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7) - 교육단 시절, 상륙전 교육과 훈련

머린코341(mc341) 2015. 2. 14. 03:25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7) - 교육단 시절, 상륙전 교육과 훈련

 

군인으로서 나는 두 가지를 자랑으로 여긴다.


하나는 적의 남침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는 일선에서 전투 경험을 가진 행운이고, 또 하나는 본격적인 상륙전 교육과 훈련 실무자로서 우리 해병대에 한국형 상륙작전 교리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나를 믿고 아우처럼 이끌어 주었던 신현준·김성은 두 선배의 배려 때문이었다.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나는 진해 해병대교육단으로 전속됐다. 단장으로 있던 김선배가 부른 것이었다. 해병대사령부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병대 교육기관 콴티코(Quantico) 상륙전학교 주니어 스쿨에 유학 보낼 최초의 요원으로 나를 지목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수석고문관으로 있던 에드워드 포니(E·Forney) 대령을 통해 유학생 선발 방침이 통보돼 있었다. 포니 대령은 상부에서 한국 해병대 요원들에게 체계적으로 상륙전 교육 계획을 통보해 왔음을 알리고 적임자 선발을 요청한 것이었다.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빨리 출국수속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장대길·조봉식 대위와 함께 엉겁결에 준비를 마치고, 한국을 떠난 것이 8월 하순이었다. 대위와 소령급을 상대로 하는 주니어 스쿨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 해병대가 개발한 신개념 상륙전 교리를 배웠다.

 

훈련참관과 도상연습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유익한 경험이었다.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실시된 비석(飛石)작전(Island hopping campaigns)은 엘리스 소령이 개발한 새로운 전법이었다. 소위 개구리 뜀 전법이라는 이 작전개념은 적의 배후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함으로써 건너 뛴 지역을 손쉽게 점령하자는 이론에 따른 것이다.

내가 한국 최초로 상륙전 교범을 편찬한 일도 유학에서 습득한 미 해병대의 최신 교리가 바탕이 되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해병대 교육단에 근무할 때 김성은 대령이 준장으로 승진해 교육단장으로 왔다. 나는 평소 하고 싶었던 일에 착수했다. 김 단장에게 건의하여 우리 해병대 최초로 상륙전 교육 및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해병대에서는 포병, 탱크, 공병 등은 육군에 위탁교육을 시켰고 해병 신병훈련소에서는 상륙훈련만 담당했는데, 이를 위해 교육단 산하에 상륙작전처라는 부서가 신설되었다. 교수부 문관들을 시켜 미 상륙전 교범을 번역케 하여 본격적으로 상륙전 교육을 시작했다.

 

나는 교육단 부단장 겸 교수부장과 상륙작전처장을 겸직했다, 조봉식 대위와 장대길 대위가 본인을 보좌하여 상륙작전 교육을 맡았다. 상륙전 교육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교육도 포함되었다. 미군과 연합작전을 하려면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 같은 것도 배워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당시 우리나라 수준은 수세식 화장실 모형을 만들어 놓고 물 내리는 법, 휴지 사용법까지 가르쳐야 할 정도였다.

 

나는 미 해병들이 야전에서 작전 중 용변을 본 뒤에 반드시 야전삽으로 땅을 파고 묻어 버리는 모습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우리 병사들에게도 이 교육을 시켰다.

 

하사관과 장교들에게는 탑재교육도 실시했다. 탑재교육은 해병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각종 장비와 무기들을 함선에 실어 이동 중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는 일은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해병대 교육단에서는 1954년 3월과 9월에 하사관학교와 야전위생학교를 창설했고 11월에 상륙전학교를 발족시켰다. 교관으로는 나와 해사 동기이고 미국 상륙전학교에 유학한 이맹기 해군 중령(후에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왔다.

 

나는 그에 관한 많은 기억을 갖고 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해병대로 전과하겠다."라고 했지만 나는 만류했다.

 

"당신 같은 인재가 해병대로 오면 쌍수로 환영하겠지만 당신은 해군참모총장감이니 해군참모총장이 되어 해병대를 잘 도와 달라."

 

나의 예측대로 그는 해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해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나도 해사 출신 첫 해병대사령관이 되어 초창기 해군과 해병대 발전에 헌신화게 되었다.

 

내가 1952년 2월경 콴티코 주니어 스쿨 교육을 받고 돌아와 한국 실정에 맞는 한국 해병대의 자주적인 작전교리를 개발해 훈련에 적용시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7개월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교육 실무에 종사하다 57년도에는 중령과 대령급을 상대로 하는 미 해병참모대학 9개월 과정에 유학가게 됐다. 두 차례의 교육을 통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지만, 해병대 신병훈련에 팀워크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과 김성은 단장 덕분에 해병대 교육단은 전술 작전 개발뿐 아니라 훌륭한 교육시설과 뛰어난 복지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상륙전 모형 사판장

상륙작전처장으로서 내가 처음 시작한 것은 상륙전 모형 사판장(Sand table)이었다. 상륙전 훈련을 시작하면서 사병들과 하사관, 장교들에게 상륙전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 주기 위한 시설로 모의 상륙전 사판장을 만들었다. 이것은 나중에 민간인 방문객들에게도 공개된 교육단의 명물이었다.

 

전동 기계식으로 작동하여 상륙작전 5단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상륙전 사판실

 

사판장 중앙에는 모형 바다를 만들고 상륙전에 동원되는 모형 선박들이 포진되었다. 먼바다에는 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모형, 다음은 16인치 포로 사단을 지원하는 전함 한 척과 8인치 포로 무장한 연대 지원 순양한 두세척, 그리고 해안 가까이에 대대를 지원하는 구축함 아홉 척 등이 늘어서 있고 상륙전이 실시되는 해병과 내륙에는 진지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미 해병 상륙전학교에 있는 모형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상륙전을 관람할 수 있도록 양쪽으로 계단식 좌석을 만들었다. 규모는 200~300평으로 길이 20미터, 폭 30미터 정도의 대형 사판 모형이었다. 소등이 되면 진행 교관은 마이크로 시나리오를 읽으며 상륙작전 과정을 설명한다.

 

"오늘은 몇 년 몇 월 며칠, 날씨는 맑고 (중략) 항공부대 폭격과 군함의 포격이 개시된다. 물자 수송선은 공격함대 뒤에 전개되어 있고 소형 상륙주정이 진수되면 하선망으로 대원들이 내린다."

 

이 사나리오에 따라 적진지에 근접 지원기들이 폭격을 한 후 LVT, LCVP등이 횡렬로 파도처럼 진격하여 올라가면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되어 관람객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이렇게 웅장한 음향과 함께 진행되는 입체적 상륙작전을 보고 민간인들은 더욱 해병대에 매료되었다.

 

특히 진해 육군대학 교육생(고급지휘관)들을 초청하고 관람케 하여 육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우리 해병대가 반드시 필요한 특수전략부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팀워크 위해 샤워장과 '王'자 식당 운영

 

내가 1차 유학 당시 목격한 바로는, 미 해병대에서는 신병훈련에 팀워크(Teamwork)를 유달리 강조한다. 강인한 체력단련과 정신훈련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자기 희생과 상호 의존과 인내심을 통한 협동심이 없으면, 그 힘은 분산돼 쓸모없는 힘이 되고 만다는 것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훈련시간 사이 휴식시간에 70여 명의 훈련병이 5개의 화장실만을 사용토록 제한하는 식이다. 짧은 시간에 70명이 골고루 용변을 보려면 번개같이 일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좀 불편하더라도 뒷사람을 위해 ‘급한 불’만 끄는 훈련을 쌓아 생리로 굳어지게 하는 것이 이 교육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 원리를 목욕실에 적용해 큰 효과를 봤다. 1953년 재편성된 해병대교육단 교수부장 겸 신설 상륙작전처 초대 처장으로 일할 때였다. 신병훈련소에 1개 중대원 약 3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목욕실을 만들어 자동 샤워시설을 설치했다.

 

하루에 액 3천여 명이 사용하는 초대형 샤워장이었는데 전쟁 후 대형 목욕탕 건설은 우리나라 어려운 경제 여건상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다. 천장에 배관한 수도 파이프에서 동시에 물줄기가 분사되도록 하고, 목욕시간을 2분으로 제한했다.

처음에는 난리였다. 머리에 비누칠을 한 채 헹구지도 못하고 나오는 훈련병이 많았다. 동작이 뜬 사람은 몸에 물을 묻혀 보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내무반으로 돌아갈 수밖에. 2분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1분을 더 줬다.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남에 대한 배려와 인내심은 그렇게 길러지는 것이다.

 

또 약 3천여 명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동양 최대의 '王'자형 신병훈련소 식당도 해병들이 자랑하는 명물이었다.

 

한국형 상륙작전의 알파와 오메가

 

정전협정 후 해군과 해병대에서 설정한 최대의 정책목표는 해병대의 주임무인 상륙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배양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해병대에서는 1954년 하반기에 BLT(대대상륙단)훈련을 실시할 준비를 갖추는 한편 상륙전의 교리연구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내가 진해 해병대 교육단의 교수부장 겸 상륙작전처의 처장일 때 주도적으로 실시하였다. 상륙훈련은 한 번 훈련하려면 미 해병 고문단과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 해병부대(제3상륙군)의 많은 협조와 지원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최초 상륙전 훈련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마침내 1954년 10월 거제도에서 첫 번째 BLT 훈련을 실시했다. 그 훈련에 참가했던 상륙군부대는 제1연대 1대대였다.

 

이어 1955년 초에 거제도에서 2연대 2대대가 참가한 제2차 BLT 훈련을, 8월에는 3연대 3대대가 참가한 제3차 BLT 훈련을 실시했으며, 1956년 말까지는 나머지 모든 보병대대의 BLT훈련을 마쳤다. 다음 1958년 후반기인 10월에는 여단 규모의 상륙전 훈련(명칭 폭풍)을 실시했는데 참가한 부대는 제1임시여단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1954년 10월 거제도에서 실시한 한국 해병대 최초의 대대상륙단(BLT) 상륙훈련.

고문관 포니 대령 뒤에 필자. 당시 중령이던 나는 유학에서 돌아와 이 훈련을 계획하고 주관했다.

 

한편 정정 후 금촌 지구에 있던 해병사단은 1959년 3월 12일 포항기지로 이동함에 따라 그해 봄(4. 19~5. 3)에 한·미 해병대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발하여 함안 이동을 한 후에 경북 양포리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상륙 여단훈련인 '거북이'를 실시하였다.

 

나는 이 훈련 당시에 상륙군사령관(CLF)으로서 한·미 연합 여단장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드디어 그해 10월에는 해병대 제1상륙사단이 참가한 최초의 사단급 상륙작전인 '쌍용'을 포항 양포리와 월포리 해안 일대에서 실시함으로써 상륙전 훈련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수립하게 되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