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15) 비망일지초
다음에 적어 두는 것은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 해병대사령부와 예하부대를 방문했던 국내외 인사들의 방문과 부대 안팎에서 거행된 특별한 행사와 관련된 얘기를 일지 형식으로 간추려 본 것이다.
1966년 10월 26일, 서울신문사 장태화(張泰和) 사장이 고 이인호(李仁鎬) 소령의 유족을 위해 마련한 서울신문사의 조위금을 전달하기 위해 사령부를 방문했다.
1966년 10월 29일에 한국을 방문했던 존슨 미국 대통령은 11월 1일박정희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 김계원 대장의 안내로 중부전선의 육군 전방부대를 시찰했는데, 그 날 그 전방 부대에서 존슨 대통령은 나의 안내로 그 곳에 도착한 고 이인호 소령의 미망인 이경자 여사에게 미 합중국 정부가 추서(追敍)하는 실버스타(은성무공훈장)를 수여하고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깊게 되새겼다.
1966년 12월 24일,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과 박순천(朴順天) 민중당 당수를 비롯한 여·야 국회의원 일행이 해군 구축함에 탑승하여 서해 최북단의 전초기지 백령도(白翎島)를 방문하여 엄동의 전초기지에서 국토방위에 여념없는 장병들을 위문하고 격려했다. 이효상 의장 일행은 백령도에 있는 천주교 안드레아 병원에도 들렀는데 그 귀빈들의 서해 부대 시찰여행에는 나와 장기수 해군 참모총장도 동행을 했다. 당시의 서해 도서부대장은 황병호(黃炳鎬) 대령이었다.
1967년 1월 10일, 김성은 국방장관이 초도순시차 사령부를 방문했다. 나의 사령관 임기 중 사령부를 방문했던 국방장관은 김성은, 최영희, 임충식 장관 등 3명이었다.
1967년 1월 19일, 초대 청룡부대장으로서 용명을 떨치고 귀국 개선한 이봉출 준장을 위한 환영 리셉션이 해병대사령부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해병대사령관이 베풀었던 그 리셉션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필 공화당 의장, 박순천 민중당 당수,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 본스틸 유엔군사령관 등 많은 내외 귀빈들이 참석했다.
한편 그로부터 2~3일 후 나는 이봉출 준장과 고 이인호 소령의 유가족(미망인과 두 자녀)을 사령부로 초치하여 이인호 소령의 동상(銅像)을 제작하고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그 현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동상은 남산미술관 이일녕(李逸寧) 관장에 의해 제작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1967년 2월 4일, 국방부에서는 각 군에서 선발한 선임하사관(先任下士官)들을 데리고 청와대를 예방하여 대통령에게 신고를 드린 다음 대통령의 유시(諭示)를 듣고 기넘촬영도 했다. 또 청와대에서 베푼 칵테일파티에도 참석을 했는데, 그 날 청와대 예방 시에는 국방장관과 각 군 총장 및 해병대사령관이 동행을 했다.
한편, 그 때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예하부대에서 선발한 20명의 선임하사관들을 하루 전날 사령부로 집합시켜 국제관광공사 사장 김일환(金一煥) 장군이 워커힐에서 베풀어 준 칵테일파티에 참석하게 했고, 또 청와대를 방문했던 그 날 아침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선임하사관 회의를 개최하여 사령관에게 신고를 하고 훈시를 듣게 한다음 청와대로 가게 했다. 그리고 청와대를 예방했던 그 날 저녁에는 그들을 한남동에 있는 사령관 공관으로 초치하여 사명감 고무를 위한 푸짐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1967년 3월 초순경, 미 해병대의 주월 제3상륙군사령관을 역임하고 본국으로 전임(轉任)하게 된 월트 중장이 본국으로 귀환 도중 사령부를 방문하여 나의 영접을 받고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그 날 월트 중장은 나에게 월남전선에서 노획한 56식(式) 중공제 자동소총 1정을 선물로 기증했는데, 나는 그 소총을 진해기지사령관 박성철(朴成哲) 소장에게 보내어 당시 진해기지에 건립되어 있던 해병대기념관에 보관하도록 했다.
1967년 4월 7일, 한국을 방문했던 홀트 호주(濠洲) 수상은 나의 안내로 김성은 국방장관과 본스틸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김포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5여단을 방문하여 부대 현황을 청취한 다음 수도권에서 적지(敵地)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알려져 있는 애기봉(愛技峰)의 최전방 관측소에서 쌍안경을 가지고 강 건너편쪽 적지를 관측하는 한편 여단본부에서 전시해 둔 월남전 사진을 관람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1967년 4월 21일, 해병 진해기지 사령부에서는 고 이인호 소령의 동상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 식장에는 고인의 유족과 김성은 국방장관, 해병대사령관, 재진해 해병대의 단위부대장, 육대(陸大)총장, 진해지구의 기관장과 지방유지, 학생대표 및 진해기지 행사부대 장병 등 많은 귀빈들과 현역장병들이 참석했는데, 동상 건립에 소요된 기금은 해병대 장교단과 각계 각층에서 보내 온 성금으로 충당했고, 그 현장에는 박 대통령을 위시한 각계 각층에서 보내 온 수많은 화환이 답지해 있었다.
1967년 6월 28일, 태국(泰國) 해군참모총장 차룸 차람 티아라나 대장이 사령부를 방문하여 한· 태 양국 해군·해병대의 유대를 깊게 했다. 그 태국 해군총장은 1969년 내가 태국 정부의 초청으로 태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각별한 교분을 맺었었다.
1967년 7월 7일, 미국 합참의장 무어 해군대장이 사령부를 방문했다. 무어 대장은 그 해 9월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방성에서 폴지나티우스 미 해군장관이 나에게 미 합중국의 '리젼 오브 메리트'(장관급 지휘공로훈장)을 수여할 때 그 자리에 입회했었다.
1967년 9월 25일이었다. 그 날 나는 충남 청양군(靑陽郡)에 있는 구봉광산(九峰鑛山)에서 채광작업을 하던 중 갱도가 붕괴되어 8월 22일 낮 12시 40분부터 9월 6일 밤 9시 15분까지 만 368시간 35분간을 지하 125미터의 갱도 속에서 사신(死神)과 싸우다가 구조대의 필사적인 구조 노력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적인 인간승리자'라는 등의 찬사를 받은 양창선(楊昌善)씨(해병 7기)가 구출된 후 입원해 있던 국립의료원에서 퇴원을 하자, 곧 사령부로 초청하여 그를 위로하고 사지(死地)에서 발휘한 불굴의 해병투혼을 높이 치하했다.
그런데 그 후 근 20년간 망각 속에 묻혀 있던 그 양창선 씨는 금년 6월 29일에 발생했던 삼풍백화점(三豊百貨店) 붕괴사고 때 국내 여러 방송국의 TV화면에 얼굴을 비쳤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발생 11일째 되던 날에 최명석(崔明錫·21세)씨가 기적적으로 구조되고 13일째와 17일째 되던 날엔 유지환(柳智丸·18세) 양과 박승현(朴勝賢·19세) 양이 차례로 구조되자, 각 방송국에서는 18년 전 구봉광산(九峰鑛山)의 갱도 붕괴 시 지하 125미터의 갱도 속에 갇힌 지 16일 만에 기적적으로 구출된 그 화제의 주인공(양창선)을 TV화면에 출연시켜 그가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과 생존자 구조에 대한 유익한 조언을 하게 했고, 또 주요 일간신문사에서도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일제히 그에 대한 인터유 기사를 보도했다.
황해도 출신인 양창선 씨(당년 65세)는 현재 충남 논산(論山)에 있는 어류가공업체인 풍원산업(주) 보일러실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다.
1967년 11월 하순경, 국내에서는 서울신문사에서 개최한 대통령기 쟁탈 전국 단체대항 태권도 대회가 열렸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던 해병대팀이 우승을 차지하여 해병대의 명예를 빛냈다.
서울신문사에서 개최한 그 대회에는 육군을 대표하는 육군 공수부대팀과 대학 및 일반인팀 등 30개팀이 참가하여 패권을 겨루었는데, 그 대회에서 최동진(주장), 유기대, 최영렬, 김인수, 유영환, 최권열, 오현승 해병 등으로 구성된 해병대팀은 육군 공수부대팀의 참가 포기로 그 대회가 없어질 때까지 연 4년간 연승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오른쪽 지면에 수록된 사진은 우승을 차지한 11월 25일, 우승 신고를 하기 위해 우승기를 가지고 사령관실을 방문한 선수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1968년 1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안내로 김성은 국방장관과 함께 김포 해병여단을 시찰하고 혹한 속에서 국토방위에 임하고 있는 일선장병들을 격려했다.
해병대 창설 19주년을 목전에 둔 1968년 4월 3일, 해병대사령부에서는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이 켰던 김동조(金東祥) 주미대사와 청룡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숙명여대 윤태림(尹泰林) 총장에게 명예해병증(名譽海兵證)을 수여했다.
해병대에서 명예해병을 처음으로 탄생시켰던 것은 1963년 9·28 수도탈환 13주년 기념식 행사 때(제 5대 김두찬 사령관 재임기간 중)이다. 6·25전쟁 이후 해병대와 맺게 된 특별한 인연으로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공이 켰던 일곱 분의 인사들을 명예해병으로 추대하여 그분들에게 명예해병증을 수여했던 것인데, 최초로 탄생된 그 7인의 명예해병은 국어 국문학계의 테두(泰斗)였던 이희승(李熙昇)박사와 고려대학교의 김성식(金成植) 교수, 이경재(李鏡宰) 문산(汶山) 농업학교장, 여류작가 이명온(李明溫) 여사, 미국 공보원 원장 리지웨이 씨 및 또 한 분의 미국인 여성(성명 부지)등이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미국인 여성은 한국전선에서 전사한 미국 해병의 어머니로서 6·25전쟁 후 한국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보다가 귀국 후 한국해병대의 도미 유학생들을 극진히 돌봐 준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제6대 공정식(孔正植) 사령관 재임기간 중에는 김포 해병여단과 자매결연을 맺은 중앙대학교 임영신(任永信) 총장과 국회 국방분과위원장 김용태(金龍泰) 의원을 명예해병으로 추대하게 됨으로써 명예해병 가족이 9명으로 늘어났었는데, 나의 임기 중 그 두 분을 추대하게 됨으로써 11명으로 늘어났었다.
1968년 4월 8일,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禁命新) 중장이 사령부를 방문했고, 그 해 10월 4일에는 태국 소년단 집행위원장 파타이 아마타야쿨(Pa Thai Ami Tayakul)씨가 사령부를 방문하여 나와 한·태 양국의 청소년 교류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968년 5월 19일, 세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했을 때 나는 각 군 총장들과 함께 그 국빈 영접에 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황제의 청와대 예방과 국립묘지 참배, 그리고 춘천시(春川市)에 건립된 에티오피아군의 6·25 참전기념비 제막식 현장에까지 황제를 수행했는데, 6·25전쟁 때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皇室近衛隊)에서 편성한 1개 대대 규모의 보병부대를 파한했었다.
프로야구가 탄생되기 전인 1968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한국야구협회가 주관한 전국 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실업팀과 대학 및 군 부대팀 등 20여 개의 출전팀이 참가했던 그 전국 선수권대회에서 해병대 야구팀이 우승을 차지하여 우승기와 우승컵 및 개인상 등을 휩쓸다시피 했다.
1963년 초, 해군헌병대 차감으로 있던 이동용(李東用) 대령(후일 청룡부대장, 해군제2참모차장 등 역임)에 의해 창단이 되었던 해병대야구팀은 재정적인 뒷받침이 어려워 창단 1년 후 해체 위기를 맞고 있었으나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재건이 되어 1968년도의 국내선수권대회에 출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해병대 야구팀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김진양 씨(문관)였고, 선수들은 정동진(현 태평양 돌핀스 감독), 강병철, 우용덕, 한동화, 김우열 해병이 주축이 된 약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매니저는 해병대의 야구팀을 발족시킬 때 산파역을 맡았던 조해연 상사(현 프로야구협회 운영부장)였다.
내가 대장의 계급으로 승진한 직후인 1969년 1월 7일, 미 해병대사령관 차프만(Chapman) 대장이 사령부를 방문하여 한·미 해병대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한편 철군(월남)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했다. 1968년 6월, 그 때 이미 미 해병대는 휴전협상의 진전에 따른 축전(縮戰)조처에 따라 전략적인 작전기지인 케산에서 철수를 한 바 있었다.
1969년 1월 20일, 서울에 주재하는 각 국 대사관 무관 일행이 신년하례차 사령부를 방문하여 한국 해병대와의 우의를 돈독히 했다. 각국 대사관의 무관들이 단체로 사령부를 방문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와 같은 일은 그만큼 해병대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했던 인사들은 한국으로 부임하는 각 국 대사와 무관들, 외국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부임하는 한국대사와 무관들, 한국을 방문하는 각 국의 고위장성들, 월남으로 파견되거나 월남전선으로부터 귀국, 개선하는 한국군 장성들, 부임하거나 이임하는 미 8군사령부나 유엔군사령부의 고위장성 등 수없이 많았다.
1969년 1월 22일이었다. 내가 대장으로 승진한 지 20일 후 박정희 대통령은 각 군 본부에 대한 신년도 초도순시를 함에 있어 제일 먼저 해병대사령부를 시찰하여 해병대의 현황을 청취하고 빈틈없이 수행되고 있는 출전태세를 높이 평가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해병대사령부를 시찰했던 일은 그 전에도 전혀 없었고, 그 후에도 전혀 없었던 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나의 사령관 취임연도인 1966년 4월부터 1969년 9월 28일에 이르기까지 해병대사령부에서는 3회에 걸친 해병대 창설기념일(4.15)과 9·28 수도탈환작전 기념일을 맞이하여 사진전시와 군악연주, 의장대 시범훈련과 고적대(鼓笛隊)의 순회공연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거행했었는데, 특히 1967년에 9·28 수복 17주년을 맞이했을 때는 서울특별시에서 기념식을 남산(南山) 야외음악당에서 성대히 거행하여, 초청을 받은 9· 28 참전용사들에게 서울시민의 이름으로 된 선물도 증정했다.
그 날 오전 10시부터 많은 시민들과 해병대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그 기념식에 9·28 당시 2대대 6중대 1소대의 분대장으로서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 앞장섰던 수훈의 용사인 양병수(梁昞洙) 병조장(兵曺長)과 함께 참석했던 나는 9·28 참전용사들을 초대해 준 김현옥(金玄玉) 서울특별시장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수훈의 양병수 병조장은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이며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영면하고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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