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5) - 정전과 불안한 평화

머린코341(mc341) 2015. 2. 8. 20:13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5) - 정전과 불안한 평화

 

정전협상

 

1·4 후퇴 이후 총반격에 나선 유엔군과 국군이 현재의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 다시 북진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공산 측은 휴전을 제안했다.

전쟁 발발 1주년 전날인 1951년 6월 24일 유엔 주재 소련대표 야콥 말리크가 한국전쟁 휴전을 제안했다는 뉴스가 온 세계에 타전됐다. 중공은 다음날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휴전선이 생기면 장래에 또 전쟁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휴전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뜻과는 아랑곳없이 정전회담은 급속도로 추진됐다. 유엔군 측은 정전회담 장소로 원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을 제안했다. 공산 측은 개성에서 열자고 응수했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소식이 외신을 인용한 신문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그 활자들은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일처럼 보였다. 그 무렵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에 이양돼 국방부와 군 수뇌부에서도 아무런 정보가 없어 정전회담을 피부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훗날 기록을 보고 안 일이지만 첫 정전회담은 7월 10일 개성에서 열렸다. 그때 개성은 적지였는데, 유엔군 측이 왜 그것을 수락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측 대표단이 무장하지 않은 차량이라는 표시로 차에 흰 깃발을 달고 개성에 들어간 것을 공산 측이 백기투항이라고 선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회담이 중단됐고, 유엔군 측은 판문점을 새 회담장소로 제안했다. 수세에 몰린 공산 측이 마지못해 이를 수용, 10월 25일부터 회담이 속개됐다.

 

나는 서부전선 방어작전에 종사하면서 도라산 155고지 OP에서 개성과 판문점을 오가는 우리 측 대표단 차량 행렬을 볼 때마다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휴전을 반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의 뜻을 외면한 ‘정치적인 휴전’은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싸움을 건 공산 측은 전세가 기울어지자 휴전을 제의했고, 남의 나라 전쟁에 지친 유엔군 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한 셈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언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젊음이 이름 모를 산야에 피를 뿌리고 원혼이 됐단 말인가. 그 많은 파괴와, 파멸과, 강요된 이별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가.

 

휴전선은 제2의 38선이다. 이대로 선이 고착되면 동족 간의 상잔과 대립이 이어질 뿐 통일의 기회는 멀어지고 만다.

 

이대통령이 아니라도 새로운 38선의 탄생을 원하는 한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휴전반대 데모가 일어나고, 북진통일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당연한 국민 감정이었다.

정전회담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11월 말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접촉선으로 한다는 데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립국감시위원회에 소련을 포함시킬 것인가 여부와 포로교환 문제는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유엔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귀환지를 선택하는 자유송환 원칙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 측은 제네바협정 조항을 근거로 일괄교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공산 포로 가운데 북한이나 중공으로의 귀환을 원하지 않는 이른바 반공포로가 많았기 때문이다.

 

포로교환

 

당시 유엔군이 제시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 명부는 13만2474명이었다. 이 가운데 송환을 희망하는 사람은 7만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송환을 거부했다.

인민군 포로 가운데 반공포로들과 남한 각지에서 끌려간 의용군 포로들은 절대로 북한에 가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중공군 포로들도 대부분 대만으로 가기를 희망했고, 중공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5000명에 불과했다.

1953년 3월 소련 수상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정전회담 타결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공산 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회담 시작 2년, 한국전쟁 발발 3년이 넘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타결됐다. 간단 없이 천지를 뒤흔들던 포성과 총성이 멎자 전선은 무서운 정적으로 감싸였다.

긴장 속에 조심스러운 휴식이 허용되고 귀향과 휴가라는 말이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로교환 장소로 지정된 판문점 경비를 맡은 해병대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판문점 주변과 민통선 남측 경계임무 말고도 포로교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판문점 출입 안전을 지켜줘야 할 임무가 부여됐다.

이뿐만 아니라 포로교환 인수팀에도 해병대 요원들이 차출됐다.

 

미 해병대에서 파견된 40명으로는 북에서 돌아오는 국군포로 인수업무가 원만하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 해병대에서는 사령부 정보참모부 조남철 소령·전정남 중위·정인해 중위 등 장교 3명과 부사관 10여 명, 수십 명의 해병이 포로 인수업무에 참여했다.

포로 인수는 8월 5일에 시작됐다. 적에게 붙잡혔던 전우들을 데리러 간다는 사명감으로 들떴던 해병대 인수요원들은 첫 대면부터 국군포로들의 모습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했기에 저 모양이란 말인가!

 

공산 측이 넘겨준 포로명부를 받아 미리 통보된 명부와 대조한 뒤 인계된 50명의 포로 점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진동하는 악취의 근원이 포로들의 붕대 속이라는 걸 알고부터 인수요원들은 적개심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붕대로 감춘 상처들이 썩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붕대를 감지 않은 사람들은 원기가 없어 보였다.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기쁨으로 눈빛은 빛났지만 어깨가 축 늘어진 사람이 많았다. 속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탓이라 했다. 미 해병 인수팀도 측은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무렵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포로는 하루 한국군 250명, 유엔군 150명 정도였다. 명단에 이름이 실렸다가 삭제당해 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인수반은 이름이 삭제된 이유를 추궁했지만 북측은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귀환용사들에 따르면 태극기를 숨겨가지고 있거나 <애국가>를 부른 사람은 차에서 끌려 내렸다.

북을 험담하다가 끌려 내린 사람도 있었다. 동료들은 그들이 “즉석에서 처형됐거나 아니면 만주나 시베리아로 유형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군 포로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기쁨을 표하며 자유의 문을 넘어 왔다. 인수요원이 이름을 부르면 “예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소련 지프에서 내려 달려왔다.

그런데 한 병사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미 해병 인수요원이 달려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억류생활 중 극도의 공포심에 짓눌려 있었다고 한다. 석방 당일에는 수용소 감시병이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겁을 준 모양이었다.

그는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자유의 문으로 넘어오는 순간에야 두 뺨에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귀환용사들은 파주군 문산읍에 마련된 해방촌(한국군)과 자유촌(유엔군)에 수용됐다. 환자들에게 급한 치료를 해 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과 이발을 시켰다.

며칠간의 해방촌 생활로 그들은 원기를 되찾았다. 자유란 그렇게도 신묘한 약인가보다. 다리를 질질 끌던 사람들도 걸음걸이가 가벼워졌다. 기차 편으로 서울로 가는 연도에서 환영인파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비로소 살아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