 수색작전의 목표지점들이 너무 많았던 데다 위험이 많이 따르는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첨병 소대가 되었던 우리 소대로써는 매우 신경을 곤두세워 뒤 따라 오는 중대본부와 다른 2개 소대를 선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동 중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적들로부터 두어 번의 총격을 선두에서 받았지만 우리 첨병 소대는 그 때마다 즉시 제압을 했기 때문에 수색 목표지점을 다 돌고도 거의 시간에 맞추어 본대로 귀대를 할 수 있었고 또 아무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 말이 없던 중대장도 보통 때와는 다르게 나를 보고 수고 했다는 말로 위로를 해주어 나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작전을 나갔다 돌아오거나 매복을 나갔다 돌아오면 항상 병력들은 소대별로 집합을 한 뒤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총기검사부터 한다.
소대장의 “총기 검사!”라는 말과 함께 대원들은 모두 탄창을 뺀 뒤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오른 손으로 총구를 하늘로 향해 높이 쳐든 채 잠시 기다렸다가는 연이어 “격발!”하는 다음 명령과 함께 방아쇠를 당긴다.
“차작” 하는 금속음이 거의 동시에 울리고 모두 빈총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바로 대원들은 마치 합창을 하듯 “이상 무”라는 말을 함께 외친 후 다시 구령에 따라 세워총을 한다.
그리고 총기 검사가 끝나면 가끔은 중대장이 노고를 치하하는 말을 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소대장의 짧은 위로의 말이나 당부사항을 끝내고 나면 임무는 일단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가장 귀찮게 생각하고 걱정스러워 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부터의 일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예상되는 적의 야간 기동로에 숨어 들어 가 진을 치고 있다가 가끔은 일전을 해야 하는 야간매복 작전이었다.
물론 3개 소대가 1개 소대씩 차례로 3일에 한번씩 번갈아가며 나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드물게는 분대 매복도 나가야 하는 경우가 더러는 있었다.
더욱이 이날처럼 주간작전을 끝낸 후 다시 소대매복을 나가려고 할 때는 대충 한낮에 절어 있는 땀도 씻어야 하고 저녁도 빨리 먹어야하는 것은 물론 매복을 나가기 위한 무기들도 다시 챙겨야 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소대가 분주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대장님, 오늘 매복은 우리소대 차롄데요”
내 방탄조끼를 받아 들면서 전령이 말을 건넸다.
“알고 있어, 분대장들에게 밥 먹고 나갈 준비나 빨리 하라고 해”
“오늘따라 너무 어려운 지역을 갔다 왔는데 하필이면 우리 차례라니?”
나는 “오늘은 좀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꿀떡 같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 또 새롭게 결심이 달라지는 것이 군인이었다.
저녁을 끝내기가 바쁘게 중대장실 앞 넓은 곳에 소대원들을 모두 집합 시켰다는 선임 분대장의 보고를 받고 그곳으로 가 대원들 앞에 선 나는 왠지 오늘따라 너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선임분대장이 대원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치는데도 몇 몇 녀석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야, 조용히 못해!”
배웅을 나온 소대 선임하사관이 내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대원들을 향해 다시 한 번 고함을 쳤다.
잠시 조용한 듯하다가 후미쯤에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가 진지도 오래 되고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대원들은 누가 누군지 뚜렷이 보이지도 않았다.
“이 개새끼들,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왜 출발하기도 전에 싸우고 야단들이 야! 지금 소풍 가는 거야?”
드디어 격한 감정의 표현이 내 입으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한번 감정에 불이 붙으면 끄기가 힘든 것이 내 성격이라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스스로 주체하기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야, 이 새끼들아! 여기서 나한테 맞아 죽는 것이 적한테 죽는 것보다 나아, 왜 하필이면 매복을 나가는데 재수 없게 싸우고들 야단이야 응?”
나는 여태껏 없었던 일이 잠시 벌어진 것에 대해 왠지 이상하고 불안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선임하사관!”
“네”
“여기 몽둥이 하나 빨리 가져와요”
선임하사관은 내 기세에 합세를 한 듯 어디론지 얼른 몽둥이를 찾으러 간다고 없어졌다.
“모두 무장 풀어 이 새끼들아! 그리고 분대장은 열외..”
평소 성깔을 아는 대원들인지라 죽일 듯 악을 쓰는 나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원들은 모두 무장을 풀고 그제 서야 숨소리마저 낮추어 가며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양팔 간격으로 좌우로 나란히!”
대원들은 손을 들었다 놓은 기준병을 중심으로 모두 양팔 간격을 벌리며 다시 열을 맞추었다.
“맨 우측 열부터 일 열로 한 명씩 내 앞으로 나와!”
나는 선임하사관이 구해온 나무 몽둥이를 들고 매 맞는 자세로 엉덩이를 약간 빼고 양팔을 앞으로 한채 차례로 내 앞으로 닥아 온 대원들의 엉덩이를 향해 모두 세 대씩을 후려쳤다.
진지에 남아 있을 10여명이 넘는 대원들을 빼고도 매복 작전에 나갈 대원들이 30여명이나 되는지라 대원 모두를 혼자 상대하고 나니 땀이 옷에 흠뻑 베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쓸데없이 입을 여는 놈이 있으면 각오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쥐 죽은 듯 조용한 대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잠시 출발보고를 하기 위해 중대장이 있는 벙커로 들어갔다.
“출발 준비 끝”
경례를 하는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본 중대장은 의자에 앉은 채 답례를 하면서
“응, 조심해 갔다 와”
하는 짧은 말을 하고는 잠시 무슨 말을 더 하려는지 머뭇거리는 것 같았으나 나는 아직도 흥분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얼른 돌아서 나와 버렸다.
(나중에 간접적으로 들은 얘기지만 중대장은 낮에 작전이 너무 고되었고 특히 내가 첨병소대장을 했기 때문에 낮에 중대를 지키고 있었던 포소대장인 장 중위를 내 대신 1소대를 지휘해 매복을 나가도록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일찍 준비를 하고 들어 와 중대장에게 보고를 하는 통에 그만 마음을 바꾸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중대에는 포소대장이라는 직책은 없으며 다만 하사관이 반장을 하는 포반이 있지만 소대장을 마친 장교가 귀국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을 경우 부득이 쉬게 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포반을 맡도록 함과 동시에 우리는 그 직책의 장교를 포소대장이라 편의상 불렀던 것이다)
야간매복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진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통의 물이 꽉 채워지지 않아 기동을 할 때 출렁이는 소리가 들려도 안 되고 야전삽이 꽉 조여 있지 않아 철걱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안 되는 법이었다.
내가 대원들에게 기합을 준 것도 혹시라도 진입 시 집중력을 잃고 대원들의 정신이 해이해질까 싶어서였다.
전해들은 얘기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은 한국군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특히 야간 기동 시에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실제로도 야간 매복 시 가장 위험한 것은 사실상 진입을 할 때와 매복 후 철수를 할 때였다.
만약 우리가 진입을 하고 있을 때 적들이 미리 길목을 지켰다가 기습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캄캄한 밤중 지형지물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대처 방법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 철수 할 때는 살금살금 뒤를 따라와 조준 사격을 하고는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당하고 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무사히 진입을 한 뒤 막상 각자가 개인호를 파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용감히 싸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이었다.
저녁 일곱 시가 꽤 지난 시각이었다.
우리는 한참 소리를 죽여 가며 얼마 남지 않은 목표지점을 향해 살금살금 진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이 그렇게도 멀지 않은 곳에서 주위를 밝게 비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탄의 방향으로 보아 처음부터 바로 우리 27중대가 있는 곳과 거의 비슷한 지점이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곧 헬리콥터 소리가 뒤이어 들리는 것으로 보고서야 우리는 십중팔구 우리중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소리를 내어 물어 볼 수가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과연 우리 중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에 줄 곧 여러 가지 상상만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포병대대의 위치가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와 그렇게 멀지 않은데도 우리 27중대를 향해 아무른 포 사격을 해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의 어떤 큰 기습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가 있었고 중대 본부로부터도 병력을 철수 하라는 별다른 지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중대본부의 당직병으로부터는 수시로
“브라보! 브라보! 여기는 찰리, 이상 없으면 두 번을 불어라 오버”
라는 보통 때와 같은 목소리로 우리의 이상 유무를 가끔씩 물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필시 적의 산발적 총격에 부상자가 생겼거나 중대 내의 어떤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았다.
내 옆에 위치한 통신병은 중대본부로부터 우리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확인 교신을 할 때마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 말 대신 “이상이 없으면 두 번을 불어라 오버”라는 지시에 따라 입에다 송신기를 바싹대고는 “후~ 후~” 하고 두 번씩 바람을 불어 아무 이상이 없다는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내일 새벽 매복을 철수 할 때까지 중대본부에서 지시하는 말을 무전기를 통해 들을 수는 있어도 교전이 없는 한 소리를 내어 말을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답답함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날 밤 매복을 하는 동안 피아간의 교전은 없었다.
날이 약간 밝아 올 즈음 나는 통신병에게 어제 저녁 중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라는 지시를 했다.
잠시 후 통신병이 자신도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며
“장 중위님이 돌아 가셨답니다.”라고 보고를 해 나는 언 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매복은 우리가 나왔는데 중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장 중위가 죽어?”
“아마 어제 저녁 대대본부에서 테스트 파이어(화력 시험사격)를 할 때 그 유탄에 맞았다는 것 같습니다.”
통신병의 목소리가 매우 낮은 반면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말도 안돼. 대대본부에서 27중대가 어딘데 그러고 미리 대대에서 테스트 파이어 한다는 연락도 안했단 말이야?”
화난 내 목소리에 통신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야, 통신기 이리 내!”
갑자기 가빠지는 숨을 참으며 내가 직접 중대본부의 통신병에게 물어 보아 도 자기가 직접 상황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더 이상은 모르겠다는 식의 대답만 해 나는 결국 중대로 귀대를 한 후 자세한 내막을 더 알아보기로 했다.
더욱이 장 중위는 내 동기생이며 채 두 달도 안 있으면 귀국을 하게 될 차례가 되지 않았던가?
간밤에 적과의 아무런 상황은 없었지만 항상 매복이 끝나는 새벽녘이면 밤새 맞은 이슬에 옷이 눅눅해져 피곤함을 느끼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기에 물려가며 거의 뜬 눈으로 지새야 했던 탓에 몸도 마음도 모두가 기진한 상태지만 언제나 밝아 오는 새벽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오늘은 맨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분대에서 2명을 차출해 소대가 매복하던 장소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낙오를 잠시 시켜 놓을 계략이었다.
적들은 우리가 안도감에 들떠 철수를 할 때면 우리의 후미에 살짝 따라 붙어 가끔 총질을 가하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대가 천천히 움직여 맨 마지막 분대의 꼬리가 매복을 했던 장소로부터 150m쯤 왔을 때였다. 우리 소대원이 쏜 유탄이 터지는 소리와 M-16을 연발로 사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가 하면 순간 철수하던 마지막 분대가 급히 뒤돌아 공격 태세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남겨둔 두 대원이 예상했던 대로 우리 뒤를 밟던 두 명의 적을 발견하고 즉시 유타발사기와 소총으로 먼저 쏘았는데도 그들은 잽싸게 숲 속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의 사격이나 추격은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대열을 지휘해 숲 속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중대 진지의 정문이 가까워지면 5고지의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고 모두가 사구로 된 모래땅이라 발이 빠져 걷기가 약간은 힘이 들게 된다.
경사진 정문을 들어서니 먼저 피 묻은 압박붕대들이 긴 꼬리를 하며 이리 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약간 더 떨어진 언덕바지에는 흰 머리카락이 가득한 중대 선임하사관 조상사가 혼자 우뚝 서서 우리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조상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에게 경례를 다른 때보다 더 정중하게 한 후
“장 중위님이 어제 저녁 돌아 가셨습니다.”하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답례를 하자마자
“얘긴 들었소, 근데 이게 뭐야? 얘들 불러 붕대를 좀 치워야지!”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린 내 감정을 내 스스로 억제하기가 힘이 들었다.
조상사의 명령에 따라 주위에서 얼른 모인 대원들이 주섬주섬 모으고 있는 피 묻은 압박붕대들을 나는 힐끗 쳐다보며 잠시 장 중위의 얼굴을 떠 올린 후 계속 대원들을 인솔하고 중대장의 벙커 앞으로 갔다.
항상 그렇듯이 대원들로 하여금 총기 검사를 마치게 한 다음 나는 귀대 보고를 하기 위해 중대장의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없어 꼭 해야 할 말도 잘 안하는 통에 대대본부로부터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많은 중대장이라 이번에도 장 중위가 어제 저녁 대대에서 쏜 유탄에 죽었다는 짤막한 얘기 외는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나도 지금은 물어 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깥으로 나와 즉시 대원들을 해산 시킨 후 내 벙커로 돌아 왔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다른 소대장들이나 현장에 직접 있었던 대원들로부터 그 내용들을 직접 듣게 되었고 그 결과 나름대로 충분히 상황을 정리 해 볼 수가 있었다.
어제 저녁 7시 20분은 대대본부에서 전 대원이 외곽 경계선에 붙어 외부의 가상 적을 향해 소화기들을 집중해 시사를 해보는 테스트 파이어의 시간이었다.
물론 대대본부에서 27중대로 미리 연락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대대본부에서는 바깥이 너무 깜깜해지기 시작하자 약속 시간인 7시 20분을 10분 앞당겨 7시 10분에 임의대로 사격을 시작해 버렸던 것이 가장 큰 분제가 되었고 다음으로는 대대본부에서 느끼는 27중대의 위치가 전면에서 보면 40도 정도의 급경사에다 숲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완전히 산 하나를 넘어야 27중대의 진지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 이로 인한 안이한 생각이 더욱 화를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27중대 2소대에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지 않고 드문드문한 고지의 낮은 편으로 대대본부를 자세히 내려다보면 직선거리로 200여 미터의 거리에 대대본부의 외곽 벙커가 보여 실제로는 서로가 별로 멀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도 이러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고 또 중앙 부분은 아까 말한 동쪽 부분의 고지가 낮은 일부와는 달리 40도 정도의 급경사로 사구로 된 산이 막고 있는데다 숲이 우거져 아무리 전방을 향해 총을 쏜다 하더라도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27중대에 총알이 넘어 가리라고는 역시 아무도 판단을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당일 임의로 10분을 앞당긴 대대본부에서는 마음 놓고 발사 명령을 내렸고 발사 된 총알들은 사구로 형성 된 산의 모래를 튕기며 굴절 되거나 아니면 나무를 스친 후 많은 유탄을 만들어 27중대로 넘어가게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는 것도 원인이지만 물속으로 총을 쏘면 총알이 굴절 되며 튕겨져 다시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같은 속성으로 5대대에서 쏜 총알들이 모래를 맞고 튕겨져 27중대가 있는 5고지의 일부 지역으로 충분히 넘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예측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장 중위는 마침 그 때 바깥으로 나와 자기 벙커에 몸을 기대고 유탄이 날라 오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고국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이윽고 총 소리에 주위가 소란하다는 것을 느낀 장 중위는 얼른 피하지 못하고 총소리가 나는 자신의 등 뒤쪽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바로 그때 그만 힘없이 날라 온 유탄에 관자노리 부근을 맞았고 총알처럼 힘 있게 치고 나가지 못한 유탄은 순간 장 중위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결국 그는 그 아까운 청춘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처음에는 소대장 모두가 모여 예정 시간을 일방적으로 통보도 없이 10분을 앞당긴 대대본부의 작전부서 장교들에 대해 그 책임을 강력히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폈으나 솔직히 내가 매복을 나가기 전 내 자신부터도 우리 중대장이나 중대본부 누구로부터도 오늘 저녁 테스트 파이어가 있을 것이라는 전달을 받지 못 했던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사고는 결국 우리 중대본부의 직무태만과 대대작전부서의 협조 부재 및 오판으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들은 한 걸음 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병대 장교 글 > 해간35기 구문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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