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61) - 5.16과 해병1여단장

머린코341(mc341) 2015. 2. 16. 12:13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61) - 5.16과 해병1여단장

 

피를 말린 사흘

 

고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혁명에 해병대가 가담하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해병대가 그 일에 연루된 것은 예비역 출신 장성 한 사람의 역할 때문이었다.

해병대사령관도 모르는 사이 그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깊숙이 얽혀 들어간 것도 전쟁에서 맺어진 사사로운 인연 때문이었다. 역사란 때로는 이렇게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인가.

1961년 5월 16일 당시 나는 국방대학원 재학생 신분이었다. 1960년 6월 해병대 보급정비단장(준장) 직책을 마치고 국방대학원에 입교했으니 졸업이 얼마 안 남은 때였다. 그날 아침 일찍 등교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얼마 전 예편한 해병대 김동하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공 장군. 나야, 김동하. 여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실인데, 박정희 장군(소장)이 기다리고 있어. 지금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바로 육군본부로 떠났다.

“공 장군. 잘 왔습니다. 지금 바로 김포 해병여단장으로 부임해 주세요.”

작전참모부장실에 있던 박 소장은 반갑게 내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 선배도 옆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는 왜 해병대 인사발령을 육군소장과 예비역 해병대 선배가 내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 망설였다. 김 선배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 우선 부임부터 서둘러 달라고 재촉했다.

나는 방을 나서면서 해병대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었다. 거취에 관해 김성은 사령관 하교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국방대학원으로 갔다. 동료들과 의논을 하고 싶었다. 모두가 부임을 찬성했다. 사령관과 통화가 되는 대로 추인받을 생각으로 김포로 갔다.

김포 해병여단장실에 당도하니 주한 미 해군사령관 프레시 제독(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 장군 어서 오시오. 지금 미1군단장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그가 헬기를 보내 왔으니 어서 가 보시오.”

헬기장에는 미1군단장 라이언 중장의 전용헬기가 와 있었다.

“나는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작전 지휘권을 위임받아 서부전선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오. 내 허락 없이 주저항선에서 무단이탈한 해병여단 병력을 즉각 원대복귀시키시오.”

의정부 미1군단장 사무실에 당도하자, 라이언 장군은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문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퉁명스레 내뱉듯 명령부터 내렸다.

“부대 상황을 파악한 뒤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부대 상황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이동 중 부관에게서 박장군 거사에 해병대가 출동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부대 병력이 얼마나 동원됐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시 여단본부로 돌아오자 프레시 제독은 그때까지 같은 자리에 있다가 “라이언 장군이 뭐라더냐”고 물었다. 내가 들은 대로 답변하자, 그는 똑같은 주문을 했다. 빨리 쿠데타에 가담한 해병대 요원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부대에 남아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군은 평시에도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프레시 제독은 한국 해군과 해병대 지휘 책임을 지고 있었다.

 

김포여단을 방문한 5·16혁명의 2인자, 김동하 장군을 안내하는 필자


연금 상태였던 김성은 사령관

나는 평생 그때처럼 곤혹스러운 일을 당해본 일이 없다. 민주선거로 구성된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한 행위는 반란이다. 아무리 해병대 선배라지만 반란군에 가담한 사람과 그 수괴의 지시로 지휘관이 된 것이 옳은 일이냐 하는 자책에 시달렸다. 만일 거사가 실패하면 나도 반란군이 되고 만다. 옛날 기준으로 보면 3족을 멸할 역적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 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군은 원대복귀를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진퇴유곡(進退維谷),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이리라. 나는 어떻게든 김성은 사령관 하교를 받으려고 애썼다. 라이언 군단장에게 불려갔다 돌아온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박 장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초조한 음성으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 사실대로 말했다.

“공 장군, 라이언 장군 명령에 따르면 안 돼요. 그러면 혁명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공 장군을 여단장으로 보낸 것 아닙니까.”

박 장군은 절대로 해병대 병력을 철수시켜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더욱 스트레스를 느꼈다.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반란군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 김 사령관과 통화가 됐다. 간단한 안부와 인사말 끝에 거취를 물었다.

“공 장군은 그냥 거기 있어.”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제야 좀 마음이 편해졌다. 여단장 발령을 받은 셈이었다. 피 마르는 3일이 지나고, 5월 18일이 됐다. 펄쩍 뛸 듯이 반가운 뉴스가 날아들었다. 도망쳤던 장면 총리와 이름뿐인 윤보선 대통령, 그리고 매그루더 주한 유엔군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박 장군의 거사가 성공한 것이다.

뒤에 김 사령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토록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사실상 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해병대사령관뿐만 아니라 해군과 공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5월 16일 아침 군사혁명위원회(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김 사령관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성호 해군참모총장, 장성환 공군참모총장 이렇게 네 사람을 육군본부로 불러 혁명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날 아침 9시 박 장군은 직접 장총장에게 혁명지지 성명 발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장 총장은 “박 장군. 없었던 일로 해둘 테니 지금 즉시 병력을 원대복귀시키시오”라며 완강하게 혁명지지를 거부 했다. 하지만 그 시각에 KBS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던 혁명위원회는 장 총장 명의로 된 혁명공약을 발표해 버렸다.

박 장군은 해·공군참모총장과 김 사령관에게도 군사혁명 지지성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육군총장이 지지를 거부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 말로 혁명지지 선언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까지 육군본부에 붙잡혀 있었던 김 사령관은 오후 2시쯤 사령부로 돌아가려다 혁명위원회 대변인 원충연 대령에게 행동을 제지당했다. 원 대령에게 떼밀려 복도 끝 어느 부속실에 연금된 것이다.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사령관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뒤에 반혁명 음모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원 대령의 옥중 회고록에 따르면, 해병대가 혁명에 가담했는데 사령관이 혁명지지를 거부한 데 분격한 일부 혁명세력이 김 사령관을 제거하려고 주차장에 저격병을 잠복시켰었다는 것이다. 원 대령은 “해병대 최고책임자가 제거되면 일이 더 꼬이게 된다고 과격파들을 설득해 암살기도를 저지시켰다”고 회고록에 썼다.


불꽃 튀는 긴장의 순간

김성은 사령관은 그날 오후 늦게 집무실에 출근했다. 주한 미 해군사령관 프레시 제독이 찾아왔다.

“김 사령관님. 포항의 해병대1사단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에 가담한 해병대원들을 김포로 되돌아가게 할 수 없겠소?”

“마린(Marins)으로 마린을 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아시오? 나는 자신이 없소.”

김 사령관은 혁명지지도 거부했지만, 부하들로 부하들을 치라는 요청은 더 단호하게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혁명군을 도운 셈이 돼 김 사령관은 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훗날 국방부장관으로 영전돼 최장수 장관 재임 기록을 세웠다.

5·16에 해병대가 가담하게 된 경위는 예비역 해병대 소장 김동하 선배의 역할 때문이었다.

 

해병대1사단장이던 그는 김대식 사령관에 대한 항명 혐의로 옷을 벗고 박 장군과 군사혁명을 모의했다. 두 사람은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1956년 김 선배가 해병1사단 부사단장(준장), 박 장군이 6군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부터 모의를 시작했다 한다. 그 후 같은 군관학교 동기생 이주일·윤태환 장군 등이 가세해 거사를 모의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혁명세력 제2인자였던 김 선배는 자신을 잘 따르는 김윤근 김포 해병1여단장을 거사에 끌어들였다. 김포여단 제1대대(대대장 오정근 중령) 병력이 거사에 동원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거사 참여와 동시에 김 여단장은 혁명위원회 최고위원 겸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돼 여단장 자리가 비게 됐다. 그 자리에 내가 간 것이다.

나는 6·25전쟁 때 도솔산 전투 등 여러 작전에서 김 선배를 직속상관으로 모셨다. 나와는 호흡도 잘 맞았고, 배짱도 맞아 서로 믿고 따르는 사이였다. 그래서 불안한 가운데서도 여단장 부임을 수락한 것이고, 피를 말리는 3일 동안에도 그런 관계를 의식해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5·16 가담을 둘러싸고 해병대 안에는 불꽃 튀는 긴장의 순간이 있었다. 거사 전전 날인 5월 14일은 토요일이어서 많은 장병이 외출·외박을 나갔다. 제2연대장 박승도 대령은 여단 참모장 박성철 대령과 함께 외출을 나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귀대해 이상한 낌새를 챘다.

일요일인데 김 여단장이 부대에 나왔고, 제2훈련단(서울) 참모장 정세웅 중령도 전투복 차림으로 와 있었다. 연대본부 앞 광장에는 트럭 10여 대가 출동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강화도로 건너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여단장이 장면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까지도 박 대령은 그런 일을 꿈도 꾸지 못했다. 술집에서 돌아와 여단장이 “내일 새벽 혁명군이 장면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면서 가담하겠느냐고 물었다. 박 참모장은 가담한 것 같았다. “김성은 사령관과 이한림 1군단장도 가담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응답을 받고, 박대 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박 대령이 불응하면 즉석에서 처치하려고, 정 중령은 권총집에 손을 대고 답을 기다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김포 해병여단은 여단장 이하 참모장·연대장 등 수뇌부가 모두 가담한 셈이 됐다.

“16일 새벽 3시를 기해 여단 전차부대를 서울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남겨 놓고, 여단장 일행은 부대를 떠났다.

 

박 연대장은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혁명군이 부패정권을 타도했다”는 라디오 방송이 나와 안심했다고 한다. 나 말고도 같은 심정으로 속을 태운 사람이 여럿 있었던 셈이다.

 

혁명 후 밝은 표정으로 다시 김포여단을 방문한 김성은 사령관

 

염하상륙작전

 

문서로 된 정식 인사발령도 없이 부임했던 김포 제1여단장 시절 잊을 수 없는 일은 북한에 우리의 위력을 과시한 염하 상륙작전이었다. 5·16 두 달 뒤인 1961년 7월 최고회의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한강 하구 루트로 무장 게릴라를 다수 침투시키던 북한에 경고성 시위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훈련 장소는 북한 개풍군과 연백군 일대에서 잘 관측되는 염하로 정했다. 강화도에서 한강 하구를 건너가 김포반도 문수산 기슭에 숨은 적을 섬멸하는 훈련이었다. 아직 강화도 연육교가 없던 시절이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최고위원단, 라이언 미 육군1군단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 등이 임석했다. 미 1군단 헬기와 미 공군 근접항공지원 전투기들이 하늘을 날고, 바다와 뭍에서 해병용사들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연대급 상륙작전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준 것은 아직도 통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단장 생활 1년여 만인 1962년 7월 31일 나는 해병1사단장으로 승진했다. 정든 김포를 떠나 포항으로 부임하기 전날 송별파티에서의 과음으로 나는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여단장 취임 때도 식을 갖지 못했으니 내 운명에 그렇게 적혀 있었나보다.

 

염하상륙훈련


요강파티

당시 김포여단에는 떠나는 사람에게 ‘요강파티’를 열어 주는 전통이 있었다. 요강파티란 문자 그대로 요강에 온갖 술을 쏟아 부어 만든 ‘핵 폭탄주’다. 그걸 다 마셔야 하는 것이다. 미군 고문관들과 여단 참모, 예하 부대 지휘관 등 주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위스키·포도주·맥주·소주 등등 각자 취향대로 마시던 술을 꽃 요강에 가득 쏟아 부었다. 그걸 다 마시지 못하면 새로운 임지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신 사기요강에 이임자의 이름을 써 넣어 여단장실에 진열해 놓는 것이 전통이었다. 전통의 유래는 어느 미군 수석고문관이 취해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 타는 목을 축이려고 방안에 있던 요강을 마신 일이라던가.

 

여단 참모 및 예하 부대 지휘관, 미 고문관 등 술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각종 술을 꽃요강에 쏟아부어 폭탄주를 만들었다. 가운데 필자와 요강을 들고 있는 고문관 가긴 소령


그 시절 나는 술깨나 마신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술로는 지고 싶지 않은 치기가 작동한 데다 요강파티라는 말이 재미있어 그걸 받아 단숨에 다 마셨다. 기억이 분명치 않으나 그것이 몇 순배 돌았다고 한다.


미8군사령관 지시로 '요강 파티' 없어져

아무리 술깨나 한다고 해도 그걸 당해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령을 부리지 못한 미욱함이 일을 내고 말았다. 대취해서 잠든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여단 비행장에는 내가 포항으로 타고 내려갈 경비행기 L-20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낮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포항에서는 난리가 났다. 고길훈 사단장 이임과 신임 공정식 사단장 취임을 겸한 행사여서 매그루더 후임 멜로이 주한 유엔군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김성은 해병대사령관, 이성호 해군참모총장 등이 열석한 가운데 취임식 없는 이임식으로 행사가 끝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큰 사건이었다. 내가 인사권자라도 과음으로 취임식에 나오지 못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 둘 수 있을까. 이 사고는 군 정보계통을 통해 박정희 의장에게 즉각 보고됐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니 엉거주춤하게 사단장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이 사고를 계기로 멜로이 미8군사령관은 수석고문관에게 특별지령을 내렸다. 앞으로는 어떤 경우도 요강파티를 금한다는 엄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미 해병대 요강파티 전통이 사라졌다.

얼마 안 돼 국방부장관이 된 김성은 사령관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 일에 대해 박 의장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전대미문의 사고를 낸 1사단장 거취를 묻자, 박 의장은 가볍게 “장관이 알아서 하시지요” 했다는 것이다. 그 일은 훗날 내가 박 대통령 술벗으로 발탁된 계기이기도 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