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9) - 초대 3연대장 시절, 적에게 배우라
정전협정 이후 해병대는 크게 증편됐다. 전투단이 상륙사단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연대도 넷으로 늘었다.
나는 그때 창설된 제3연대 초대 연대장으로 임명돼 미 해병7연대가 맡고 있던 김포반도를 작전구역으로 넘겨받았다.
경계근무를 강화하고 교육훈련에도 박차를 가했지만 전쟁 때보다는 느긋한 생활이었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김포반도 건너편 개성과 연백지구를 바라볼 때마다 중공군과 피 터지게 싸우던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중공군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대개 인해전술과 연관돼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1년 4개월 동안 그들과 대치했던 우리 해병대의 생각은 다르다. 특히 중공군을 높이 평가하는 고 신현준·김성은 두 선배에게서 늘 “적에게도 배울 것은 배우라”라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달리 보아 왔다.
‘인민은 바다, 군인은 물고기’
“중공군은 물고기고 인민은 물이라고 했어. 군인은 인민이라는 바다가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중공군 지휘관들은 입버릇처럼 강조하기 때문에 그들의 군기가 그렇게 엄정한 거야.”
나는 두 분에게서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김성은 선배는 광복 후 중공군에게 잡혀갔을 때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얼빈 농대 출신인 김 선배는 광복 후 고국에 돌아오다 중공군 검문에 걸렸다. 일본과 한편인 만주국 주민이었으니 큰일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거칠게 다룰 줄 알았는데 뜻밖에 너무 부드러운 거야. 신문하는 태도가 너무 신사적이어서 놀랐어.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미안하게 됐다면서 가고 싶은 데로 가라는 거야!”
김 선배는 그렇게 석방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실제로 중공군에게 잡혔다가 탈출해 온 병사들도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인민군에 비해 그들은 신사적이었다.
김 선배는 고국에 돌아와 중공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에 비해 무기와 탄약이 월등히 우세했던 국민당 군대가 백전백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국민당 군대가 인민에게 군림한 데 비해 중공군은 민심을 얻은 때문이었다.
중공군은 민간인 동네에 들어가면 방에서 자지 말고 헛간에서 자도록 가르친다. 자고 나면 반드시 청소를 해 주어라, 먹은 것은 반드시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차용증(국채)을 써 주어라, 물건을 빌릴 때도 채권을 발행하라, 무엇이건 거저 가져가지 말라, 리어커를 끄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밀어 주어라….
서부전선을 지키는 3연대장 재직 시 김대식 사단장, 신현준 사령관과 함께
두 선배의 가르침을 이행해 크게 덕을 본 일이 있다. 영월·정선지구 전투 때 인민군 23유격여단 60여 명을 생포했을 때다. 그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치료하는 데 드는 물자가 아깝고 귀찮았던 부대원들이 그들을 처치하려고 했다. 그 낌새를 채고 나는 절대 죽이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화천지구 전투 때도 중공군 포로 2명을 붙잡아 잘 대해 주었다.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들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중공군 포로 둘은 “오늘밤 춘계 대공세가 시작될 계획이니 잘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 말대로 연대본부에 보고해 대응태세를 갖춘 덕에 중공군 춘계 대공세를 격퇴할 수 있었다.
만일 포로들을 학대했다면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공세 계획을 까맣게 몰라 앉아서 당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적에게는 사자같이, 국민에게는 양같이 대하라” 던 가르침도 어제 일처럼 귓가에 맴돈다.
국민의 군대 해병대, 대민봉사활동
3연대장(전투단장)이 된 나는 신현준·김성은 두 선배의 가르침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손쉬운 것부터 찾아보았다. 주민들에게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미 해병7연대에게서 이양받은 단정과 주정(LCVP), 소형 초계정, 공기부양정 같은 장비를 활용하기로 했다. 당시 김포와 강화 사이에는 교량이 없어 모든 주민이 상륙주정 같은 해병대 함선을 이용해야 했다.
김포~강화 간은 승객이 많아 드물 게라도 도선이 있었지만, 강화도와 석모도·교동도 같은 부속 도서 사이에는 아무런 교통편이 없어 주민들 생활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볼음도 같은 작은 섬에는 한참 후에도 정기 여객선이 없었다. 그런 곳에 응급환자가 생기면 많은 돈을 들여 어선을 빌려 타고 뭍으로 나오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다.
3전투단장 시절 염하강 앞에서.
당시 김포와 강화도는 연륙교가 없어 도강을 우리 해병이 지원했다.
우리 부대 주정들은 주민들에게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요긴하게 이용됐다. 한 번은 다급한 상황에 빠진 산모를 구하기 위해 미 1군단에 헬기를 요청해 인천까지 수송해준 일도 있었다. 배를 타고 섬을 찾아다니며 상비약을 나눠 주기도 했다.
불에 탄 김포 양곡중 교사 신축
3전투단장 시절에는 학교를 지어 준 일도 있다. 1955년 가을로 기억된다.
전쟁 때 교사(校舍)가 불타 없어진 김포 양곡중학교 학생들이 민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부하는 것을 보고 우선 분대 천막 4개를 쳐 주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비로소 한곳에 모여 수업을 하게 됐지만 언제까지고 천막교실에서 공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듬해 봄 우리 공병대에 교사 신축을 지시했다.
우선 부대 창고에 있는 건축자재를 쓰도록 하고, 미 1군단에 자재지원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착공 5개월 만에 그럴듯한 교사가 완공돼 1956년 10월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했다. 지역 주민과 유지들, 교육 관료들, 한미 해병대 관계자들과 함께 번듯한 교사를 둘러보면서 기뻐하는 학생들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
나라의 재정이 너무 가난해 불탄 교사를 제때 지어주지 못하던 시대였다.대학 출신 장교들의 도움을 얻어 문맹퇴치와 계몽교육에도 힘썼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대민활동에 지장이 많았던 시대다. 그런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치고 세상일에 대한 상식을 심어주는 일은 곧 주민들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두는 것이 첩보활동이나 불순분자 색출 등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실감했다. 신현준·김성은 두 선배의 ‘물과 물고기’ 이론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애기봉과 제적봉
우리 부대의 관측소인 애기봉은 155마일 휴전선 가운데 적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런 곳에서 주민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 애기봉은 처음에는 제적봉(制赤峰)이라 불렸다.
나는 붉은 오랑캐 군대를 제압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이 관측소 이름을 제적봉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이 봉우리에 깃든 애절한 사연 때문에 훗날 애기봉(愛妓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왼쪽 애기봉. 오른쪽 강화도 최북단의 758 OP를 1966년 6월 27일 제적봉이라 명명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가 사랑하는 기생첩을 데리고 피란을 가다 이곳에서 오랑캐에게 붙잡혀 갔다. 기생은 연인을 그리다 여기서 병을 얻어 비명에 죽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한참 뒤 해병대사령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이 얘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병문 여단장이 부대를 방문한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공사령관. 제적봉을 애기봉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어떻소? 내 생각엔 훨씬 낭만적일 것 같은데.”
대통령을 수행했던 내가 동의하자, 박대통령은 즉석에서 지필묵을 청해 ‘애기봉’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애기봉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다.
제적봉 명명식. 애초 필자가 제3전투단장 시절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지금의 애기봉 지역을 제적봉으로 정했으나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 지역의 애기(愛妓)의 전설을 기리는 의미로 애기봉ㅇ로 명며함에 따라 필자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철산리에 새로운 제적봉을 정하고 제적봉 명명식을 거행했다. 당시 여단장은 이병문 준장이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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