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63) - 최초 해외 파병과 제6대 사령관

머린코341(mc341) 2015. 2. 17. 16:13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63) - 최초 해외 파병과 제6대 사령관

 

2년 동안 제1해병상륙사단장 임무를 무사히 마친 나는 1946년 군문에 들어온 지 18년 만인 1964년 7월 제6대 해병대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과한 지 14년 된 사람이 자격이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이 일었다. 해사 출신 최초로 사령관이 된 나는 수많은 날을 최전선에서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한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유사 이래 최초 전투부대 청룡 파월

나의 해병대사령관 시절은 월남전으로 시작해 월남전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임 1개월 만에 발생한 통킹 만(灣) 사건으로 월남전이 확대돼 임기를 마칠 때까지 청룡부대 파병 업무와 작전지휘에 온 정력을 쏟아 부은 시기다. 청룡부대 파월 이전부터 월남에 드나들면서 작전구상에 골몰했던 나는 1965년 10월 청룡부대 파월 이후 여러 차례 현지에 날아가 월남에 맞는 전술구상에 부심했다.

월남전의 특징은 전선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선이 분명한 전쟁이라면 교리에 따라 작전을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월남 땅 이곳저곳에서 베트콩이라는 비정규군과 싸워야 하는 전쟁은 상식을 초월한 전술을 요구했다.

 

전투병력에 비해 작전지역이 엄청나게 넓은 곳에서는 최소 전술부대 단위인 중대 중심으로 작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 미 해병 제3원정군사령관과의 작전협조회의에서 나는 중대 단위 방어전술이 제일 유효하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3회에 걸쳐 현지 시찰을 마치고 나는 월남전에 알맞은 특수훈련을 숙련시키도록 예하 부대에 지시했다. 공격전이 아니고 방어가 주 임무인 전투에서는 무엇보다 진지를 견고히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내(陣內)사격을 활용해야 한다는 경험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6·25전쟁 당시 임진강 사천지구 방어전 때 나는 그 전법의 효용을 경험한 바 있다. 적의 공격이 아무리 맹렬해도 진지만 견고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이 진지에 돌입한 순간에는 아군을 모두 진지 안으로 피하게 하고 아군 포대에 진내사격을 요청해 적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박스마인' 진내사격이란 10m 상공에서 폭발해 불꽃처럼 수백 개의 파편을 발사시키는 VT 신관탄 공격이다. 아군은 모두 진지 안에 숨고, 노천에 몸이 노출된 적병들에게만 피해를 가하는 마지막 수단이다.이 전법은 청룡부대의 월남전 작전 기간 중 여러 차례 성과를 보았다. 특히 ‘짜빈동 전투의 잊혀진 영웅’ 정정상 소위는 이 전법을 사용해 짜빈동 전투를 월남전 최대의 승전보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월남전 수렁에 빠진 미국의 파월 요청

 

베트콩의 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1964년 6월 호놀룰루에서 미국 정부 고위 군사회의가 열렸다. 러스크 국무장관, 테일러 합동참모본부 의장, 펠트 태평양군사령관 등 미국 군정(軍政)·군령(軍令) 수뇌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월남전에 관한 미국의 기본전략에 관한 토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전략은 제7함대를 통킹 만(灣)에 파견해 베트남 해상을 봉쇄하고, 미군을 타이 북부에 진출시켜 월맹을 압박하며, 라오스 남부 호지명 루트를 폭격하는 한편 월맹의 교통망과 공업지대를 폭격해 그들의 전쟁수행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것은 베트남의 적화를 막아 소련과 중공의 세력이 동남아시아에 뻗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월남군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경제적으로 월남정부를 도와 베트콩을 이용한 월맹의 적화통일 기도를 막아내려 했다.

그러다가 1963년 고 딘 디엠 월남 대통령이 피살되고, 3일 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사건이 일어나 월남 정국은 극도로 혼미해졌다. 이 틈을 타 월맹이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자 존슨 대통령은 군부의 적극 개입 건의를 수용, 전쟁의 길을 택하게 된다. 월남을 잃으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위태로워진다고 본 것이다.

1964년 8월에 발생한 통킹 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월남전 수렁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미군은 1964년 7월 31일 통킹 만에 있는 두 개의 섬에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미국의 비밀작전으로 코앞에 있는 섬을 빼앗긴 월맹은 잠자코 있지 않았다. 피습 3일 만인 8월 2일 미 해군 함정을 어뢰정으로 공격하는 보복을 감행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월맹군 해군기지와 유류 저장고를 폭격했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또 다른 보복은 더 큰 보복을 초래했다. 월맹은 베트콩을 시켜 사이공 북쪽 비엔 호아 미군 비행장을 공격해 항공기 여러 대를 파괴했다. 뒤이어 사이공 시내 미군 호텔을 폭파,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면서 월맹은 남부 해방전선에 정규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정면으로 맞붙을 태세였다. 그러자 미국은 자제에 자제를 거듭하던 북폭 결정을 내렸다. 북위 17도선 넘어 월맹의 군사시설에 대한 제한적인 북폭을 가하자, 월맹은 퀴논 시내의 미군 숙소를 폭파해 50여 명의 미군을 살상했다.

이것이 미국에 확전의 빌미가 됐다. 미국 정부는 북위 19도 이남에 대한 폭격을 허용했다. 폭격의 표적과 출격 횟수가 제한돼 군 수뇌부의 불만을 샀지만 미국의 개입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1964년 말부터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웨스티) 장군은 지상군 파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허약한 월남군만으로는 도저히 월맹군 공격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월맹 정규군이 전쟁에 투입된 뒤로 월남군 진지가 유린되고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기우는 징후가 뚜렷해졌다. 월남전 상황을 둘러본 해럴드 존슨 미 육군참모총장은 정부에 육군 1개 사단 파병을 건의했다. 이를 받아들인 합동참모본부는 1965년 4월 초 안보회의에서 미군을 2개 사단으로 늘리고 한국에 파병을 요청, 국제전쟁으로 양상을 바꾸어 가는 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파병논의가 무르익어 갈 때 베트콩이 월남군 2개 연대를 격멸시키고 몇몇 군청 소재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무렵 월맹군 정규사단이 월남에 침투한 사실이 확인됐고, 2개 사단이 호지명 루트를 따라 침투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에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파병 관련, 미 해병대사령관 그린 대장의 초청

 

미국의 한국군 월남파병 요청이 보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린(Green) 미 해병대사령관의 방미 초청을 받았다. 교육과 훈련을 위한 한미 양국 해병대의 교류는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례와 달리 특별기를 준비하는 등 파격의 연속이어서 신경이 쓰였다. 묻지 않아도 한국군 파병과 관련 있는 초청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1965년 6월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날아가는 기내에서 나는 머리가 복잡해 잠을 청해 보았다. 그러나 몸이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적인 제의에 어떻게 응대할지를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낭패가 아닌가. 출발에 앞서 주한 미 해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해병대사령부 미 해병대 수석고문관 등등의 인사들에게서 월남전 상황과 미국의 사정에 대해 여러 번 설명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미 해병대 수석고문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 해병대가 월남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한국전쟁 때처럼 만일 두 나라 해병대가 형제가 돼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같이 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 그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 있던 나는 하와이에 도착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나를 워싱턴까지 태우고 갈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미 해병대사령관 전용기였다. 기내에는 작전상황실과 주방·침실까지 있고, 군의관까지 탑승하고 있었다. 가난한 나라 사령관은 엄두도 내지 못할 항공기였다.

 

워싱턴 공항에서 필자 부부를 영접하는 미 해병대사령관 그린 대장

 

워싱턴 공항에 도착해 나는 또 한번 놀랐다. 공항에 해병대 의장대와 군악대가 도열해 있다가 내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팡파르를 울렸다. 국빈이 아니면 이런 예우를 하지 않는 법인데 왜 이러나 싶었다.

워싱턴에서는 펜타곤(국방성)을 방문, 국방부 간부들과 면담하고 백악관도 방문했다. 국방담당 비서관 정도를 만날 줄 알았던 나는 존슨 대통령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대통령이 한국의 해병대사령관을 만나준 것도 그렇고 워싱턴과 뉴욕 체류 중 사용하도록 대통령 전용 헬기와 험프리 부통령 전용차를 내준 일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 D.C 팬타곤에서 존슨 미 대통령을 대신해 국방성 니츠(Nitse) 해군성 장관으로부터 미 최고 지휘관 훈장을 수여받는 필자


미 해병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그 부대의 지휘관·참모들은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말을 했다. 한국전쟁 때 양국 해병대가 협동하면서 싸운 이야기 끝에, 월남전에서도 한국 해병대와 형제가 돼 같이 싸우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해병대사령부 방문 때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대로 말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여러분과 의견이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해병대의 해외 파병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결정할 일입니다.”

 

이 답변 끝에 그린 사령관이 물었다.

 

“만일 미국 정부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요청하면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에게 해병대 파병을 건의할 용의가 있습니까?”

나는 또 원칙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상황을 보아 참모들과 의논해 결정하겠다는 식이었다. 그린 사령관은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적극 협조해 달라는 말로 넘어갔다. 미국 시찰 중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이 마련됐다. 한미 양국 기자들은 한국 해병대가 월남전에 파병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예의 원칙적인 답변을 한 뒤에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어떤 기후 조건에서나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월남에 파견된 비둘기부대 2000명 가운데는 해병대 1개 공병중대가 포함돼 있음을 강조했다. 인터뷰 기사는 미 공보원 뉴스와 코리아타임스 등에 크게 보도됐다.


"해병대가 먼저 가시오"

귀국 후 사태는 빠르게 진전됐다. 귀국한 지 며칠 안 돼 미국은 우리 정부에 1개 전투사단의 조속한 파병을 요청하는 공식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지상군을 파견하면 금세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던 미국 정부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의 희생자가 늘어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 한국을 끌어들여 정의의 전쟁으로 인식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가 접수된 다음날 청와대에서 특별 리셉션이 열렸다. 국군 파월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리셉션에는 김성은 국방부장관, 장창국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과 나, 유엔군사령관 비치 대장 등 한미 군 수뇌와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했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와 해병대의 월남 파병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필자


이 자리에서 브라운 대사와 비치 사령관은 미국 정부의 뜻을 전하면서 협력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협력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김 장관과 일부 군 수뇌들이 조심스럽게 동조의 뜻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의사표명을 하지 않고 있던 김용배 육군참모총장과 나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기회가 대한민국이 해외로 진출해 국운을 개척할 좋은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언제쯤 출동할 수 있겠습니까?”

 

박대통령은 결심을 굳힌 듯했다. 김 육군총장이 먼저 대답했다. 파병에 지원할 장병들의 신청을 받아 부대를 편성하고, 월남과 비슷한 정글전투 훈련을 제대로 시켜서 보내려면 6개월 이상 걸리겠다는 것이었다.

“해병대는 어떻소?”

“우리 해병대는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지금이라도 출동할 수 있습니다.”

 

김 육군총장과 너무 다른 대답에 의아해하는 박 대통령에게 나는 부연설명을 했다. 해병대에는 언제 어디라도 즉각 출동하는 것이 사명인 국가 전략기동부대이므로, 24시간 이내에 1개 대대 상륙전투단, 48시간 내에 1개 연대 상륙전투단, 72시간 내에 상륙사단 병력이 출동할 수 있도록 훈련돼 있다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크게 고무된 듯 환하게 웃으며

“대단합니다. 그러면 해병대가 먼저 가시오.”

 

월남전에 투입되기 위한 부대 편성과 적응 능력을 감아한다면 황당무계한 것이었으나 국가전략기동군이라는 임무르 부여받은 해병대의 사령관으로서 당연한 답변이었으며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적절한 대처였다.

 

필자는 이봉출 준장을 청룡부대장으로 임명, 해병대가 독립부대로 파병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전투부대 파병은 그날 이렇게 공식 결정됐다. 미국 측 참석자들은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특히 브라운 대사가 만족한 것 같았다.나는 즉시 파병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해병 제2여단을 창설해 이봉출 장군을 부대장에 임명했다.

 

"공 사령관 생각대로 하시오"

 

청룡부대라는 이름은 내가 직접 지었다. 바다의 제왕인 청룡은 동쪽의 기운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의 상징이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는 말에도 청룡이 백호보다 우위임이 드러난다. 바다를 주름잡을 부대의 이름으로 동방과 바다를 함께 상징하는 동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싶었다.

 

부대를 편성하고 이름 짓는 일까지는 착착 추진됐는데 엉뚱한 걸림돌이 생겼다. 부대 편성 뒤에 합참에서 하달된 작전명령을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청룡부대를 육군수도사단(훗날의 맹호부대)에 배속시켜 육군과 해병대 혼성 전투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병 방침이 결정된 뒤 나는 해병대 주 임무인 상륙작전 교리를 발전시키려면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전제 아래 청룡부대를 창설한 것인데 지상군 작전배속이라니….

국방부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다 묘안이 떠올랐다. 출전준비를 완료한 뒤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을 초청, 출정식을 감행함으로써 독립 해병부대 파병을 기정사실로 굳히기로 했다. 1965년 여름 휴가차 진해별장에 머무르던 박대통령을 찾아가 설득작전을 폈다.

“우리 해병대가 주월한국군의 작전통제를 받는 것도 좋지만 세계 최강인 미국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지난번 미국 출장 때 미 해병대사령관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 해병대와 많은 연합작전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월남은 특수전이 요구되는 지역이니 미 해병대의 새로운 상륙전 교리도 배울 수 있고, 귀국하면 새로 개발된 상륙장비도 획득하는 일거양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돌아와 철저한 출정식 준비를 독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초대 청룡부대장인 이봉출 장군에게 부대기를 수여하고 있다. 왼쪽부터 주한 유엔군사령관 비치 대장, 이봉출 초대 청룡부대장, 박정희 대통령, 해병대사령관인 필자

 

디어 1965년 9월 20일 출정식 행사가 거행됐다. 부대 창설 보고를 통해 독립부대로 출전해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펼칠 계획과 상륙훈련이 완료됐으며, 그동안 그런 전제 아래 정글전투 실전훈련까지 계속해 왔다고 보고했다.

“공사령관 생각대로 하시오.” 보고를 받고 박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뜻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이봉출 청룡부대장에게 직접 부대기(군기)를 수여했다. 드디어 내 뜻이 관철됐다.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대통령이 부대기를 수여함으로써 해병청룡부대가 태어난 기정사실을 어쩔 수는 없었다.

한국 해병대의 새로운 신화인 청룡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만일 그때 그 작전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청룡부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출정을 앞두고 나는 월남전에 대비한 특수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베트콩의 지하 동굴, 부비트랩 같은 갖가지 장애물이 설치된 월남의 촌락을 그대로 본뜬 특수훈련장을 만들어 놓고 정글전투에 적응하는 훈련이었다.

틈틈이 월남정세며 함상생활, 국제전에서의 군대예절, 현지 기후에 적응하는 개인보건 교육까지 시켜 가면서 출전에 차질이 없도록 세심하게 챙기고 또 챙겼다.

 

드디어 출정! 출정!

 

드디어 역사적인 출정의 날이 왔다. 1965년 10월 3일 청룡부대는 5000년 민족사에 해외 진출하는 첫 전투부대로 부산항을 떠나면서 길고 힘찬 기적을 울렸다.

청룡부대가 캄란 만에 상륙한 뒤 한국 해병대의 명성을 알고 있던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티 장군이 청룡을 자신의 작전통제 아래 편입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렇게 되면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하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즉각 월남으로 날아갔다. 웨스티 장군을 만나 그 조치의 취소를 요구했다.

“미 해병대보다 더 잘해 줄 테니 염려 마시오.”

 

웨스티 장군은 장비와 보급 문제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하기로 약속돼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때부터 같이 싸운 형제 해병입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채명신 소장과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은 청룡부대를 휘하에 두고 싶어 했으나 필자는 세 번째로 월남을 방문해 미 해병제3원정군 쿠시맨 중장과 회동하여 한·미 해병대의 연합작전 체계를 학립했다. 1965.11


나는 미 지상군 작전통제를 거부했다. 웨스티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룡부대 작전통제를 미 해병 제3원정군으로 바꿔 주었다. 서로 청룡을 데려가려는 것은 즐겁고 고맙지만, 해병의 역사에 지상군 예속이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뒤에 주월한국군사령부도 그것을 원했지만 같은 이유로 미 해병 제3원정군과의 연합작전을 택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