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6) - 맥아더 해임
역사에 가정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 해임만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만일 그가 그 시점에서 해임되지 않았다면 휴전협상과 한국전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많은 한국인이 믿고 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맥아더 장군은 중공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결심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그는 본국 합동참모본부에 중공 해안 봉쇄와 중공 본토 폭격을 건의했다. 북한을 돕지 못하도록 중공의 손발을 묶어버리면 전쟁은 쉽게 끝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건의를 보고받고 격분했다. 맥아더를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굳어졌다.
대통령이 노했다는 말을 들은 맥아더는 트루먼의 아시아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우리가 중공 내륙으로 군사작전을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으로 참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대중공 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통령을 젖혀 놓고 멋대로 구는 것이 정치적 야심의 발로라고 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맥아더는 1951년 4월 10일 극동군사령관 직에서 해임됐다.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한 맥아더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일화를 떠올리곤 한다. 한 가지는 그의 한강전선 시찰 때의 일화이고, 또 한 가지는 근년에 맥아더 동상을 천막농성 끝에 철거 위기에서 지켜낸 일이다.
6·25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 27일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 호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린 그는 한강 남안으로 달려가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한국군 병사에게 물었다. 왜 위험한데 후퇴하지 않느냐고.
“상관의 후퇴명령이 없었습니다.”
“훌륭한 군인이다. 자네 소원이 무언가?”
“총과 총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어렵지 않지. 총과 실탄을 주고 말고! 다른 소원은 없는가?”
“없습니다.”
감격한 맥아더 장군은 전속부관에게 말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전쟁의 영웅이라 한들 어느 누가 피원조국 말단병사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감동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서 구출해 준 고마움을 인천시민들은 동상건립으로 보답했다.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 기념일을 기해 인천시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자유공원에 동상을 건립했다는 보도를 보고 나는 가슴이 뿌듯했다. 이제야 겨우 체면을 차린 기분이었다.
맥아더 동상 앞에서 파안대소하는 필자. 2005년 10월은 우리 해병대 전우회가 동상을 지켜낸 후였다.
그런데 몇 해 전 좌파단체들이 맥아더 장군을 전쟁 범죄자로 몰아 그 동상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 범죄자이며, 한반도를 분단시켜 남한을 미국의 종속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였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해병대전우회 동지들도 같이 들고일어났다. 그 비용의 일부를 기꺼이 부담했다. 동상 앞에 천막을 치고 3개월을 몸으로 지켰다. 이 불안한 평화의 끝이 어떻게 될지 그게 늘 걱정이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6대사령관 공정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8) - 해병대 창설 5주년과 이승만 대통령 (0) | 2015.02.14 |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7) - 교육단 시절, 상륙전 교육과 훈련 (0) | 2015.02.14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5) - 정전과 불안한 평화 (0) | 2015.02.08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4) - 삭발중대 (0) | 2015.02.06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3) - 전장의 자비심과 폭탄, 전장의 이중성 (0) | 201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